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생활자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72
조규미 지음 / 자음과모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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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뭐랄까, 어떤 일이든 잘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잘되지 않더라도 버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버텨 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잘된 거니까.

그것만으로도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첫 장을 펼치고 하루 만에 다 읽어 버렸다. 청소년소설이 내 학창시절을 지켜 주었는데, 그런 책을 다시 만난 것 같아 기쁘고 반가웠다.

독자를 끌어들일 만한 재미도 분명 가지고 있는데, 게다가 한국 문학계에서 흔치 않은 SF소설이다.

정확히 언제인지 모를 미래 시대. 경제적으로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은 '청소년 기숙사'에 맡겨져 길러지는 경우가 많다. 이 이야기는 그런 청소년 중 하나인 '진진'이 가면 회사 '아이마스크'의 베타테스터로 선정되면서 시작된다.

아이마스크에서 출시하는 가면은 보통 가면이 아니다. 판게아라는 물질로 만들어진 이 가면은 묘사된 내용을 토대로 상상해 보자면 가면보다는 팩에 가까운데, 착용하는 순간 사용자의 얼굴을 보다 아름답게 바꿔 준다.

이 가면은 신기한 만큼이나 가격이 매우 높아 소수의 경제적 부유층만 사용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가면 사용자들을 '가면생활자'라고 부른다. 가면생활자와 가면 베타테스터들에게는 또 하나의 특전이 주어지는데, 가면생활자들 이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정원'이라는 부자들만의 낙원이 그것이다. 진진은 베타테스터로 선정되면서 그토록 꿈에 그리던 정원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된다.

한편 진진과는 다른 청소년 기숙사에 살고 있는 오타는 어느 날 자신의 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서 뜻 모를 편지를 받는다. 오타는 그 편지를 통해 '안티마스키드', 가면에 반대하는 집단의 사람들과 만나게 되고, 형이 아이마스크 연구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가면에 뭔가 심각한 결함이 있고, 형은 아이마스크 측에 감금되어 있다고 추측한 안티마스키드는, 그 진위를 알기 위해 오타를 베타테스터로 위장시켜 정원으로 들여보내기로 한다.

이러한 설정에서도 확연히 느낄 수 있듯이, 빈부 격차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경제적 부유층이 빈곤층을 배척하는 모습도 그려진다.

이러한 모습은 미성년자인 진진에게도 여과 없이 드러나는데, 이로 인해 진진의 열등감은 두려움으로 바뀌어 버린다. 상대적 박탈감과 배척감이 청소년인 진진에게도 고스란히 얹혀지는 것이다.

기존의 기득권층이 만들어 놓은 사회의 부조리가 미래 세대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편 같은 정원에서 베타테스터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는데도 진진과 오타의 행동이나 생각은 사뭇 다르다.

진진은 어떻게든 더 오래, 자주 정원에 머물고 싶어하며 가면생활자들 사이에 섞이기 위해 룸메이트의 구두나 옷을 훔쳐서 착용하고 나오기까지 한다. 그러나 오타는 따로 목적의식이 있어서였을까. 정원의 화려함에 크게 현혹되지도 않고 자신의 본 목적을 잊지 않는다.

정원과 가면에 집착하는 진진을 보면서는 조금 씁쓸했다. 아무리 애써도 결코 가면생활자들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여기서 기 드 모파상의 『목걸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친구에게서 값비싼 목걸이를 빌렸다가 그것을 잃어버린 르와젤 부인은, 목걸이 값을 갚기 위해 온 생을 바쳐 돈을 벌었지만, 그녀가 빌린 목걸이는 사실 몇 푼 안 하는 가짜였더라.

가면을 단단히 붙잡은 채 기숙사로 도망치는 진진의 뒤를 쫓아가며 계속 생각했다. 정말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바라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만, 딱 한 번만 생각해 본다면 좋을 것을.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잡은 좋은 청소년소설 중 하나였지만, 이야기가 조금 더 길었으면 했다.

등장인물 각자가 마주한 사건은 얼추 마무리되었지만, 정원과 아이마스크와 가면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건재하다. 소설은 이제 막 무언가 시작하려 할 때 끝나 버린다.

