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삶의 의미를 강렬하게 얻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가 고통을 감수하는 모습을 보며 알 수 있다. 순교를 감수하는 신자들, 가혹 행위를 견디는 혁명가들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지닌 의미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우리는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지불하려는 돈으로 사람들이 의미에 부여하는 평균적인 금액 가치를 간접측정할 수 있다. 돈으로고통을 어림 계산하고, 고통으로 의미를 가늠하는 것이다.
그 외에는 문학적 창조뿐이다.
이 창조적 서술은 너무나 주관적이고 쓰기 편한 만능 도구여서 거의기만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 한사람이 처한 모든 상황을 억압적이고 살인적인 것으로 묘사할 수 있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행위에조차 그것이생존 투쟁이어서 결과적으로 승리라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우리는아무나 생존자라고, 승리자라고 추켜세울 수 있다.

<데미안》과 헤세의 유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우상의 자리에 있는 것은 아브락사스가 아니라 ‘진정성‘이라는 신화다. 일상이공허하다고 느낀 현대인들은 ‘진정한 것‘을 찾아 헤맨다.
인간이 자신이 좇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면서 ‘추구‘ 일상의 배후에 진정한 세계가있으며, 껍질을 깨고 그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정작 예수,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같은 이들은 일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일상과 분리된 깨달음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1990년대 들어 젊은이들 사이에서 세력을 얻은 반문화, 저항문화, 주변부 문화, 힙스터 문화, 서브컬처는 그런 메아리의 메아리다. 저항운동의 문화적 요소들이 한 세대 뒤 청년들에게 쿨하고 힙하게 받아들여진 것은 ‘무언가에 저항하고 있다. 그것은 의미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현대사회와 삶에 대한 인식의 근본이 되는, 다시 말해 현대를 창조하거나 발명했다고 부를 수 있는 거대 사상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고대 그리스식이 아닌 미국식) 민주주의, 자본주의, 마르크스주의, 진화론.
근대에 등장한 이 아이디어들은 전복적이고 파괴적이었다. 그때까지 사람들이 사회와 삶에 대해 품고 있던 인식을 산산이 부수고 완전히바꿔놓았다. 이 사상들이 얽혀서 현대성이라는 성질이 만들어졌으며그것은 현대인에게 거의 본능에 필적하는 일종의 운영 체제가 되었다.
이들 네 사상은 사람처럼 분노하고 용서하는 인간적인 신의 자리를허용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사에 세세히 간여하는 창조신이 없는 만큼 인간의 자유는 더 늘어난다. 윤리는 그만큼 개인의 몫이되며, 도스토옙스키는 그러한 함의를 두려워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성공과 실패를 당사자들이책임져야 할 문제로 본다. 사회 차원에서도, 개인 차원에서도 그렇다.그래서 이 두 사상은 합리적인 개인을 전제로 한다. 자신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잘 아는.
유권자들이 각자 자신에게 최선이 무엇인지 생각해서 그에 따라 두표를 하면 된다. 신의 명령 따위는 없다.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건도없다. 한사회의 민주주의가 실패한다면 시민의 역량이 부족해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도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차원의 도덕은있다. 하지만 그것이 개인에게 필요한 규범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도덕은 최소한이다. 그 이상에대해서는, 당신들은 자유롭고 합리적이니 각자 알아서 찾으라는 게 두사상의 기조다.
좋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두 사상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타인의 생존 조건과 행복추구, 경제적 자유 추구를 방해하지 말라는 정도다.
그런 세계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사적인 삶을 뛰어넘는 의미나 가치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거기서 인생의 목적을 묻게 되며, 점점 더실존을 둘러싼 심오한 불만에 잠긴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진화론과 달리 마르크스주의는 변화의 최종 단계가 있다고 가정한다. 공산혁명 이후에는 모든 갈등이 사라지고 노동자들의 세상이 온다고 한다.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에서 역사에는 방향성이 있으며, 진보는 생생한 개념이 된다. 모든 사건은 통합된 거대 서사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는다.
개인 역시 마찬가지다. 한사람은 역사의 흐름에 뛰어들어 거대 서사와 통합된 삶을 살 수 있다. 그는 혁명가가 될 수 있다. 그것은 희망이며일종의 개인적 구원이다. 그는 반동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영적인 파국을 의미한다. 그는 내세를 겪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세의 비전은볼 수 있다.

역사의 발전 : 신의 섭리와 비슷하다.
노동자들의 낙원: 천국과 비슷하다.

이 사상은 신봉자에게 사적인 쾌락, 효용 행복을 초월할 기회를 약속한다. 개인에게 목적과 방향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그렇게 한동안 현대의 신령으로서, 종교로서 기능했다. 샤먼과 순교자들만 누릴 수 있었던 환희와 전율, 고양감을 현대지식인들이 조금 맛볼 수 있게 했다.
정치 원리로서도, 경제 이론으로서도 수명이 다한 뒤에도 이 사상이여전히 문화 이론으로서 우리 문명 한구석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그 매력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다른 현대 사상들은 사회의 도덕적기초와 개인의 삶의 의미 사이 간극을 메우지 못하고 있다.

신계몽주의는 개인에게 보다 길고 뚜렷한 도덕규범을 제시한다. 그규범은 과거에 종교가 주던 영적인 충족감을 얼마간 제공한다. 아마도그 규범은 어느 선을 넘으면 합격하는 식이 아니라 무언가를 끝없이 수련해나가야 하는 형태일 것이다. 신계몽주의의 도덕규범은 충분히 선량한사람에게도 더 높은 의미와 가치를, 그 방향을 보여준다.

그중 하나는 신계몽주의 세계관에서 자란 사람은 비극을 이해하게될지 모른다는 전망이다.
계몽주의 세계관에서 자란 현대인은 비극을 이해하지 못한다. 비극에 대해서는 고대인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뛰어난 전문가였다. 그들은비극을 그 자체로 받아들였다. 슬픔은 기쁨과 마찬가지로 삶과 세계의중요한 구성 요소였고, 해석이 필요하지 않았다.

신계몽주의는 명예와 모멸감에 대해서도 계몽주의와 다른 접근법을택하고, 새로운 설명을 내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계몽주의는 생명과 자유, 행복에 대한 추구를 얼버무려 인간의 존엄이라는 개념을 구성한다. 그것들이 침해될 수 없는 가치라고, 욕구가아닌 권리라고 한다. 의미에 대한 추구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렇기에계몽주의는 명예와 업적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사람이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인정투쟁은 유치한 일로, 부끄러운 행위로 여겨진다.
하지만 다섯 살 아이부터 여든 살 노인까지, 인정투쟁에서 자유로운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인간의 깊은 본성이다. 신계몽주의는 의미를 중시하며, 의미를 향한 열망, 더 큰 이야기에 포함되고자 하는 욕망을 자연권에 포함할 가능성이 높다. 김상은 얼굴에쓰고신계몽주의의 인권 규범과 형사사법시스템은 의미의 훼손을 중죄로간주할지 모른다. 인격권 같은 임기응변 없이 신계몽주의는 전근대인들이 명예라고 불렀던 가치에 대해 보다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설명을 제시할 수 있을지 모른다.

