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오마가린 왕자 도난 사건
필립 스테드 지음, 에린 스테드 그림, 김경주 옮김, 마크 트웨인 원작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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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는 깊게 숨을 내쉬고 긴장을 풀었다그리고 마침내 한마디 말을 떠올렸다인류를 온갖 부질없는 다툼으로부터 구원해 낼 절호의 한마디를인간들이 어쩌다 한 번만이라도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조니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와서 기뻐."

 

문학사 길이 남을 위대한 작가이자딸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딸들에게 이야기를 여럿 들려주었지만그중 기록으로나마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고그나마도 절정 초입부에서 끊긴 미완성작이었다.

그리고 이 기록이 담긴 노트는 2011캘리포니아 대학의 마크 트웨인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된다.

이 걸출한 문호의 미완성작을필립 스테드와 에린 스테드가 이어나가 마침내 빛을 보게 되었다.

 

올레오마가린 왕자 도난 사건은 마크 트웨인이 딸에게 남긴 단 한 편의 동화이다아버지의 애정과 문호의 재능이 담긴 채 기록으로만 남은 이 이야기를칼데콧 상을 받은 필립 스테드가 이어나갔고에린 스테드가 삽화를 그렸다.

동화라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된다원작자가 마크 트웨인인지라 시작부터 흥미를 끌어당기며 범상치 않은 문장력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구성도 굉장히 독특한데글을 쓴 필립 스테드가 마크 트웨인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 동화의 내용과 번갈아 가며 등장하기 때문이다그래서 트웨인이 이 이야기를 완성하지 않고 사망했다는 '어른들의 사정'트웨인이 차를 마시다 어딘가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센스 있게 순화한다.

 

때로 신들은 예정에 없던 휴가를 가기도 하고잠시 본분을 망각하기도 해.

그사이 비참한 사람들의 삶은 잠깐이나마 덜 비참해지지.“

 

책의 주인공은 할아버지와 둘이서만 사는 가난한 소년 조니이다.

이 소년은 세상 무엇보다도 강한 이빨과 냉혹함을 가진 가난이라는 불행을 짊어지고 있는데거기다 할아버지조차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불행을 옆구리에 끼고 있다그런 조니의 처지를 설명하듯조니의 유일한 친구인 닭의 이름은 '전염병과 기근'이다.

 

할아버지는 전염병과 기근을 팔아 먹을 것을 사 오라며 조니를 먼 도시로 보낸다그러나 조니는 그 닭을 팔지 말고 자신에게 달라는 할머니를 만나게 되고조니는 닭을 행복하게 해 달라며 자신의 친구를 넘긴다.

모든 옛이야기가 그렇듯 이 할머니는 요정이었는데닭의 보답으로 조니에게 씨앗을 건넨다.

요정의 보은이 늘 그렇듯이 씨앗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요정의 말에 따르면이 씨에서 피어난 꽃을 먹으면 더 이상 허기를 느끼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조니는 요정의 말대로 씨앗을 잘 키워 꽃을 먹었는데꽃에 요정이 말한 그런 효능은 없었다.

대신 동물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조니는 인간 세상을 떠나 동물들의 곁으로 가게 되는데어느 날 평화로운 숲에 올레오마가린 왕자가 도난되었다는 방이 붙는다.

 

세상 사람들은 동물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아.

더 심각한 문제는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는 거고.“

 

올레오마가린 왕자 '실종 사건'이 아니라 '도난 사건'이라는 점이 어딘가 의미심장하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이 책은 타이틀답게 마냥 가볍지많은 않다.

환상적인 동화라는 껍질을 까 보면 어두운 사회라는 과즙이 흘러내리니 말이다.

(당장 주인공 조니의 처지부터 상당히 절망적이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동화 특유의 밝은 빛을 간직하고 있는 작품이다.

 

조니는 깊게 숨을 내쉬고 마음을 가라앉혔다그리고 마침내 할 말을 떠올렸다끊임없이 어리석은 폭력에 휘말리는 인간들을 구원해 낼 절호의 말을인간들이 어쩌다 한 번만이라도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조니는 말했다.

"여러분을 알게 돼서 정말 기뻐요."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나는 너무 커 버린 것은 아닐까눈높이가 너무 높아져 버린 것은 아닐까?