그 점이 아쉬웠다. 계속해서 사회의 도구로만 이용당해 온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무언가 바꾸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이 책은 거기까지는 보여 주지 않는다. 진진과 오타는 분명 한 단계 성장했지만, 그 성장한 날개를 마음껏 펼치는 전개까지 갔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물론 현재의 결말도 깔끔하니 좋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기 마련이다.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본성이란 것은 추악한 형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가면에 먹힐 수는 없다. 거기에 지배당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번 잘 생각해 보자. 정말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말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말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은 조금만 방심해도 잊히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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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쓸쓸할 때 - 가네코 미스즈 시화집
가네코 미스즈 지음, 조안빈 그림, 오하나 옮김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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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득한 먼바다의 저 배는,

언제까지나항구에 닿지 않고,

바다와 하늘 맞닿은 곳으로만,

아득히 멀어져 가지요.

 

반짝이면서가지요.

-<>

 

내가 쓸쓸할 때는 일본 시인 가네코 미스즈의 동요 시집이다.

가네코 미스즈는 많은 유명 작가들이 몸담은 '동요시인회'의 최연소 회원이었고, '젊은 동요 시인 중 거성'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동안 내가 읽었던 시는 한국 시와 영시였기에일본인이 쓴 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깔끔한 표지를 눈앞에 두고 과연 어떤 언어를 사용했을지어떤 세계를 보여 줄지 상상했다. '과연 우리 정서에 잘 맞을까'하는 염려도 들었고동요 시집이라면 내가 읽기에는 조금 유치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쓸쓸할 때는 동요 시집이기에어린아이의 시선에서 쓴 듯한 시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그것이 유치할 것이라는 예상은 나의 오판이었다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보는 것까지 어리지는 않을 것인데.

어린아이의 관심을 끌겠다고 총천연색으로 무장한 채 평면적인 구성을 띤 작품들을 볼 때 우리는 유치하다고 느낀다그런 작품의 경우 대부분이 비슷비슷하여 상투성을 강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그러나 이 시는 따스하고 하얀 두 손으로 독자를 부드럽게 이끌어어린 시절을 회상하도록 한다그래서 나는 이 책을 성인과 어린이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다.

정서에 잘 맞을까 싶었던 마음도 역시 오판이었다. '부처님', '하느님등 종교적 언어가 직접적으로 등장하기는 하지만불교와 기독교 모두 역사적으로 우리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고 현대에도 그 명맥을 이어 오는 중이다일러두기에 '어려운 단어에는 뜻풀이를 달았습니다'라고 되어 있는데그 각주도 두 개 남짓이 전부다타 언어를 번역할 때 가장 많이 영향을 받는 리듬감과 형식 역시 잘 살아 있다무엇보다 모든 사람의 기억혹은 마음 속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을 표현하고 있기에한국 아니라 어느 국가에서 읽혀도 충분히 감동을 주리라 생각했다.

 

어머니 모르는

풀의 아기를,

수천만

풀의 아기를,

땅은 혼자서

기릅니다.

 

풀이 파릇파릇

무성해지면,

땅은 풀에

덮여 버릴 텐데.......

-땅과 풀

 

이 책은 총 1부와 2부로 이루어져 있다.

얼핏 비슷하지만, 2부에서는 조금 더 슬프고 어두운 부분까지 내려가는 시도 수록되어 있다시가 노래하는 곱고 잔잔한 풍경을 떠올리며 읽다가, '하며 페이지를 넘기던 손을 멈추게 하기도 했다아이들이라고 어찌 좋은 생각만 하리아이의 고민은 성인의 그것보다 훨씬 과소평가되기 마련이다.

가네코 작가는 이렇듯 아이보다 더 아이의 마음을 잘 표현해 냈다.

 

중간중간 들어간 조안빈 일러스트레이터의 시화도 시의 분위기를 잘 살려 준다한지에 그린 듯한 앙증맞은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 되겠다.

 

가네코 미스즈 작가는 1930년 500편의 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이라니이토록 아름다운 글을 쓰는 사람과 한 시대를 함께하기 못했다니 슬픈 일이다.

 

잠깐

물가의 조개껍질 보는 사이

그 돛단배는 어딘가로

가 버렸다.

 

이렇게

가 버린,

누군가가 있었다-

무언가가 있었다-

-<돛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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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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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뉴스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버릇을 들이게 되었어.

신문도 거짓말을 하고 역사학자들도 거짓말을 해.

오늘날에는 텔레비전도 거짓말을 해."


움베르트 에코 작가의 유작이자, 지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꼭 읽어야 할 소설이기도 하다.

저자 움베르트 에코는 기호학자,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이자 교수였다. <장미의 이름>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데,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인'이라는 이름답게 책 속 인물들은 예시를 들어도 매우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지식이 담긴 일화를 사용한다. 무솔리니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것이 거짓이고 허풍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 너무나도 자세하고 설득력 있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이렇다.