더 큰 전쟁 피해를 막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해도 괜찮은가? 엄청난인명 피해를 일으킬 폭탄 테러를 막기 위해 용의자를 고문해도 좋은가? 한정된 복지 예산을 어떻게 편성하고 어떤 순서로 집행할 것인가?
모두 트롤리 딜레마다.

그런 면에서 트롤리 딜레마가 계몽주의 윤리의 빈틈을 폭로한말할 수도 있다. 

나는 언덕 아래 멀리서 제동장치가 고장난 트롤리가 돌진해오고, 그앞에 놓인 선로에 다섯 사람이 묶여 있으며, 옆에 있는 뚱뚱한 남자를밀어서 트롤리를 멈춰 세울 수 있을 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뚱뚱한 남자가 내 옆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트롤리-선로 묶인 사람들‘이라는 시스템은 내게 멀리 떨어져 있어서다.
나는 도덕적 책임에 원근법을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구의 표면적이 반지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3차원 공간의 특성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우주의 깊은 본성이다. 빛의 강도, 중력이나 전자기력뿐 아니라 다른 힘과 에너지도 매질이 균질한 3차원 공간에서 퍼질 때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강도가 약해진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법칙은 물리 세계뿐 아니라 인지 세계에서도 거의 흡사하게 적용되는 듯하다. 어떤 사건이 사람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의 강도는사건과 사람 사이의 인지적 거리에 반비례한다.

연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에서 자란 사람만이 동물원에서 우리 안에 갇힌 육식동물을 보며 가슴 아파하고 가엾게 여긴다. 야생에서늑대를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은 창살에 대해 감상을 품지 않는다. 연지혜는 판사들이 우리에 갇히지 않은 범죄자를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처하지
‘사람은 먼 곳의 상황을 잘 알 수 없다‘는 인식은 자치와 지역공동체의 중요성으로 이어진다. 근대 이후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국가와 가정 사이에 있는 많은 중간 규모 공동체들이 무너졌다. 상당 부분계몽주의 윤리의 허점 탓이라고 본다. 신계몽주의 사회에서는 크고 작은 지역공동체들의 자치권이 훨씬 더 중요하게 논의된다.

다른 이유 하나는 미디어에 의한 왜곡이다.
우리의 공감 능력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들었느냐에 좌우된다. 우리는 자주 보고 들은 대상이 우리 곁에 있다고 여긴다.
이는 미디어 기술이 발전하기 이전 전근대에서는 이치에 맞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원거리 통신 기술이 발달하면서 우리의 정신은 거대한가상현실을 만들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남수단의 수도 주바까지의 거리는 1만 킬로미터 남짓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에게는 1만 10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뉴욕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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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여파는 보다 크고 심오하다. 행복이라는 개념이 극히 모호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은 듯한 느낌에 빠지게 되었다. 행복을추구하라고 하는데 정확히 무엇을 좇아야 하는지 알수 없는 것이다. 행복을 고통의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보는 일반적인 해석 때문에 이런 혼란은 더 커진다.
예를 들어 성취감은 대개 행복으로 분류하지만, 이 감정을 느끼려면괴로운 인내 과정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이들은 노력 없이 즉각적으로 얻을 수 있는 다른 쾌락과 이런 기쁨을 구별하기 위해 ‘진정한 행복‘이라는 수사를 동원한다. 그 순간 행복은 위계가 있고 단기 평가와 장기 평가가 달라지는 복잡한 개념이 되어버린다.
낭만적인 이들은 그런 구분에 반발하며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들 역시 시간의 흐름과 관련된 특성을 무시하면서 행복의 많은 부분을 놓치기는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오락가락할수밖에 없다.
노력파와 순간 양쪽 모두 실패한 열정이나 보답받지 못하는 짝사랑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을때, 우리는 그 도전이 존중할 만한 일이라고 느끼면서도 그것을 행복이라고 선뜻 부르기는 주저한다.

계몽주의 사회의 정책 입안자들은 숫제 고통이 따르는 장기적 행복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런 가치는 평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신 효용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는 결국쾌락을 가리키는 말이다.

계몽주의 사회에서 국가, 기업, 대학의 목표: 더 많은 효용.

계몽주의 사회에서 어느 정도 규모에 이른 집단은 모두 이 방법론을사용하며, 그 결과 공동체들은 점점 더 납작해진다. 경제적 효용 이외의가치를 집단적으로 추구하자고 제안하는사람은 몽상가 취급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 욕구는 인간 본성 깊숙한 곳에 남아 있다. 수치를 당하느니 죽음을 택하는 사람도 여전히 있다.

세계에는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7억 명이 넘는다. 보통 사람이라도 구호단체를 통해 그들에게 돈을 보내는 방법은 아주 쉽다. 그러므로 내가 당장 필요하지 않은 최신형 스마트폰을 살 때, 나는명백히 선택을 하는 것이다. 사하라사막 남쪽에 사는 사람들 수백 명의끼니보다 과시성 소비로 인한 나의 만족감이 더 중요하다는향이 좋은 프리미엄 커피를 마실 때, 플라스틱 가구 대신 원목 가구를살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택시를 타거나 자동차를 운전할 때,
집에 있지 않고 여행을 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절대빈곤 상태에 있는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죽게 내버려두자고 선택한다. 우리는모두 학살자이다.

이것은 계몽사상이 개인이 추구해야 할 도덕적 가치의 우선순위에대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계몽사상은 좋은 개인이 아니라 좋은 사회에 대한 것이다. 계몽사상의 창시자들은 절대왕정의 횡포에 치를 떨었으므로, 국가권력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게 하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
계몽사상은 그런 사회에서 개인이 어떻게 해야 좋은 삶을 살 수 있는지, 어떤 목표를 다른 일에 앞서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다. 시민의 의무를 다한 뒤에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행복을 추구하라는 정도다.
다시 말해 각자 알아서 하라고 한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정의의 시스템도 교화의 시스템도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리라.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은 형사와 교도관과 죄수이며, 그들은 자신들이 행사할 수 있는 힘과 얻을 수있는 이익을 판단해 행동할 뿐이라는 정의나 교화는 그 앞에 붙은 흐릿한 간판일 뿐이라는

