이야기의 플롯은 언뜻 보기엔 로판의 클리셰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듯 합니다. 도박에 빠진 가주 때문에 완전히 몰락해버린 지방 귀족 가문의 여식인 여주가 수도의 유수한 공작 가문에서 가정교사 일자리를 구합니다. 그곳에서 소공작인 남주와 그의 어린 이복 동생 남매를 만나게 되지요. 대한민국의 교사였던 전생을 기억하는 여주, 공작의 지위를 이어받는 남주 그리고 문제거리 이복 동생들이라는 설정에서 독자는 이들의 감정과 관계가 어떻게 변화해갈지 대충 짐작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 이야기는 성급한 독자의 예상을 멋지게 배반합니다. 펼쳐지는 사건들이 전혀 로맨틱하거나 낙관적이지 않거든요. 남주는 제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공작의 자리에 오릅니다. 남주의 이복 동생들은 그에게 제거해야 할 대상일뿐입니다. 대한민국 교사 패치 완료된 여주는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패륜 살인자인 남주와 거래를 해야 합니다. 이런 극악한 상황에서 과연 로맨스와 힐링이 가능하기나 할까요…? 살인자와의 사랑? 희생의 제물이 될 아이들과의 따스한 관계? 그런데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가 이 소설의 묘미인 것 같네요.
남주는 분명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 범죄자입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남주의 친모를 살해했고 남주를 학대했습니다. 후처 소생의 아이들-남주의 이복 동생들도 남주를 학대하기 위해 이용하는 도구일 뿐이었죠. 그리고 급기야 성인이 된 제 아들을 죽여버리려고 했죠. 이런 상황에서 남주는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그리고 이복 동생들에게는요…? 남주가 그저 그런 살인자일뿐이었다면 패륜의 비밀을 걸고 거래를 제안한 여주의 목숨과 이복 동생들의 목숨을 즉시 거둬들였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요. 한낱 가정교사일뿐인 여주의 말을 들어주고 이복 동생들의 거취에 대해 끊임없이 갈등합니다. 이는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뇌로 이어집니다. 살인자인 나는 앞으로 제대로 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내게도 따스한 마음 한 자락이 가능할까? 라는 반성 말이죠. 그리고 제대로 살기 위한 그의 노력은 여주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분투로 발현됩니다.
여주의 캐릭터 또한 단순하지 않습니다. 전생의 기억 때문에 대한민국 교사 패치가 완료된 여주는 K-유교걸 원칙주의자이기도 하지요. 이런 여주에게 아버지를 살해하고 배다른 동생들마저 살해하려고 했던 남주가 마냥 로맨틱하게만 보일까요…? 아니 그 전에 남주의 살인을 묵인한 스스로를 여주는 참아낼 수 있을까요…? 아무리 아이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더라도요. 더 나아가 남주의 살인을 인정하고 그를 평생의 반려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도덕주의자 여주가…? 더군다나 사랑에 대한 동경이라고는 한 푼도 없는 현실주의자가…? 하지만 끝이 없을 것 같은 감정의 갈등 속에서 여주는 점차 도덕의 원칙에서 벗어나 인간 자체의 모순을 이해하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죠. 자기 자신의 모순 조차요.
극악한 상황 속에서 복합적인 캐릭터들이 모순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갈등하는 과정이 다소 답답하고 다크하게 느껴질 수는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끝에서 완성되는 로맨스는 개연성이 충만하고 탄탄하며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힐링의 카타르시스는 사이다에 비할 바 없게 되는 것이죠. 인간에 대한 작가님의 통찰과 능란한 필력에 감탄을 금치 못한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