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소개 글에서는 분명 로코의 향기가 물씬 났었는데요. 처음엔 세상물정 모르는 여주와 여주에게 덕통사고 당한 남주 때문에 빵 터지기도 했구요. 여주가 SS급 각성자의 능력을 가진 군인이면서 회귀까지 했으니 남주와 함께 속시원한 활약을 펼쳐 운명을 바꾸길 기대하기도 했네요. 하지만 심각한 자낮인 여주는 계속 고구마를 먹이고 설상가상 절정에서 잔뜩 꼬여버린 이야기는 심각하게 피폐해집니다.
회귀 클리셰의 전형에서 벗어난 전개에 실망하고 답답해졌지만 작가님의 무시무시한 필력에 멱살잡혀 끝까지 달려버렸네요. 그리고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전 생에서 평생을 학대받다가 죽을 때마저도 끔찍하게 고통스러워야 했던 여주가 회귀한다고 해서 과연 단번에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이전 생의 기억과 성격을 그대로 갖고 회귀한 자낮 여주가 하루 아침에 자신만만한 먼치킨이 될 수 있을까?
아니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여타 회귀 클리셰에서 거침없이 운명을 쳐부수는 여주들이 오히려 낯설어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여주를 받아들이게 되지요. 여주는 이전 삶과 죽음에 걸쳐 처참한 고통만 겪었기에 회귀해서도 편안하게 죽을 방법만 찾았던 것이며, 그래서 돌아온 삶에는 별다른 목적도 의욕도 없이 매사 수동적이었던 것이죠. 어쩔 수 없었던 거에요.
사실 남주 덕분에 여주를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남주는 비참한 이별로 정해진 자신과 여주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수 천 번, 수 만 번 회귀를 거듭합니다. 그런데 남주가 회귀한다고 해서 일회 차에 여주를 만났던 그 시점으로 딱 맞춰 돌아간다는 보장은 없네요. 여주 또한 회귀하니까요. 의지에 우연이 개입하여 남주와 여주가 만나는 경우의 수가 무한대로 늘어나게 되는 겁니다. 단 한 번의 회귀로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는 회귀를 무한 반복할 정도의 끈질긴 의지와 지난한 노력, 불굴의 정신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남주가 몸소 보여주고 있네요.
초반 로코스러운 분위기가 점점 무거워지면서 세계관이 갑자기 확장되는 전개에 불만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작가님이 전하고 싶으셨던 메세지를 위해서는 이런 전개가 불가피했을 것 같네요. 회귀에 대한 색다른 시각, 진짜 흥미로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