도덕적 가치의 우선순위는, 한 사람이 그걸 추구하느라 얼마나 고생하는지와는 관련이 없어야 한다.
앞서 나는 의미와 고통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적었다. 하지만세상에는 의미 없는 고통도, 고통 없는 의미도 있다. 내가 고통을 느낀다고 반드시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의미의 크기가 고통의 크기에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불행히도 인간의 본능 - 우리가 ‘도덕적 직관‘이라고 부르는 것 -은 이런 분명한 사실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들의 고통이 클수록 값진 희생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귀여운 북극곰들을 살리기 위해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종이컵이 아니라 해외여행을 막아야 한다. 관광목적의 출국은 5년에 1회 정도로 제한해야 한다. 유명 해외 관광지의 사진을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람들을 비난해야 한다.
그러나 탄소 줄이기 캠페인은 종이컵 쪽에 더 초점을 맞춘다. 해외여행보다는 종이컵이 종교적 금지 대상에 좀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종이컵 쪽이 보다 일상적이고, 현시적(示的)이며, 고통스럽다(보통 사람들은 해외여행을 그리 자주 가지 않으며, 해외여행을 가지 않는 상태는 티가 나지 않지만 텀블러는 눈에 잘 띈다).
채식주의도 비슷하다. 육식이라는 유혹을 참는 일은 일상적이고, 현시적이며, 고통스럽다. 그리고 자주 논리적 모순에 부딪힌다. 동물 복지를 위해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고양이를 키워도 될까? 고양이는동물성 단백질을 먹어야 하고, 고양이 사료는 닭이나 연어로 만든다.
그러나 많은 채식주의자들은 그런 복잡성을 탐구하기보다는 거기에서 눈을 돌린다. 상당수는 희생의 결과보다는 희생이 그들에게 주는 도덕적 충족감을 추구하는 듯 보인다. 어떤 이들은 타협과 확장을 거부하고 고행의 순수함에 집착한다. 이는 정확히 종교인의 태도와 일치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귀여운 것에 쉽게 공감하지만 추상적인 통계에는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요구에 결코 다 응할 수 없다. 어떤 요구에 먼저 응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적 환경이 된다. 거대한 ‘공감 노동‘과 도덕적 피로감, 죄의식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몇몇 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의제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모두 공범으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내 안의 스타브로긴은 부정적이다. 스타브로긴은 그보다는 우리가서구의 1960년대와 같은 시기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1960년대에도 하나의 비전으로 모일 듯 말 듯한 커다란 에너지는 있었다. 그러나기득권에 대한 막연한 불신과 세부 사항이 없는 낭만적인 이상주의는끝내 일관되고 구체적인 사상 체계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 에너지는 저항문화, 반전운동, 히피즘, 성 혁명, 로큰롤, 마약 등에 뿔뿔이 흩어졌다.
그것은 방향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였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살롱에서 논쟁을 벌이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1960년대 서구젊은이들은 우드스톡에서 자아에 도취됐다.
서구의 1960년대는 사상을 낳지 못한 대신 문화적 유산이 되었다. 그유산에는 페미니즘과 소수자 운동처럼 긍정적인 것도 있고 가정의 해체와 허무주의, 마약 확산처럼 부정적인 것도 있다.
내 안의 스타브로긴은 금기로 가득한 시대가 올지 모른다고 냉소적으로 내다본다. ‘감수성 운동‘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을 중요시한다. 인간은 비윤리적인 행위로도 고통받지만 무례함으로도 상처를 받는다.

새로운 도덕법칙은 개인윤리에서 사회의 구성 원리로 매끄럽게 이어져야 한다. 폭력을 줄이고 사회를 안정시켜야 한다. 개인의 선택과자유를 존중하는 계몽사상을 잇고, 고대 철학자들이 중시했던 공공선의 추구도 되살려야 한다. 그러나 번영과 성장이 사회 목표는 아닐 것이다. 어떤 폭력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 역시 공상적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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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자세다. 인생에는 노상강도를 당할 가능성, 교통사고를당할 가능성, 벼락을 맞을 가능성, 뇌졸중이나 혈액암에 걸릴 가능성,
슈퍼박테리아에 감염될 가능성이 늘 있다.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피하려 하면서도 결국 없애지 못하며, 어느 수준에서 감수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생존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기쁨과 감동을 모두 희생하는 나날을 과연 ‘삶‘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삶을 산다는 것은 곧 삶에 맞선다는것이며,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의 마지막 몇 방울을 어디까지 마시고 어디서부터 포기할지 내가 정한다는 것이다.

문득 연지혜는 정철희가 경찰 조직을 상대로 신뢰라는 포인트를 적립해뒀다가 자기가 하고 싶지만 가능성이 낮은 이 수사를 위해 그 포인트를 사용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들었다. 경찰 조직이라는 시스템을 잘 이해하고 자기 스스로를 철저히 통제하는 사람만
이 그런 기술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니체가 내세운 답들은 많은 독자의 가슴을 건드렸으나 극도로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생의 철학, 힘에의 의지, 초인, 영원회귀………. 어지럽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끝내 모르겠다. 묘한 향을 풍기며 잠시사람을 들뜨게 했다가 짙은 숙취를 남기는 독한 술과 같은 단어들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카뮈의 지침은 니체의 말보다는 이해하기 쉽다. 상당히 논리적으로도 들린다. 신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는 현대 과학의 발견들과 충돌하지않고,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윤리적인 삶의 근거를 제시하는 듯하다.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필요한 현대 무신론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답안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편안한 도착지에 이르지만 그 여정에서 지성을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거기에 비극적 감흥이라는 선물까지 안겨준다.

카뮈에 대한 나의 감상은 1945년 가을 파리에서, 마치 록 콘서트처럼 청이 몰렸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강연을 듣고 난 미셸 투르니에의 반응과다: 뭐야, 결국 케케묵은 휴머니즘 얘기였어?

오늘날 우리는 아기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DNA에 새겨진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본능은 우리가 믿는 것만큼 강하지않다. 실은 강력하고 반복적인 사회화의 결과인 측면이 더 크다. 곤충에 대한 혐오감과 비슷하다.
역사적으로 모든 문화권에서 영아살해가 만연했다. 

18세기까지도 아이를 잘 죽인다는 소문이 난 유모를 찾는 어머니들이있었다.
이런 문화가 사라지고 영아살해가 최악의 범죄 취급을 받게 된 것은계몽주의가 퍼진 다음부터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인간이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고,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며, 이권리들은 정부보다 앞선다고 규정한다. 이 규범은 일단 태어난 인간 모두에게 적용된다.
한번 태어난 인간은 생명을 보호받고 자유와 행복 추구에 있어서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거의 도덕적 직관이 되었다. 사람들은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줄 아는 성체 침팬지들이 고문과같은 동물실험을 당하는 데 대해 그저 불편함을 느끼는 정도다. 그러나가만히 놔두면 분명히 죽을 아직 의식 없는 상태인 미숙아는 무슨 수를쓰더라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명의 존엄함을 이유로 싱어를 비판하는 것은 제대로 된 반박이 아니다. 우생학과 가스실 운운하는 공격도 마찬가지다. 싱어는 미국 독립선언문이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그어놓은 금을 자의식과 무의식 사이로 옮기자고 제안하는 것뿐이다.
나는 다른 이유로 싱어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주장이얄팍하다고 본다.
싱어의 윤리는 단순하다 쾌락을 늘리고 고통을 줄이자.
그는 고통에 비극적 의미가 있을 수 있음을 모른다. 싱어뿐 아니라 모든 공리주의자들이 그 점을 모른다.
어떤 의미는 고통 속에서, 고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인간은 우주와 자신을 서사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사가 없는 상태를 상상하지 못한다.
좋은 서사를 만드는 것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시련과 역경이다. 그래서 지옥에 대한 상상은 늘 상세하고 매혹적인 반면 천국의 묘사는 따분하고 뜬구름 잡는 것처럼 들린다.
좋은 인간을 완성하는 것은 고난이다. 좋은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사상가와 작가들이 그린 유토피아에 대해 들으며 우리는 도리어 섬뜩함을느낀다. 그런 곳은 좋은 사회일 수 없다고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것이다.
싱어가 추구하는 이상향은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보여준 끔찍한 비전과 다르지 않다. 

