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자세다. 인생에는 노상강도를 당할 가능성, 교통사고를당할 가능성, 벼락을 맞을 가능성, 뇌졸중이나 혈액암에 걸릴 가능성,
슈퍼박테리아에 감염될 가능성이 늘 있다.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피하려 하면서도 결국 없애지 못하며, 어느 수준에서 감수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생존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기쁨과 감동을 모두 희생하는 나날을 과연 ‘삶‘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삶을 산다는 것은 곧 삶에 맞선다는것이며,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의 마지막 몇 방울을 어디까지 마시고 어디서부터 포기할지 내가 정한다는 것이다.

문득 연지혜는 정철희가 경찰 조직을 상대로 신뢰라는 포인트를 적립해뒀다가 자기가 하고 싶지만 가능성이 낮은 이 수사를 위해 그 포인트를 사용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들었다. 경찰 조직이라는 시스템을 잘 이해하고 자기 스스로를 철저히 통제하는 사람만
이 그런 기술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니체가 내세운 답들은 많은 독자의 가슴을 건드렸으나 극도로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생의 철학, 힘에의 의지, 초인, 영원회귀………. 어지럽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끝내 모르겠다. 묘한 향을 풍기며 잠시사람을 들뜨게 했다가 짙은 숙취를 남기는 독한 술과 같은 단어들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카뮈의 지침은 니체의 말보다는 이해하기 쉽다. 상당히 논리적으로도 들린다. 신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는 현대 과학의 발견들과 충돌하지않고,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윤리적인 삶의 근거를 제시하는 듯하다.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필요한 현대 무신론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답안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편안한 도착지에 이르지만 그 여정에서 지성을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거기에 비극적 감흥이라는 선물까지 안겨준다.

카뮈에 대한 나의 감상은 1945년 가을 파리에서, 마치 록 콘서트처럼 청이 몰렸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강연을 듣고 난 미셸 투르니에의 반응과다: 뭐야, 결국 케케묵은 휴머니즘 얘기였어?

오늘날 우리는 아기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DNA에 새겨진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본능은 우리가 믿는 것만큼 강하지않다. 실은 강력하고 반복적인 사회화의 결과인 측면이 더 크다. 곤충에 대한 혐오감과 비슷하다.
역사적으로 모든 문화권에서 영아살해가 만연했다. 

18세기까지도 아이를 잘 죽인다는 소문이 난 유모를 찾는 어머니들이있었다.
이런 문화가 사라지고 영아살해가 최악의 범죄 취급을 받게 된 것은계몽주의가 퍼진 다음부터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인간이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고,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며, 이권리들은 정부보다 앞선다고 규정한다. 이 규범은 일단 태어난 인간 모두에게 적용된다.
한번 태어난 인간은 생명을 보호받고 자유와 행복 추구에 있어서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거의 도덕적 직관이 되었다. 사람들은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줄 아는 성체 침팬지들이 고문과같은 동물실험을 당하는 데 대해 그저 불편함을 느끼는 정도다. 그러나가만히 놔두면 분명히 죽을 아직 의식 없는 상태인 미숙아는 무슨 수를쓰더라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명의 존엄함을 이유로 싱어를 비판하는 것은 제대로 된 반박이 아니다. 우생학과 가스실 운운하는 공격도 마찬가지다. 싱어는 미국 독립선언문이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그어놓은 금을 자의식과 무의식 사이로 옮기자고 제안하는 것뿐이다.
나는 다른 이유로 싱어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주장이얄팍하다고 본다.
싱어의 윤리는 단순하다 쾌락을 늘리고 고통을 줄이자.
그는 고통에 비극적 의미가 있을 수 있음을 모른다. 싱어뿐 아니라 모든 공리주의자들이 그 점을 모른다.
어떤 의미는 고통 속에서, 고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인간은 우주와 자신을 서사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사가 없는 상태를 상상하지 못한다.
좋은 서사를 만드는 것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시련과 역경이다. 그래서 지옥에 대한 상상은 늘 상세하고 매혹적인 반면 천국의 묘사는 따분하고 뜬구름 잡는 것처럼 들린다.
좋은 인간을 완성하는 것은 고난이다. 좋은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사상가와 작가들이 그린 유토피아에 대해 들으며 우리는 도리어 섬뜩함을느낀다. 그런 곳은 좋은 사회일 수 없다고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것이다.
싱어가 추구하는 이상향은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보여준 끔찍한 비전과 다르지 않다. 

삶의 목표로서 명예라는 가치가 지워지고 그 자리에 행복이 들어서면서 생긴 첫 번째 현상은, 일상적인 모욕 문화다. 론 E. 하워드가 썼듯이, 문명인은 야만인보다 무례한 말을 더 쉽게 한다. 그런다고 머리통이 박살날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상대의 결투 신청을 겁내지 않아도 된다. 조롱과 모욕에 대한 공적 처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약하다. 표현의 자유를 위축할수 있다는 이유로 부당한 공격도 제재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이 모욕을 당했을 때 이것을 법정으로 가져가기보다는 다른 말로 받아치는 것이 권장되는데, 이로 인해 조롱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 이것이 우리가 모멸과 굴욕이 가득한 사회에서 살게된 한가지 이유다.
인간은 천사와 짐승 사이의 존재다. 우리는 고상한 태도와 저열한 언행 양쪽 모두에 자연스럽게 끌린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후자를 엄청나게 북돋우는 반면 전자를 장려하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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