중요한 것들은 으레 작고아래쪽에 있는 법인데내가 너무 크고 높아져서 그것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때로는 허리를 굽혀 조니의 시선으로 상대를 보면서진심으로 말해 보고 싶어졌다.

당신을 만나서 정말 기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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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태어났으니 산다 - 열심히 살기는 귀찮지만 잘 살고는 싶은 나를 향한 위로의 한마디
해다홍 지음 / 놀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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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리는 나의 모습을 

상처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증거라며

자신을 속여왔었다.

그렇지만 한시적인 해소감의 끝엔

허무함뿐

정말 필요했던 건

상처를 스스로 돌볼 시간이었다."


네컷 만화 그림 에세이일단 태어났으니 산다이다.

 원래 독립출판물이었는데높은 인기에 힘입어 다산북스에서 새옷을 입고 재출간되었다고 한다. 

판형은 흔치 않은 정사각형 판형가로세로 딱딱 맞춰 떨어지는 네모가 엽서 같기도 하고폴라로이드 같기도 하고독특하면서도 귀엽다.


표지 커버를 벗기면 또다른 커버가 드러난다이런 반전매력좋다.

판형만큼이나 시선이 가는 게 제목이다.

 힘든 일에 부딪힐 때마다 한 번쯤 생각했던, '나 왜 살지'라는 질문에 '태어났으니까혹은 '살아있으니까우스갯소리로 답하곤 했다반은 장난이었던 그 대답을 이렇게 제목으로 달고 나올 줄은.

 '일단 태어났으니 사는 삶'을 어떻게 풀어냈을지 궁금하여 책장을 열어 보았다.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그림체.'

 그림은 동글동글단순하면서도 귀여운그러면서도 시선을 끄는 그림이다.

 (이모티콘이나 팬시로 나와도 좋을 듯한 그런 그림)

 

사는 데 문제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무기력하고 또 가끔씩은 우울한 우리를 위한 책이었다.

 읽으면서 '뭐 애써 긍정적으로 살 필요 있나우울하면 우울한 대로 사는 거지싶었다.

 저자는 강아지 '누룽지'와 둘이서만 산다귀찮아하는 것도 많고일도 잘 미루고무언가 도전할 용기는 조금 부족한그러니까 평범한 사람이다.

 이 책은 그런 평범한 사람인 저자가 살면서 느끼고 스쳐간 생각의 조각들감정의 편린을 표현한 책이다.

 아무리 무난하고 잔잔해 보이는 인생이라도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작가는 그런 인생을 살면서 조금 버거운 부피로 옆에 쪼그리고 않은 감정들을 하나하나 모아 두었다.

 

"그저 가만히 있고 싶은데 

그런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는

사실 그런 자유가 제일 갖기 어려움을

새삼 깨달아가는 요즘

열심히 살고 싶었다."

 

한 번 사는 인생 열심히 살다 가자고어차피 후회할 거라면 뭔가 해보고 후회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때는 몰랐다그게 내 힘이 아닌 나를 짓누르는 돌덩이가 될 줄은.

뭔가 '하고 있는느낌이 들지 않으면 무서울 정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잠을 이루지 못해 새벽까지 핸드폰으로 정보를 찾아보고입시를 거칠 때 달고 살던 헛구역질이 다시 도지기도 했다.

겨우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할 일을 만들어야만 안심하는 타입나는 내가 못 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어렴풋 깨달았다.

(지금도 학교생활 하면서 대외활동만 대여섯 개 뛰는 걸 보면)

내 친구가 말하길나는 지옥에 떨어져서도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라며 의견 낼 사람이라고...

다른 친구가 이번 학기 고생했으니 이번 방학은 좀 쉬라고 말했다난 내가 못 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도 안다내가 생각해도 난 참 희한한 사람이다. 

책을 읽고 참 비겁한 위안을 받았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

 

"힘내기도 참 지겹다- 

그닥 힘내기도 싫고

어쨌든 살아가야 하니까 쥐어짜내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 거추장스러워"

 

처음으로 20대가 되었을 때 주변 어른들이 다들 그렇게 말했다.

많은 걸 경험해 보고 되든 안 되든 도전해 보라고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라고.

그래서 할 수 있는 거 다 해 본 사람의 결과는 이거다.