삶의 목표로서 명예라는 가치가 지워지고 그 자리에 행복이 들어서면서 생긴 첫 번째 현상은, 일상적인 모욕 문화다. 론 E. 하워드가 썼듯이, 문명인은 야만인보다 무례한 말을 더 쉽게 한다. 그런다고 머리통이 박살날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상대의 결투 신청을 겁내지 않아도 된다. 조롱과 모욕에 대한 공적 처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약하다. 표현의 자유를 위축할수 있다는 이유로 부당한 공격도 제재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이 모욕을 당했을 때 이것을 법정으로 가져가기보다는 다른 말로 받아치는 것이 권장되는데, 이로 인해 조롱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 이것이 우리가 모멸과 굴욕이 가득한 사회에서 살게된 한가지 이유다.
인간은 천사와 짐승 사이의 존재다. 우리는 고상한 태도와 저열한 언행 양쪽 모두에 자연스럽게 끌린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후자를 엄청나게 북돋우는 반면 전자를 장려하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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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정의의 편"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앞서 살펴본 여러 사례들이 시사하는 것처럼 법과 제도가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아무렇게나 법치the rule of law를 들먹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현실이 다소 불편하다. 그들에게 법치란 무엇일까? 물론 법치의 개념적기원은 18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갈 정도로 오래되었지만, 법치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 우리가 동의한 것은 아니다. 법치 개념에 대한 학문적 논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앞으로도 법치의 의미는 계속 재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저 법에 따른 통치 시스템이 존재한다는것과 그 법이 정의로운가 아닌가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현존하는 법이 정의롭다고 가정하더라도 법의 집행 과정 전반에 걸쳐 모든 이들이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는 보장은 없다. 제도의 힘을 대리하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선택적 보호를 한다는 뜻이 아니다(물론 그런 경우도 존재한다). 법의 제정부터 실행에 이르기까지 우리도 모르게 사회문화적 편견을 작동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취약계층일수록 공정한 법 집행의 테두리 바깥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 법안을 만들거나 이를 실행하는 이들이 기득권 바깥의 삶을 한번도 접해본적이 없을 때 더욱 그렇다. 따라서 법이 추구하는 정의와 윤리의 실현을 위해서는 우리의 견제와 참여가 필수적이다. 페미니스트 법학feministjurisprudence의 창시자들 중 한명으로 일컬어지는 앤 스케일스Ann Scales는법치 개념 자체를 문제화하면서, 단순히 법칙 그 자체가 옳은 것이 아니며 공정 fairness은 오직 윤리적일 때만 공정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는 ‘개인별‘ 사정에 맞춘 ‘공정한‘ 법 집행이 가능하다고주장하지만, 그들의 믿음과 달리 현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개인은 사회적 편견 및 고정관념과 연결된 어떤 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에 따라 차별적 대우를 받는다. 물론 법과 제도는 공평무사해야 옳겠지만 실제로는오래된 인식론적 한계, 더 정확히 말하면 기득권의 인식론적 한계를 그대로 담고 있어 이를 적극적으로 바꾸어나가야만 한다. 이를 인식론적부정의 pistemic injustice라고 한다. 즉 법과 제도 역시 한 시대의 편견과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뜻이다. 교차성 개념의 학문적 창시자인 킴벌리 크렌쇼 Kimberle Crenshaw 역시 법학자인데, 그가 교차성 개념을발전시키게 된 직접적인 계기도 미국 법원이 흑인 여성들이 겪는 차별을 아예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인식론적으로 기울어진 장 안에서 사고하게 되면 실재하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법이 내가 처한 현실을 보지 못할 때, 법과 제도가 우리를 보호하지않을 때, 우리가 살고 싶은 세계를 우리 스스로 구현하려는 운동이 바로변혁정의 Gansformative justice 운동이다. 변혁정의의 철학적 기초는 그 근원을 따라가자면 미국의 원주민indigenous 공동체까지 도달한다. 여러 세대에 걸쳐 국가 폭력을 경험하고, 제도화된 ‘문명‘ 사회로부터 축출과 차별의 대상이 되고, 그로 인해 수백년에 이어 전해진 집단적 트라우마를이겨내면서 쌓아올린 실천지phronesis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철학이자 사회운동인 것이다. 
변혁정의론은 법과 제도가 끝내 우리를 보호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안전망을 꾸리고 우리를 지켜낼 수 있는 공동체적 기반과 문화를 만드는 것을 매일의 목표로 삼는다. 홀로 외롭게 국민청원을 하거나 아무런보호막도 없이 폭력을 그저 참고 견뎌야 하는 상황을 종식시키고, 취약한 이들의 연대를 통해 지속가능한 돌봄의 네트워크를 만들고자 한다.

변혁정의 운동은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우리 손으로 만들자고 주장하며 근본적인 체제 전환을 외치는 풀뿌리 조직화rassro organizing의 가장 선명한 사례다. 일상 속의 작은 움직임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우리의 몸과 정신에 깊이 새겨진 낡은 이데올로기를 떨쳐낸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 운동은 작은 목표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크고 아름다운 비전을 그리며 가장 이상적인 세계를 미리 상상해본다.

"시대와 불화하는 삶‘이라는 좌우명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미래는 지금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대의 한계를 느낄 때, 현재의 사회시스템에 순응할 수 없을 때, 법이 제정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때, 그때 우리는 더 나은 세계를 그리며 미래를 이미 실천하는 정치를 꿈꾼다.

소수자들과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 비전에 대한 공통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협력, 목표를 위해 삶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실천을 모색한다. 더 나은 세계를 원한다면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고 믿어야 하고, 또한 그 믿음을 공유하고있는 사람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 혹시 여전히 손을 잡기가 망설여진다면, 나는 당신에게 미래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뜬구름과 같은 그 무엇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조금씩 해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더이상 구원자를 기다리며 미래를 영원히 지연시킬 수 없다. 그래서당신이 필요하다.

미래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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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적이고 형식적인 공정으로서의 시험에 대한 절대적 지지는 결코한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밥그릇 싸움이라고 비하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나는 가진 것도 없고 ‘부모 찬스‘도 없으니까 차라리 ‘계급장‘ 떼고 공정하고 평등하게 붙어보자는 이 요구는 10대 시절부터 축적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고, 강력한 정동affect 이자 생존본능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한국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과 역사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다.