"아침에 일어나고 보니, 수도꼭지에서 물이 흐르지 않았다."

책이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 대충 알고 있는 나로서는 참으로 의아했다.

뒤표지에 가짜 뉴스를 다룬다고 되어 있으면서 갑자기 웬 수도꼭지?

다음 전개를 궁금해하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이 첫 문장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독백으로 넘어가고, 이야기에 빠르게 몰입하기 시작했다.

 

대필 작가로 일하는 '콜론나'는 어느 날 '시메이'로부터 대필 의뢰를 받는다.

콜론나가 대필해야 할 것은 어느 회상록. 어떤 정체불명의 신문에 대한 회상록이다.

의뢰자는 말한다. 그 신문은 창간되지 않을 신문이라고.

이 신문은 정계 인사들의 비리를 까발리는 신문이 될 것이고, 신문의 존재가 알려지면 그들은 불안에 떨며 자신의 주인에게 뇌물을 바치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의 주인은 그것을 이용해 상류사회로 들어가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그러니 이 신문은 발간되기도 전에 폐기될 것이고, 대중들에게는 어떤 비판과 압력에도 굴하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는 인상을 심어 줄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줄거리부터가 매우 흥미로웠다. 어디에서 이런 내용을 찾을 수 있겠는가. 흥미를 확 끌어당기면서도 앞으로의 전개를 궁금하게 만드는, 훌륭한 도입부였다.

신문이 창간되지 않는다는 것은 콜론나와 의뢰인만의 비밀. 본격적으로 신문을 위한 기자단을 꾸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모인 기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실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시메이의 주도 아래 신문에 실을 기사를 어떻게 꾸밀지 회의를 벌인다.

 

나는 이 회의에서, 이들이 결코 진실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그대로'라는 기자 정신은 여기에서 언급해봤자 시메이가 보기 좋게 퇴짜를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진실을 말하면서 진실을 숨기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사용된 비열한 방법으로 신문을 꾸미려 한다.

진지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일을 원했던 '마이어'는 이런 작태에 실망을 금치 못한다.

 

독자들은 여기서 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목적이 따로 있는 신문이라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기사 하나로 누군가를 매장하려는 일을 시메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시하고, 지시받은 자는 그것을 따른다.

글의 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펜을 잡으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작가는 우리에게 경고하는 듯했다.

글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펜을 잡은 사람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이들은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부분을 고민하지 않는다. 기자를 표명하지만 이들은 그럴 자격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읽는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읽어야 하는가?

신문과 뉴스를 읽고, 그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있는가?

나는 기자가 아니고, 실제로 기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본 적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 것이다. 우리는 '직업윤리 의식'이라는 얄팍하기 짝이 없고 구속력도 없는 그것에 절실히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쥔 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저버린다.

 

저자는 매혹적인 플롯을 가지고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나는 아직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이것은 내가 나에게 질문했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앞으로 이에 답변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보려 한다.

'가짜뉴스'가 물위로 본격적으로 떠오른 지금, 그들이 윤리의식을 저버렸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는 대답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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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 필로테라피 5
셀린 벨로크 지음, 류재화 옮김 / 자음과모음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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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초하지 말자실패하지 말자.

이런 다짐이 어떤 용기가 되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의 새로운 불만족과 끝없는 불안을 보지 못하게 가리는 것에 불과하다."


책을 열고몇 장 넘기면서 아상당히 위험한 책을 골랐구나라고 생각했다.

쇼펜하우어철학에 문외한인 사람조차 이름 정도는 들어봄직할 만큼 이름 있는 철학자이다.

나 역시 철학을 잘 알지 못해서 '쇼펜하우어'하면 고슴도치의 딜레마 정도밖에 모른다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제대로 알아보는 것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느끼길쇼펜하우어는 참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우리 삶은 얼마나 행복한가!

이것은 행복한 나날들이 불행한 나날들에 자리를 내줄 때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기쁨이 늘어나는 것에 비례해 그것을 맛보는 능력은 떨어진다.

습관이 된 기쁨은 더 이상 기쁘게 느껴지지 않는다."


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라는 제목을 보고나는 모든 자기계발서가 그렇듯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또는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서술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쇼펜하우어는 내 예상을 보기 좋게 깨뜨렸다쇼펜하우어에게 그것은 차선순위이고그는 먼저 '우리가 왜 괴로운지'를 탐구한다.