아 휴학하고 싶다

할 수 있는 거 다 해 보랬으니까 휴학도 해도 되겠지

 

참 이상하게도전하라고 즐기라고 해 보라고 말하는 어른들은 많은데,

이제 좀 쉬라고 말하는 어른들은 한 명도 못 봤다.

힘들다고 해도 뭐가 힘드냐며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고.

(힘들다고 현수막을 써 붙이면 좀 알아줄까 잠깐 생각해 봤는데그 사람한테 내가 힘들다는 걸 납득시키기도 힘들어서 관두기로 했다)

사람이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살 수는 없다사람이 끊임없이 도전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

힘내기도 참 지겹다.

 

"타인은 순간을 함께할 뿐

나의 매 순간에 함께 있어줄 순 없어

기본 값은 홀로 있는 상태인 거야

그러니 어쨌든 외로움과 친숙해져야 한다구..."

 

이 책은 이런 책이다.

조금 모자랄 만큼 행복하고 조금 넘칠 만큼 우울한 인생에서우울에 발을 담그고 있었을 때의 이야기.

예민하고우울하고귀찮음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딱히 숨기지 않는 이야기이다.

아마 그냥 줄글로만 풀어냈으면 그리 손이 가지 않았을 텐데, 4컷 만화와 귀여운 그림이 어느 정도 중화 작용을 해 줘서 그리 무겁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무거움'의 나머지 부분은 독자 개개인의 무거움으로 채울 테니.

왜 사는지도 모르는 인생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할지 모를 때 펼쳐 들면 아마 같은 우울로 위로받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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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반양장) -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9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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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떤 부모도 미리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잖아요."

 "......."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 그건 만들어 가는 거니까요."

 

창비청소년문학상 12회 수상작, 페인트이다.

 창비청소년문학상에는 특히 남다른 관심과 큰 애정을 가지고 있다. 위저드 베이커리로 처음 창비청소년문학을 접했고, 그 이후로 수상작은 거의 다 찾아 읽었다. 대부분의 작품이 아주 만족스러웠기에 '믿고 읽는' 몇 안 되는 수상작 중 하나이다. 내 롤모델 작가님도 이 상을 받으며 등단하셨기에 내게는 더욱 특별하다. 언젠가 꼭 내가 타고 싶은 상이기도 하고.

 

이번 작품은 가까운 미래, 부모가 원하지 않는 아이를 모두 국가가 맡아 기르고, 아이들은 NC라는 시설에서 자라며 때가 되면 부모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이때 부모 면접(parent's interview)을 아이들끼리 '페인트'라는 은어로 부른다.

 제누 301은 열일곱이 되도록 부모를 선택하지 않은 청소년이다.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부모를 선택하지 않으면 홀로 시설을 떠나야 하고, NC 출신이라는 기록이 계속 남아 차별의 대상이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제누는 아직 마음에 드는 부모를 찾지 못했다.

 어른스럽고, 냉소적이고, 그러면서도 따뜻한 구석을 가진 제누의,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부모 면접이 시작된다.

 

먼저, '재미있었다.' 술술 넘어가는 소설이었고, 전개도 매끄러웠으며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입력까지 모두 갖추고 있는 책이었다. 다 읽고 나서는 좋은 작품을 읽었다는 좋은 기분이 가슴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졌다.

 가장 독특했던 점은 국가가 기르는 아이들이 모여 사는 NC 센터였다. 부모가 원치 않는 아이들이 모여 있다는 점에서 고아원을 연상하기 쉬운데, 보통 이러한 국가시설이 어두운 모습으로 그려지는 데 반해 NC 센터는 제법 밝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이들 각각의 영양 상태에 맞는 식단과, 건강 상태를 신경 쓴 운동 스케줄, 아이들의 오락을 위한 VR, 아이들이 좋은 부모를 만나게 해 주기 위해 휴일도 반납하고 일하는 헌신적인 가디언들까지. 게다가 최종 부모 선택권은 오로지 아이들에게 달려 있다. 정말 괜찮은 시설 아닌가. 이런 점에서 클리셰를 비틀었다고 생각했다.