공정이라는 가치가 실제로는 보다 상위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능력대비 보상‘ ‘노력 대비 보상‘과 치환 가능한 개념으로 통용되거나, ‘공정경쟁‘과 같은 식으로 경쟁과 직결되어 논의되는 것은 한국 사회의 특징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샌델은 자만과 굴욕이라는 두개의 키워드로 능력주의를 설명했으니, 박탈감과 모멸감이 쉽게 발현되는 한국과 같은 경쟁 사회에서 그의 인기가 많은 것은 당연한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능력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하버드 대학 교수에게 열광하는 현상 역시 그다지 놀랍지 않다.
샌델이 한국의 능력주의 논쟁에서 오랫동안 지배적 위치를 차지해왔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베스트셀러인 그의 저서, 수많은 인터뷰와 인용 기사, 여러차례의 초청강연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그는능력주의의 부작용으로서 자만과 굴욕을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샌델은능력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 뿌리는 건드리지 않는 길을 택한다. 사회구조와 물질적·문화적 조건을 혁신하는 방법에 대한 치열한 논쟁은 피해간다는 얘기다. 능력주의는 구조적 불평등, 차별, 행운이 미치는 영향을 은폐하고 우리의 위치를 ‘순수한 개인적 성취‘로 포장하는 효과를 낳는다. 그런데 샌델은 이 중에서도 특히 운에 방점을 둔다. 일례로 명문대에 합격한 것은 남들보다 운이 좋았던 영향도 있는데 정작 사람들은 행운과 신의 은총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샌델이 제시하는 능력주의의 해결책은 추첨이다. 
그러나 이는 능력주의의 본질적 문제를 회피하는 해결책이다. 오히려 이 같은 개인화된 해결책은 구조적 문제를 개별적 마음가짐과 자세의 문제로 치환시킨다. 능력주의가 불평등과 차별을 바탕으로 유지되고 동시에 이를 재생산한다는 다른 연구나 담론과 비교할 때, 샌델의 주장은 단순히 온건한것이 아니라 능력주의 비판 담론의 보수화와 개인화를 가져왔다. 이는그동안 국내외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발전시켜온 능력주의 비판과도 크게 배치된다."

마이클 샌델을 넘어서: 구조적 불평등의 문제

사교육업계에 따르면 2021학년도 영재학교 최종 합격자 명단을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서울과학고 정원 120명중 절반 이상인 66명이 대치동 A학원 출신, 경기과학고 정원 120명 중절반 이상인 61명이 대치동 A학원 출신, 한국과학영재학교 정원 120명중 절반 이상인 64명이 대치동 A학원 출신, 대전과학고는 정원 90명 중에서 절반에 살짝 못 미치는 41 명이 대치동 A학원 출신이다. 

사교육으로 얻은 각종 인맥과 정보, 기출문제은행, 최신문제 유형 및 경향 분석을 동원해 시험 성적을 올리고 경쟁에서 우위를점할 수 있다. 경제적 불평등과 사교육투자 수준의 차이는 자연히 시험성적과 학력의 격차로 이어진다.

시험과 능력주의는 절대로 구조적 불평등과 무관하지 않다.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보자. 시험은 누구에게나 공정한가? 시험은 우리에게 ‘노력 대비 공정한 보상‘을 가져다줄까? 물론 노력하지 않으면점수가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나 핵심은 나의 노력의 양, 질, 효과가 구조적 불평등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내가 1시간 동안 혼자 공부에서 올릴 수 있는 점수와 부유층 수험생이 1시간 과외를 받아서 올릴 수있는 점수에는 차이가 있다. 대학입시로 대표되는 능력주의 게임은 우리가 진정한 능력을 개발하고 추구하도록 돕기보다는 특정한 방식으로측정되는 점수 경쟁을 가속화한다.

미국의 대학생들은 청년의 성공 요인 1순위로 노력을 꼽았고, 중국과 일본의 대학생들은 재능이 가장 중요하다고 답했다. 그런데 한국대학생들은 가장 중요한 성공 요인이 부모의 재력이라고 응답했다. 더구나 절반 정도인 50.5%가 선택해 압도적인 1위였다(반면 일본에서는6.7%, 미국과 중국에서는 약 12%의 응답자들만 부모의 재력을 선택했다)." 부모의 재력이 답이라면 앞으로 성공할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일까? 이런 결과는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통속 이론인 ‘수저계급론‘과 맥을 같이하니 그다지 놀랍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취적으로 미래를 기획해야 할 20대 초반의 청년 세대가 이렇게 대답하게된 뼈아픈 현실에 대해 우리 모두 진지하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학력주의와 능력주의가 오히려 부의 대물림과 불평등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눈물이 났다. 슬퍼서.무력감이 느껴져서.
이 책 왜 이렇게 읽기가 힘이 드나.

그 어떤 개인도 오직 자신의 노력만으로 348조원을 벌어들일수는 없다. 이는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적 혜택이 장기적으로 뒷받침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극단적인 부익부 빈익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 정책 개선이나 세제 개편과 같은 구조적 개혁 및 수정 조치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능력주의는 허구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결국 당당하게 부의 재분배를 요구하는 것이다. ‘능력 대비 보상‘이라는 저울은 이미 기울어져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보상 시스템의 보완과 재조정을 기획해야 한다. 

기득권 계층은 당연히 구조의수혜자임을 인정하고 재분배에 동참해야 한다. 기업 규모 및 고용 형태에 따른 임금격차 해결, 노동 조건 개선, 복지 제도의 확장, 세제 개편,공공부문 확장과 같은 정책적 논의도 더욱 활발해져야 한다.
동시에 정치인들은 우리 사회의 문제를 시험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진지한 고민이 결여된 대중적영합이자, 오히려 근본 원인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처사다.우리에게는 소모적 경쟁과 줄 세우기 없이도 스스로의 자리와 일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주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높은 시험 성적과 등수가아니라 가치와 탁월함을 추구하도록 돕는 교육 현장과 사회 환경을 만들기 위해 정책 입안자들부터 앞장서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비수도권또는 저소득층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잠재력을 실현할 기회를박탈당하지 않도록 교육 기회를 적극적으로 재분배해야 한다(교육 기회의 재분배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좀더 살펴볼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획일적인 잣대로 모두를 줄 세우기보다는 다원적가치와 능력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새로운 모델은어떤 지역의 작은 주민 자치 공동체에서 출발할 수도 있고 협동조합에서 탄생할 수도 있으며 느슨한 네트워크에서 시작된 실험이 퍼져나가는형태가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신념 있는 정책 입안자의 오랜 구상에서비롯될 수도 있고 대의와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정치인의 끊임없는 소통과 협력을 통해 추진력을 얻을 수도 있다. 능력주의 비판은 이미 충분히반복되어왔다. 이제이 비판을 정치적 의지로 바꿔낼 때다.

젠더와 관계없이 오직 능력만 보고 채용해야 하는데, 페미니스트는채용해서는 안 되고 남녀 간 임금은 차등 지급해야 한다는 의견은 모순덩어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교집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장에서는 능력주의 논리가 차별과 혐오로 확장되면서 생성된 이 단단한 교집합을 여러 각도에서 들여다볼 것이다. 

한국은 어떨까? 미국식 농담을 그대로 가져와서 표현해보면 이렇다.
"너희들 1만원 낼 때, 우리는 6,400원만 낼게!" 한국 여성으로서 너무 암담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금액이지만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2021년9월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0년 최신 통계다. 즉 남성이 100만원을받는다고 가정하면 여성은 64만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한국의 남녀 임금격차는 다른 OECD 국가들과 비교할 때 언제나 부동의 1위다. 사실북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미국도 격차가 큰 편이지만 한국처럼 여성의노동가치를 남성의 64% 정도로 취급하는 OECD 회원국은 없다. 한국에 이어 항상 2, 3위를 다투는 일본과 이스라엘도 77% 수준이다. 덴마크나 노르웨이와 같은 북유럽 국가들은 약 95%로 남녀 간 임금 수준에거의 차이가 없다." 남성 100만원과 여성 64만원의 간격은 너무나 멀지않은가? 그런데도 남녀 간의 임금격차는 ‘공정‘한가?
한국은 해외에서 이른바 ‘선진국‘으로 알려져 있어 성별 임금격차가이 정도로 클 것이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 사례는 외국의 유명 경제학자들이 대중 강연에서 언급하는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불평등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성별 임금격차를 지적할 때 유일하게 한국을 예로 드는 것이다. 