그 탐구 과정이 놀랍다쇼펜하우어는 우리가 행복해지려 애쓰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말한다우리가 행복을 손에 쥐려 해 봤자 행복을 멀리 도망간다행복은 부정적인 것에 가깝다삶은 '살고자 하는 의지'에 따른 투쟁이고거기에서 승리를 거머쥐어 봤자 그것은 잠깐에 불과하다곧 우리는 다시 투쟁 속으로 뛰어들게 되고그것이 반복되면 지치게 된다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삶의 목표는 자연성 본성에 가까운 '의지'라 불리는 것에 의해 결정되며 이성은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지를 결정하는 것뿐이다진정 행복하지고자 한다면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것을 그만두고, '살고자 하는 의지'를 버려야 한다.

읽는 내내 흥미로웠고정말 파격적이었다지금까지 윤리와 사상이나 생활과 윤리에서 배워 온 철학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철학이었다이것을 염세주의라고 하던가?

인간과 삶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본다는 이유로 싫어할 사람도 있겠지만나는 전혀 색다른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그의 철학이 마음에 들었다.

 

책을 읽는 것은 과거의 사람과 나누는 아주 좋은 대화라고 하는데나는 철학책만큼 이 말과 어울리는 책이 없다고 생각한다책을 읽는 내내 대화체가 아닌데도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옆에서 듣는 느낌이었다나는 때때로 그의 말에 맞장구치기도 하고 공감하기도 하였으며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나의 철학은 그와 다르다고 반박하기도 하였다좋은 말상대를 만났다고 악수라고 하고픈 마음이었다.


"선적인 시간으로부터 구원된 세계를 보는 것,

그 세계의 모든 것이 여러 가능성 형태로 현존하는 것,

이것이 우리를 시간의 압력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우리는 이제 '고통의 대가를 치를 만한 어떤 것'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의무로부터 벗어난다.

행해지지 않은 것빛을 보지 못한 보물들보지 못했거나 창조되지 못한 아름다움은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발현될 것이다.

이 다른 사람들이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변형일지 모른다."


이 지독한 염세주의자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연민을 제시한 것 또한 참으로 흥미롭다.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것', '자기애'로부터 주의를 돌리라는 것이다.


"자애는 자아를 포기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어떤 감정이나 욕망 따위도 포기하게 만든다.

자애는 범사랑을 만든다."


비록 염세주의의 형태를 띠었지만사실 그는 누구보다 사람을 사랑하고 있지 않을까정확히 말하자면 평화를인생을 사랑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한 번 사는 인생진하고 깊고 마음껏 투쟁하며 살다 가고 싶었다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욕망이라고 생각했기에마음껏 욕망하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고자 했다.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완벽히 반대다.

당연히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이다나는 그 고통조차 내 삶의 일부로 함께 가져가겠다고 생각했다그것이 날 더 강하게 만들 거라고.

나와 반대되는 태도로 삶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 기뻤다그것이 쇼펜하우어라서 더욱 즐거웠다한바탕 열띤 토론을 나눈 채 진심으로 상대에 대한 경외감을 담아 악수를 나눈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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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명 서정시 창비시선 426
나희덕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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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랫소리에 조금씩 벽이 열리고 문이 열리고

이젠 혼자서 밤길을 걸을 수 있어요

나는 더이상 영혼 없이 태어난 아이가 아니에요

-<슬픈 모유>

 

창비시선 426번으로 이름을 올린 나희덕 시인의 신작, 파일명 서정시이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종이감옥

2부 눈동자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3부 주름들

4부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

 

1부는 표제작 '파일명 서정시'가 수록된, 말 그대로 나희덕 시인이 창작한 서정시라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제2부는 실제 존재하는 사건, 역사 등 사회문제를 주제로 쓴 시의 모음으로, 가장 읽기 힘들면서 눈물짓게 했던 부분이었다.

3부는 '아버지''어머니'가 자주 등장하는데, 나희덕 시인이 자전시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4부는 다시 서정시로 돌아오는데, 이제 서서히 작별을 고하는 듯했다.