 

이 책에서는 짧은 분량 속 다양한 부모들이 등장한다. 아이가 아닌 보조금이 목적인 부모, 누구보다도 아이에게 헌신적인 부모, 미숙하더라도 아이와 함께 미래를 만들어 가고 싶은 부모,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 등. 모든 부모의 모습이 자세히 다뤄지지는 않지만 '부모''가족'의 다양한 형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어른이라고 다 어른스러울 필요 있나요."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세상. 동화책이나 만화에서 소재로 몇 번 사용되기는 했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문학에서 다룬 작품은 처음이지 싶다.

모든 사람은 부모를 선택하지 못한 채 태어나고, 우리는 서로를 모른 채 가족이 된다. 내게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면 겁나면서도 설레고 신기할 것 같다.

읽으면서 가족과, 부모와, 아이의 관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큰 소리로 싸우기도 하고, 혼자 눈물을 훔칠 만큼 서로 상처받기도 하고, 그럼에도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있는, 그 더없이 미숙하고 처연한 관계를.

부모를 선택할 수 있듯 없든, 모든 고난을 함께 넘을 수 있는 관계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언젠가 반드시 맞이해야 하는 이별의 때에 후회가 없었으면 좋겠다.

 

흔치 않은 소재에, 그 소재를 잘 살렸으며 독자를 마지막 장까지 이끄는 힘이 있는 작품이었다. 읽으면서 이 작품이 좀 더 길었으면 했다. 제누의 이야기를 좀 더 길게, 깊게 지켜보고 싶었다.

홍보 문구는 '완득이, 아몬드에 이은 또 하나의 결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들의 명성을 충분히 이을 만한 작품이며, 창비청소년문학은 이렇게 또 하나의 대표할 만한 작품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세상에 나가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지레 겁먹을 필요가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다양한 경험을 해 보고 싶다. 그 속에서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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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와 거짓말 : 금기 속에 욕망이 갇힌 여자들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이현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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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은 우리가 살 자리를 내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그 여자들은 자신이 가져야 할 것을 스스로 보고 가져가고비록 호된 값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를 향한 목마름을 거듭 확인하는 사람들이다."

 

모로코 사회의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그리고 보수성을 고발하는 레일라 슬리마니의 섹스와 거짓말 금기 속에 욕망이 갇힌 여자들이다.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다들 그것을 억압이라 부르는데 그들은 그것을 신성과 보호라고 불렀다이 책은 그 거대한 사회 속에서 각자의 싸움을 치르고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저자 레일라 슬리마니는 소설 그녀아델의 저자이다모로코 라바트에서 출생하여 프랑스로 이주했고프랑스 정치대학을 졸업했다모로코 사회와 프랑스 사회 모두 충분히 겪어 본 그녀는이번에는 모로코 여성들의 앞으로 마이크를 돌려준다.

 대한민국 역시 성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직 보수적이다그러나 간통죄가 폐지되는 데 이어 최근에는 청소년 전용 콘돔 자판기가 생기고성교육 시간에 콘돔 사용법을 교육하며이윽고 낙태죄까지 폐지하는 데까지 왔다여성들의 처녀성에 대한 신성화 역시 갈수록 그 빛을 바래고 있다느리지만 우리는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슬람교가 지배하는 모로코 사회는 아직 그렇지 않다모로코에는 아직 간통죄는 물론이며 낙태죄도 존재한다모로코 사회는 여전히 여성들에게 혼전순결과 처녀성을 요구한다심지어 신랑 측은 결혼할 때 신부 측에 '순결 증명서'를 요구할 수 있다.

 (세상에순결 증명서라니!)

 한 커플이 키스하는 사진을 SNS에 게시한 것만으로도 경찰이 출동하고동성애자는 이 사회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세계5위의 포르노그래피 소비국은 모로코는 신성과 보호라는 명목 하에 젊은이들에게 모든 성의 자유를 원천 차단한다.

 

"성적 권리는 없어도 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하찮은 부속품과 같은 권리가 아니다성적 권리를 실행하고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고 위험 없이기쁨의 원천인 채로모든 강제로부터 자유로운 성생활을 누리는 것그것은 모두에게 보장되어야 할절대로 양도해서는 안 되는 근본적인 요구이자 권리인 것이다."

 

순결을 잃은 여성은 그때부터 가치 없는 인간으로 평가되기 때문에여성들은 어떻게든 혼전순결을 유지하려 애쓰며순결을 지키기 위해 항문성교를 선택할 정도이다처녀막 재생 수술은 당연하다는 듯 존재한다.