1장에서 ‘피해입은 특권‘에 대해 살펴봤듯이, 그들은이 사회가 오히려 남성들을 차별하고 있다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들의 박탈감은 특히 여성과 소수자를 향해 표출되는데 그럴 때마다 능력주의 논리가 손쉽게 동원된다. "능력도 안 되는데 소수자 정체성 때문에뽑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정체성에 기반해" 약자와 소수자를배려하는 것은 불공정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틀린 말이다. 3장에서 논의했듯이 능력은 경제적 계급과 구조적 불평등의 영향을 받는다. 

1장에서 ‘피해입은 특권‘에 대해 살펴봤듯이, 그들은이 사회가 오히려 남성들을 차별하고 있다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들의 박탈감은 특히 여성과 소수자를 향해 표출되는데 그럴 때마다 능력주의 논리가 손쉽게 동원된다. "능력도 안 되는데 소수자 정체성 때문에뽑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정체성에 기반해" 약자와 소수자를배려하는 것은 불공정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틀린 말이다. 3장에서 논의했듯이 능력은 경제적 계급과 구조적 불평등의 영향을 받는다. 

백래시와 무지의 결탁

애그노톨로지라는 용어의 창시자인 로버트 프록터Robert Proctor는 무지를 크게 세종류로 구분했다. 원초적 무지, 선택적 무지, 전략적 무지가바로 그것이다.

1. 원초적 무지
모르면 배우면 되고 때로는 굳이 배워야 할 필요조차 없는

2. 선택적 무지
윤석열 대통령의 무지에서 비롯된 발언의 반복. 배울 마음도 고칠 의지도 없다. 사는데 아무 지장없고 무지와 무감이 타인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름.

3. 전략적 무지
 ‘적극적으로 형성하는 무지‘다. 사람들의 의심,정보의 부족이나 불확실성, 허위정보를 이용해서 무지 혹은 거짓을 적극적으로 구성, 조작, 유지하는 것이다. 백신음모론이 이와 같은 전략적 기획의 대표적인 사례다. 차별금지법이 가족과 사회를 붕괴시킬 것이라고 위협.이처럼 다양한채널을 통해 허위 정보를 유통하고 서로의 거짓 주장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사람들의 무지를 굳혀가는 것이 바로 전략적 무지다.

선택적 무지와 전략적 무지는 백래시가 꺼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공급되는 산소와 같다. 이 둘은 독자적으로 기능하기보다는 함께 시너지를 내는 경우가 많으며, 현실 부정과 백래시의 ‘논거‘를 계속해서 조달해준다.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택적 무지, "오직 능력만으로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설파하는전략적 무지는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내 옆에 있는 여성이 소수자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성차별이 종식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정책과 법안을 만드는 사람은 특별한 성공 사례가 아니라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답을 찾아야 한다.

능력주의의 한계는 단지 계급과 구조적 불평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정체성에 기반한 차별과 혐오를 생략한 채로 능력주의의문제를 논할 수는 없다. 앞에서 언급한 일련의 연구들은 여성혐오가 능력주의 시스템에 어떻게 침투해왔는지를 숫자로 증명한다. 하일먼은 이를 두고 "여자들은 성공한 죄로 벌을 받는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실제로 성공한 여성들에 대한 반감은 한국 사회에서도 쉽게 발견되고, 신입사원 중 여성 비율이 높다고 하더라도 전문직 고위직으로 갈수록 여성은 줄어든다. 하지만 하일먼의 연구에 참여했던 이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이 평가 과정에서 성차별을 했다거나 여성혐오를 표출했다고 깨닫지는못했을 것이다. 그저 서류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점수를 매긴 것뿐이니까. 저들을 비난하기 전에 우리는 정상 규범을 학습하며 자란 모든 이들이 차별의 영향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능력주의뿐만 아니라 능력 그 자체가 차별에 기반해구성된 허구라는 점을 짚어보자.

능력과 능력주의, 차별의 공모자 

기업의 연구 후원금 역시 해당 시점에 ‘돈이 되는‘ 분야에 몰리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돈을 많이 따오는‘ 학자가 언제나 남들보다 능력과 재능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사학자보다는 공학자가 대체로 연구를수주할 기회가 더 많지 않은가?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능력‘의 개념과속성 자체가 절대로 경제논리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를 두고 로널드잭슨Ronald Jackson은 "능력의 레토릭thetoric은 곧 시장의 레토릭"이라고 했다

이미 유명한 사람이 이익을 선점해 더 유명해지는 현상을 매튜 효과 Mathew effect라고 하는데 25쉽게 표현하자면 ‘부익부 빈익빈‘과 비슷하다.

자본주의와 남성중심주의가 복합적으로 작동하면서 여성의 능력과노력이 저평가되는 젠더화된gendered 노동의 영역도 있다.
돌봄은 경제적 부가가치를 직접적으로‘ 생산해내지 못할 뿐 아니라, 마치 여성이라면 돌봄의 재능을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돌봄노동에 익숙한 사람은 없다. 오히려 많은 훈련과 배움을 필요로 한다. 또한돌봄의 사회적 기여 역시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 팬데믹 이후 돌봄노동의 필요성과 중대성에 대한 논의가 확대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돌봄 노동자들은 심각한 번rgbunput 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남성중심주의가 복합적으로 작동하면서 여성의 능력과노력이 저평가되는 젠더화된gendered 노동의 영역도 있다.
돌봄은 경제적 부가가치를 직접적으로‘ 생산해내지 못할 뿐 아니라, 마치 여성이라면 돌봄의 재능을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돌봄노동에 익숙한 사람은 없다. 오히려 많은 훈련과 배움을 필요로 한다. 또한돌봄의 사회적 기여 역시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 팬데믹 이후 돌봄노동의 필요성과 중대성에 대한 논의가 확대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돌봄 노동자들은 심각한 번rgbunput 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고 있다.

피나는 노력으로 경쟁을 통과해 ‘월드 클래스‘에 선발되었다고
 믿었고, 그러므로 여전히 클래식 영역에서는 남성이 여성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고정관념이 옳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고작 커튼 하나로 그 신화가 완전히 깨진 것이다. 이 역사적인 드라마는 실제로 능력주의의 허구성을 증명하 는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클래식 음악계의 경우처럼 어떤 분야에서는 적극적인 소수자 배려 정책이 필수적이다. 여성, 저소득층, 비수도권 지역이 과소 대표된 영역이 있다면 할당제와 같은 수정 조치가 도입되어야 차별과 불평등을 조금이라도 해소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지역균형선발 전형, 기회균등전형과 같은 정책이 입시 제도에 도입되어 농어촌 지역과저소득층 가구의 청소년들이 입시 과정의 어려움을 어느 정도 극복할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소수자 배려 조치 역시어디까지나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 결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한걸음 더 나아가 차별과 불평등을 발본적으로 깨뜨릴 수 있는 방안을모색해야 한다. 3장에서 논의한 부의 재분배와 함께 인정의 재분배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 중 하나다.