 

이것은 불의 노래,

노래할 때마다 등불이 하나씩 켜져요

불은 번져가고

몸이 점점 뜨거워져요

강 속으로 걸어들어가며 노래를 불러요

강물도 끓어오르기 시작해요

뜨거워요 뜨거워요 너무 뜨거워요

사랑이여, 도와줘요

비의 노래를 불러줘요 비를 불러줘요

-1부 종이감옥 <탄센의 노래>

 

1부는 아름답고 처연했다. 시를 읽는 동안 탬버린을 치며 모닥불 주변을 맨발로 돌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무질서한 말로 가득한 구덩이 속으로 끝없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시는 모두 한 사람이 쓴 것 같기도 했고 각자 다른 사람이 쓴 것 같기도 했다. 따뜻하고 냉랭했으며 두 팔로 감싸안는 것 같더니 어느새 매몰차게 내치는 것 같기도 했다. 글자를 두른 토끼에게 이끌려 시어의 오솔길을 걷고, 빙하를 넘었으며, 사막을 지났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명확히 깨달을 때도 있었으나 도무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었으며, 뜻은 모르나 마음이 이미 알아차린 시도 있었다.

시는 이렇듯 가장 제한된 언어와 형태로 가장 많은 것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교실에 갇힌 아이들이 있다

책상 밑에 의자 밑에 끼여 빠져나오지 못하는 다리와

유리창을 탕, , 두드리는 손들.

그 유리창을 깰 도끼는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가.

-2부 눈동자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난파된 교실>

 

여기가 어디지요?

죽은 줄도 모르고 지나는 사람을 붙잡고 묻습니다.

 

어디선가 날아온 나비 한마리를

잃어버린 영혼인 듯 따라갑니다, 들린 발꿈치로.

-2부 눈동자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들린 발꿈치로>

 

2부는 1부에 비해 대상도 메시지도 명확했다.

정제되고 함축적인 시어로 표현되었기에 더욱 읽기 힘들었다.

우리는 아직도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역사를 만들어내고 역사에 휩쓸리고 역사를 부수며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직접 피부로 겪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목으로 터져라 부르짖은 일이 아닌가.

내가 흘린 눈물은 그들이 흘린 눈물에 비하면 너무도 가벼웠다. 모두가 각자의 울음을 울었고 각자의 눈물을 흘렸으며 그래서 우리는 하나로 소리쳤다.

오늘은 기념비적인 날이다. 2015 한일합의 이후 10억엔으로 세워진 화해치유재단이 공식적으로 해산된 날이기 때문이다. 소녀상 발아래 그림자에 깃든 하얀 나비가 날갯짓했다.

 

이제 누구의 아내도 아닌

늙은 소녀

 

그녀의 주름 속에서 튀어오른 물고기들은 이내

익숙한 고통의 서식지로 돌아갔다

 

주름은 골짜기처럼 깊어

펼쳐들면 한 생애가 쏟아져나올 것 같았다

-3부 주름들 <주름들>

 

몇 편 읽고 어쩌면 저자의 서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작품에 작가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시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읽은 시와 말을 어떤 생애의 실로 자아내왔는지 어렴풋이 보여주는 듯했기에.

시련 없이 살아온 사람은 없다지만, 그것을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것은 달랐다.

나는 다시 한번 모든 이들의 생애에 경배를 올렸다.

 

나이-톰보-톰보, 그곳은 바닷가에 있지

거룩한 산에 다다른 영혼이 뛰어내리는 바위,

바다에 옛 노래가 울려퍼지면

그제야 죽음이 임한 걸 알게 된다지

-4부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 <나이-톰보-톰보>

 

책의 마지막 장이다. 책을 덮으면 영원히 끝날 것 같으면서도 영원히 계속될 것 같기도 했다.

독자가 가닿을 수 없는 작품 속 바다에서 계속 노를 저어 가고 있을 것 같았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 반짝이는 무언가를 향해, 끝나지 않을 항해를 시작하는 듯했다.

내용은 1부와 비슷한 서정시 같으나, 이번 장에는 '시인으로서의 저자'가 녹아 있는 것 같았다.

시인으로서 인간으로서 계속해서 고뇌하고 창작하는 그런 사람이 보였다.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고 싶다고, 그 험난한 여정에 기꺼이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시는 늘 과거의 이야기였다. 윤동주, 백석 등 과거 사람들의 시를 읽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언어는 몇 세기가 흘러도 빛바래지 않을 만큼 훌륭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사람들의 언어로 쓰인 과거의 언어였다. 그래서 시는 늘 내게 있어 추억 속의 무덤과 같았다.

이번 책을 읽고 처음으로 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시의 살아 있는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의 사람이 쓴 지금의 언어가 처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시는 과거에 주저앉아 있는 게 아니라 언제까지나 시간의 곁에서 걷고 있었음을 처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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