또한남자들은 결혼할 여자는 당연히 순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며그런 여성과 결혼하기를 원한다.

 순결그 얼마나 허황된 가치인가.

 게다가 이것은 유구하게도 여성에게 특히 강조되는 덕목이다남자에게도 순결이 요구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어느 누구에게도 순결을 신성화하여 몸에 대한 자유를 빼앗고억압할 수 없는 사회가 되기를 원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자신이 갖는 것자기 자신이 온전한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지는 것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인간의 기본권이다여성에게는 오랫동안 이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고이제 점차 자신의 손으로 찾아가는 중이다.

 

"순결 숭배는 폭력이에요사람들은 여성을 보석처럼 취급하는 척하면서 극도로 어색한 제단 위에 올려놓죠악의에 찬 남성들의 시선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구실로요."

 

이처럼 성적 자유에 극도로 보수적이며 억압하는 사회는 여성에게 특히 지옥이지만여성에게만 살기 힘든 사회도 아니다성욕은 인간의 당연한 본능인데도이 사회 속 모든 사람들은 그런 본능을 올바르게 해소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부부 사이가 아닌 젊은이들은 성교를 하기 위해 호텔이나 모텔을 찾을 수 없다자동차숲 속화장실 등이 그들이 찾는 곳이다자칫 들킨다면 경찰이 출동한다.

 

물론 지금 다룬 사례와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사례는 모로코 사회의 이야기이지우리 사회의 이야기가 아니다그러나 동시에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은 어느 한 국가에 국한된 것이 아닌 전세계적으로 나타났다시간이 흐르고우리는 변화해야 할 때가 왔다.

그리고 상술했듯 기쁘게도우리 사회는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앞으로 더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한국과 모로코를 포함한 전 세계의 국가가 바람직한 변화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고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다.

 성적 욕망은 단순히 묻어두고억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각자의 몸에 대한 결정권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더 이상 나는 여성을 보석이나 사탕에 비유하면서 음탕한 시선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꼭꼭 싸매야 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여성을 가두거나 감옥에 넣으면서 언제나 그게 여성을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말하죠여성은 충동이요유혹이다여성은 오라 즉 부정의 대상입니다사람들은 여성의 귀가 시간에 대해 설전을 벌이고여성의 신체나 옷차림을 두고 흥분합니다그런데 코란은 여성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어요이슬람교에서 여성의 존재는 무엇보다 탁월한 감각과 지식그리고 이성을 겸비한 자유로운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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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중록 1 아르테 오리지널 1
처처칭한 지음, 서미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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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감히 밝혀내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는 것은 감히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닌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라 생각합니다."

 

처처칭한 작가의 중국 웹소설잠중록』 1권이다.

 중국 소설 자체를 많이 접해보지 못했는데중국 웹소설이라 하니 더더욱 새롭게 느껴졌다과연 어떤 느낌일까기대하며 책장을 펼쳤다.

 

잠중록은 미스터리 사극 로맨스라는 여러 개의 장르가 합쳐져 있는 책이다각각의 장르는 흔하다 할 수 있지만 이 장르를 모두 합치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인데덕분에 정말 즐겁게 읽을 수 있던 책이었다.

 '잠중록(簪中?)'은 비녀 잠가운데 중기록할 록 자로비녀의 기록이라는 의미이다무언가 생각할 일이 있으면 비녀를 뽑아서 보이지 않는 낙서를 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여주인공의 습관에서 지은 제목인 듯하다.

 

"항상 비녀를 여러 개 꽃았던 터라 뭔가를 끼적이고 싶을 땐 그중 하나를 뽑아 쓰던 습관이 있었습니다지금은 소환관 차림이라 비녀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열일곱 소녀 황재하는 무척 영민하여 어릴 때부터 여러 사건을 해결하며 이름을 떨쳤는데어느 날 가족을 모두 독살했다는 누명을 쓰고 하루아침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그러한 신세에서 벗어나고자 붙잡은 동아줄은 왕제들 중 가장 빼어나다는 기왕 이서백장안의 불가사의한 사건을 해결할 테니 자신의 누명을 벗겨달라는 거래를 수락한 이서백은 황재하를 소환관 양숭고로 위장시켜 자신의 곁에 두게 된다.