차별과 혐오를 넘어: 인정의 재분배

첫째, 소수자 배려 정책은 불평등한 구조는 혁신하지 못한 채 일시적으로 약자들에게 기회만 제공할 뿐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입시와 채용의 관문을 통과하는 소수자들이 증가하면 해당 정체성 집단의 사회 자본social capital이 확대될 수 있고, 이들이 성공함으로써 또다른 변화를 나비효과처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일부의 성공이 곧 불평등한구조를 혁신해내거나 부의 재분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평등한 구조는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소수자를 그 구조에 동참하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둘째, 소수자 배려 정책은 사회의 약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함으로써자원은 재분배 mediscribution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사회적 인정recognition의획득은 오히려 어렵게 한다. 진짜로 역설적인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지균충. 기균충. 소속감 느낄 수 없고 개인 역량 온전히 발휘 못해.

그래서 우리는 재분배에 보다 전폭적인 힘을 쏟아야 한다. 특히 교육영역은 더욱 중요하다. 교육은 부의 재분배와 인정의 재분배 모두를 가장 효과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영역일 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생애 주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교육 기회의 재분배는 당연히 할당제 이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물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부의 재분배와 인정의 재분배가 완전히 상호배타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분석적 측면에서는 둘을 분리해서 논하는 것이 유용할 때도 있지만,
사실 이 둘은 긴밀하게 얽혀 있고 서로 영향을 미친다). 

스스로 ‘부와 인정의 주변부‘에 놓여 있다고 느끼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불공정하다"는 외침도, 타자와의 차별화 전략도, 혐오와 무시의 레토릭도 계속 반복될 것이다. 지금처럼 단편적이고 획일적
인 기준으로 사람들의 지위가 매겨지고 인정이 배분되는 사회가 아닌, 다원적 가치와 기회를 추구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방식으로 삶과직업을 의미화하고 진학과 취직의 경로를 다변화함으로써, 사회적 지위에 대한 기존의 일방적인 인식체계를 낙후시켜야 한다.

모든 이들의 인간적 존엄과 삶의 질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 모두 조금씩 힘을 더할 수 있었으면 한다. 각자의 고유한 가치로 인정과 존중을 받는 사회. 그래서 ‘소수자‘라는 표현을 사용할 필요조차 없는 사회를 상상해 본다.

모두를 위한 돌봄: 두려움 없이 연대하는 나 그리고 우리

번아웃이라고 느껴질 때

하지만 지금 당장 구조를 바꿀 수 없거나 개인의 힘으로 즉각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인 상황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일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변혁시킬 수 있을까? 제도를 당장 바꿀 수 없을 때,혹은 조직이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을 때, 우리는 나 자신을 돌볼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서로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 나와 동료들을 돌보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활용도 높은 부품‘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스스로를 온전히 존중하고 돌보면서 일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돌봄의 윤리와 관계적 존재론

나는 우리가 사회를 운영하는 기초 원리로서 정의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돌봄의 가치도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의와 돌봄은우리의 삶과 사회를 지탱하는 두개의 필수 기능이다. 우리의 삶은 ‘옳고그름‘만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정의의 원리 하나만으로 우리의 공동체를 운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돌봄 이론은 이 거대하고 오래된 철학사를 다시 쓰기 위해서 시작되었고, 정의론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발전해왔다. 그래서 돌봄의 윤리는단순하지 않다. 이는 그저 "따뜻한 마음으로 다른 이를 돌보자"는 착실한 구호가 아니라 인간, 관계, 사회에 대한 대안 개념을 제시하고자 하는원대한 기획이다. 그리고 그 핵심은 관계적 존재론 relational ontology이다. 돌봄 이론은 인간의 속성을,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를 재정의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 그동안 간과되었던 공동체의 운영 원리로서 돌봄을 제시하고 발전시켜왔다. 초창기 돌봄 이론은 정의론을 염두에 둔 대항 담론으로 시작되었기에 그만큼의 시대적 한계도 있었지만, 그 이후 빠른 속도로 이론적 진전을 이뤄냈고 지금은 위기와 재난의 시대에 우리의 생태계를 다시 살려낼 수 있는 철학적 바탕을 탄탄히 다져가고 있다.
우리는 어린 시절을 포함해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시기를 거쳐왔다. 개인이 존재하기 이전에 수많은 관계, 공동체, 생태계가 엮여 있었고, 바로 그 안전망이 있기에 우리가 온전한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것이다. 관계적 존재론은 이처럼 나를 둘러싼 다양한 관계들의 영향을 인지하는 태도, 그리고 윤리적결정을 내릴 때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필요를 고려하는관점을 뜻한다. 
최근 돌봄 이론가와 활동가들이 역설하는보편적 돌봄universal care 은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일반화된 보편적 원칙이나실천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보편적 돌봄은 내가 모르는 타인들까지도 돌봄의 기본 전제로 받아들일 것을 제안한다. 윤리적 실천의 대상을 더이상 "나의 주변 인물"로 한정하지 않는 것, 즉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를 향한 마음으로 돌봄을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생존은 우리 모두에게 달려 있다. 우리는 모두를 위한 돌봄,어디에나 있는 돌봄을 상상할 수 있을까? 재난, 감염병, 기후위기의 시대에는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적 돌봄이 더 중요해진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앞세우고, 타인의생존 기반이 흔들리더라도 나의 보상이 우선이며, 협력보다는 경쟁의원리로 사회를 운영해야 한다는 인식은 슬프게도 한국 사회의 공기를가득 채우고 있다. 하지만 이런 존재론적 기반으로는 어떤 사회도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분열과 경쟁, 차별과 혐오가더욱 악화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관계와 돌봄을 삶의 원리로 정착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시급한 과제다.
사회적 공동체적 맥락에서의 부정의도 고려해야.

급진적 자기돌봄

나는 그런 접근과는 다소 다른 의미로 연대를 전제로 한 돌봄, 다시말해 자기돌봄과 공동체를 향한 돌봄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전제로 한 돌봄의 윤리로서 급진적 자기돌봄을 정의하고자 한다

급진적 자기돌봄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나의 회복이 곧 모두의 회복인 돌봄, 연대를 위한 손을 맞잡기 위한, 동지가 되기 위한 돌봄.내가 속한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자기돌봄. 그러므로 자기돌봄self care은곧 타자돌봄 othercare이 된다. 사회적 부정의와 제도적 공백 속에서도 삶을 이어나가기를 선택한 우리는 서로를 지키고 보호하는 투쟁과 연대의한 양식으로서 급진적 자기돌봄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급진적 자기돌봄은 구조적 폭력과 부정의로 인한 상처를 직시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치유할 수 있도록 일상을재조직하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자본주의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개개인의 회복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고, 또한 그런 사회를 요구해야 한다. 스스로의 회복을 위한 시공간을 확보하고 온전히나의 삶과 생명을 회복시키는 실천적 의례가 무엇인지 탐색할 수 있는기회를 만들자. 나를 살리는 행위를 습관화하자. 나의 동료들에게 급진적 자기돌봄의 방안을 적극적으로 묻고, 가능한 실천을 함께 모색하고 공유하자.

둘째, 연대와 상호부조mutual aid 를 통해 급진적 자기돌봄을 확대할 수 있는 심리적.물질적 토대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도움을 청하고, 서로를 돌보고, 함께 연대할 수있는 사회의 윤리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내곁에 있는 이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면서 상호부조의 기반을 만들자

셋째, 급진적 자기돌봄은 무조건적인 긍정을 강요하지 않으며(즉"긍정적 마음가짐"을 유지하라는 뜻이 아니며, 개개인이 처한 상황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들에게 억지로 긍정을 강요하거나 힘을 낼 것을 바라지 않고도 돌봄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그들이 자기돌봄을 잘 해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급진적 자기돌봄은 나의 고통이 사회적 부조리 및 폭력과 연결되어있다는 점을 직시하고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스스로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이다. 일터에서 번아웃을 경험할 때 적극적으로 회복의 시공간을 확보하고, 언론을 통해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소식을 접할때 그런 소식이 나의 감정과 일상을 잠식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다

재난 위기, 구조적 폭력, 사회의 실패를 지속적으로 목도하는 환경에서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방식으로 삶을 재구성하고 다양한 급진적 자기돌봄의 양식을 발명해내야 한다.

보편적정의: 모두가 온전히 평등한 세계

자유라는 이름의 사기극: 무한 경쟁,제1라운드

하지만 우리가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부터 "완전한 자유경쟁"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선택과 노력만 있다면 우리는 그 모든 경쟁의 승리자가 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이기는 사람이 있다면 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자유주의 경제 이론은 개인의행동을 합리성과 이해관계 추구로 설명하며 이들의 활동 무대는 자유경쟁 시장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같은 룰을 가진 게임에서 이기는 사람은 당연히 이미 충분한 소득과 자산을 보유한 기득권일 가능성이 높다. 기득권자들은 딱히 사회안전망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런 규제 없이 마음껏 돈과 자원을 굴릴 수 있어야 빠른 속도로자산을 증식시킬 수 있다. 약자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는 복지 정책, 독과점 규제, 부의 재분배와 같은 움직임에 반대하는 이들은 "구조적 차별과불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

비교와 선별의 위계: 무한경쟁,2라운드

이처럼 주어진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는, 말 잘 듣는 모범적 주체들을 중심으로 지원을 제공하는 국가·민간 정책은 비교와 선별의 위계를(재)생산하고 정당화한다. 누구든 지원을 받고 싶다면 국가경제적 관점에서 바람직한 주체 경쟁을 통과해 정책 수혜 대상자로 선발되어야 하므로, 이런 체계는 훈육과 억압 기제로 작동하기도 한다. 

자유경쟁에 마음껏 뛰어들 수 없는 ‘낙오된 자들은 비교와 선별의 위계를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일차적으로는 사회경제적 지원을 받기 위한경쟁을 통과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모범적인 (또는 자격을 갖춘) 존재로 인정받음으로써 능력주의 시장 혹은 자유경쟁 시장에 자신을 편입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격 있음‘ deserving과‘자격 없음‘ undeserving을 구별하는 과정은 정상 이데올로기와 능력주의를강화할 수밖에 없다. 경쟁, 비교, 선별의 무한루프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 나의 능력을 내세우는 경쟁부터 나의 바람직함을 내세우는경쟁까지, 우리는 서로를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 할까?
경쟁과 비교의 가치로 운용되는 사회가 아닌, 다른 가치에 기반해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나갈 수는 없을까?

무한경쟁의 스펙트럼을 넘어서: 모두를 위한 정의

한가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은, 보편적 정의는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똑같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기본소득basic income 개념이 제안하듯이 누군가가 처한 현재의 상황이나 경제적 조건과 무관하게 무조건 동등하게 일정 금액을 배분하자는 주장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보편적 정의는 한 사회의 평등적 이상을 설정하고, 그 이상에 모두가 분명히 도달할 수 있도록 배분의 수준을 달리하는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다. 즉 모든 이들이 누려야 할 이상적 삶의 조건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모두가 그 조건을 보편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분배정의를 실현하자는 주장이다. 그리고 보편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분배해야 할 몫은 개인들 사이의 상호 비교와 경쟁이 아니라, 개인적 현실과 공동체적 이상 사이의 비교를 통해 결정된다. 그 간극을 채움으로써 그 누구의 존엄한 삶도 위협받지 않도록 중재하는 모델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모두가 보장받아야 할 보편적 권리를 이상적 목표로 설정하고, 모든 이들이 그 목표에 이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 아닐까. 그 누구도 자신만의 능력으로 홀로서기를 할 수 없는 세계에서 모두를 위한 돌봄과 정의가 우리의 삶과 관계를 어떻게 변혁시킬 수 있을지 함께 사유하자. 구조적 불평등을 ‘자유‘와 ‘공정‘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동시에 개인의 ‘무능‘과 ‘무책임‘이라고 비난하는the common goou.
세계를 무너뜨리자. 경쟁과 능력주의로는 결코 실현할 수 없는 공동선의 세계를 상상하자. 우리는 모두의 기회, 안전, 존엄을 위한 정의의 원칙을 만들고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한 더 높은 목표와 기준을세울 수 있다. 각자가 평등하면서도 고유하게 대우받는 보편적 정의의이상을 그리기 위해 함께 마음을 맞대자. 모든 이들의 존엄한 삶이 보장될 때, 우리는 끝없는 경쟁과 비교의 굴레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전혀다른 차원의 심리적·물질적 풍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당신도 함께 대안적 여정에 동참했으면 한다.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의 모습을 다시 그려내기 위해서는 당신의 힘과 마음이 필요하다. 경쟁하는 개체들의 군집이 아니라 함께 연대하는 신뢰와 우정의 공동체를만들어나가자.

고특히 윤석열 대통령은밀턴 프리드먼12Milton Friedman의 『선택할 자유를 27년간 끼고13다닌 ‘인생 책‘으로 꼽을 정도로 자유 시장 경제fice market economy 를 노골적으로 옹호해왔다. 

정의로운 조직: 모두가 인간답게 일할 수 있는 곳.

갑질은 왜 이렇게 흔할까.

때로는 지는 싸움이라도 꼬 해야 한다.
스티브잡스의 유명한 갑질
. 개새끼론 asshole 로버트 서튼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유능한 개새끼brilliant jerk
마크저크버그 우버의 트래비스 캘러닉.
우버 수많은 고위직 자리가 공석.진정한 자율주행 기업이 되었다고 농담.

정의로운 조직은 가능하다

 또한 어느 대선후보가 "주 120시간도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 120시간을 채우는 이들은 과연누구일까? 이런 환경 속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간주되는 이들은 비현실적인 마감도 맞추고, 상사의 심기도 살피고, 살아남기 위해 자존감을잃어가며 스스로를 끝까지 몰아붙인다. 그렇게 아무런 안전망도 없이알아서 생존해내는 것이 바로 각자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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