잠중록은 총 4권이고 아직은 고작 1권이기에두 남녀 주인공 사이에 특별한 애정선이 보이지는 않는다그래서 황재하와 이서백은 아직까지는 동료 관계로 보이는데이 두 사람의 케미가 제법 좋다바깥에서 묵으며 집의 안주인을 속이고자 동성애자인 척하기도 하고이서백이 그 고고한 얼굴로 황재하를 놀려먹기도 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 함께 있으면서 서로를 달리 볼 때마다 미묘한 감정을 느끼곤 하는데그때의 묘사가 무척 아름답다.

 

흔들리는 등불 아래서 이서백을 쳐다보는 두 눈동자는 매우 맑고 투명해 마치 새벽녘 연꽃잎에 맺힌 영롱한 이슬 같았다요동치는 마차 안에서 속눈썹이 간간이 떨릴 때마다그 맑은 눈동자가 마치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연꽃처럼 순간적으로 부드럽고 찬란하게 빛났다.

 

사극 소설이어서일까감각적 이미지를 묘사할 때마다 사용되는 비유가 우아하고 아름다워서사극의 느낌을 물씬 풍긴다이런 대목을 읽을 때마다 중국풍 사극의 느낌에 흠뻑 젖어서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못했다.

저자의 필명 '처처칭한'은 당나라 시인인 한악의 시 한식야의 첫 구절로 '스산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이처럼 한시를 가까이 한 작가인 만큼 표현력도 매우 섬세하다.

 

로맨스 장르에서는 남녀 주인공의 캐릭터성도 매우 중요하다나는 둘 중 황재하가 특히 마음에 들었는데하루아침에 가족을 잃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어도 결코 꺾이지 않는 의지도 좋았지만뛰어난 지성에 기반한 현실적인 성격이라는 것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황재하너 역시 나처럼 운명을 믿지 않는구나." 

"지난 몇 년 동안 촉에 있으면서 스물여섯 건의 사건을 다루었는데 그중 여덟 건은 귀신이 짓이라는 소문이 있었습니다하지만 결국 모두 사람이 귀신의 짓으로 꾸몄을 뿐이었습니다."

 

초자연적 현상을 믿지 않는 나로서 이토록 마음에 차는 주인공은 없을 것이다그리고 수동적이지 않다남장을 한 채 혈혈단신으로 도망나와 왕제의 마차에 숨어들어 그를 설득할 만큼황재하는 소환관이 되어서도 모든 일에 자신이 직접 나선다직접 발로 뛰어서 조사를 나가고물 속에 들어가기도 하고시체를 만지기도 한다이런 적극적인 면이 정말 좋았다.

1권이고아직 주인공들 사이에 애정 기류가 없는 만큼 1권은 로맨스보다는 미스터리 장르에 좀 더 가깝다황재하가 처음으로 해결하는 사건도 살인사건이고이후 암투에 휘말리면서 더 많은 시신을 보게 된다미스터리 장르에 소홀하지 않았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시신을 검사하여 추론을 진행하는 장면도 있을 만큼 작가가 많은 공을 들였음이 엿보였다.

미스터리로서의 면모가 강한 만큼 내용 언급에 상당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사건의 범인악역도 정말 매력적인 인물이었다사건의 원흉인 만큼 그 행동이 정당화되지는 않겠지만정말 너무도 매력적인 인물이어서소설 속 인물들뿐 아니라 독자인 나조차도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잠중록은 내가 읽은 첫 중국 웹소설이다만화가가 꿈이었던 저자가 처음에는 만화로 냈다가이후 13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소설로 내놓은 작품이라고 한다.

특별히 작품성이 떨어지지도 않았고사극 분위기에도 실컷 젖을 수 있었으며남녀 주인공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캐릭터성도 모두 좋았다끝까지 주인공들의 길을 지켜보고 싶다는그런 기분이 드는 소설이었다.

 

"전 그저 모든 이의 마음속에 공정하고 바른 길이 있다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죽은 자가 예인이든 걸인이든범인이 제왕이든 장상이든 그저 조사를 통해 밝혀진 진실을 말하여 저 스스로 마음이 떳떳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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