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삶의 의미를 강렬하게 얻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가 고통을 감수하는 모습을 보며 알 수 있다. 순교를 감수하는 신자들, 가혹 행위를 견디는 혁명가들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지닌 의미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우리는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지불하려는 돈으로 사람들이 의미에 부여하는 평균적인 금액 가치를 간접측정할 수 있다. 돈으로고통을 어림 계산하고, 고통으로 의미를 가늠하는 것이다.
그 외에는 문학적 창조뿐이다.
이 창조적 서술은 너무나 주관적이고 쓰기 편한 만능 도구여서 거의기만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 한사람이 처한 모든 상황을 억압적이고 살인적인 것으로 묘사할 수 있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행위에조차 그것이생존 투쟁이어서 결과적으로 승리라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우리는아무나 생존자라고, 승리자라고 추켜세울 수 있다.

<데미안》과 헤세의 유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우상의 자리에 있는 것은 아브락사스가 아니라 ‘진정성‘이라는 신화다. 일상이공허하다고 느낀 현대인들은 ‘진정한 것‘을 찾아 헤맨다.
인간이 자신이 좇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면서 ‘추구‘ 일상의 배후에 진정한 세계가있으며, 껍질을 깨고 그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정작 예수,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같은 이들은 일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일상과 분리된 깨달음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1990년대 들어 젊은이들 사이에서 세력을 얻은 반문화, 저항문화, 주변부 문화, 힙스터 문화, 서브컬처는 그런 메아리의 메아리다. 저항운동의 문화적 요소들이 한 세대 뒤 청년들에게 쿨하고 힙하게 받아들여진 것은 ‘무언가에 저항하고 있다. 그것은 의미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현대사회와 삶에 대한 인식의 근본이 되는, 다시 말해 현대를 창조하거나 발명했다고 부를 수 있는 거대 사상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고대 그리스식이 아닌 미국식) 민주주의, 자본주의, 마르크스주의, 진화론.
근대에 등장한 이 아이디어들은 전복적이고 파괴적이었다. 그때까지 사람들이 사회와 삶에 대해 품고 있던 인식을 산산이 부수고 완전히바꿔놓았다. 이 사상들이 얽혀서 현대성이라는 성질이 만들어졌으며그것은 현대인에게 거의 본능에 필적하는 일종의 운영 체제가 되었다.
이들 네 사상은 사람처럼 분노하고 용서하는 인간적인 신의 자리를허용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사에 세세히 간여하는 창조신이 없는 만큼 인간의 자유는 더 늘어난다. 윤리는 그만큼 개인의 몫이되며, 도스토옙스키는 그러한 함의를 두려워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성공과 실패를 당사자들이책임져야 할 문제로 본다. 사회 차원에서도, 개인 차원에서도 그렇다.그래서 이 두 사상은 합리적인 개인을 전제로 한다. 자신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잘 아는.
유권자들이 각자 자신에게 최선이 무엇인지 생각해서 그에 따라 두표를 하면 된다. 신의 명령 따위는 없다.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건도없다. 한사회의 민주주의가 실패한다면 시민의 역량이 부족해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도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차원의 도덕은있다. 하지만 그것이 개인에게 필요한 규범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도덕은 최소한이다. 그 이상에대해서는, 당신들은 자유롭고 합리적이니 각자 알아서 찾으라는 게 두사상의 기조다.
좋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두 사상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타인의 생존 조건과 행복추구, 경제적 자유 추구를 방해하지 말라는 정도다.
그런 세계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사적인 삶을 뛰어넘는 의미나 가치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거기서 인생의 목적을 묻게 되며, 점점 더실존을 둘러싼 심오한 불만에 잠긴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진화론과 달리 마르크스주의는 변화의 최종 단계가 있다고 가정한다. 공산혁명 이후에는 모든 갈등이 사라지고 노동자들의 세상이 온다고 한다.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에서 역사에는 방향성이 있으며, 진보는 생생한 개념이 된다. 모든 사건은 통합된 거대 서사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는다.
개인 역시 마찬가지다. 한사람은 역사의 흐름에 뛰어들어 거대 서사와 통합된 삶을 살 수 있다. 그는 혁명가가 될 수 있다. 그것은 희망이며일종의 개인적 구원이다. 그는 반동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영적인 파국을 의미한다. 그는 내세를 겪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세의 비전은볼 수 있다.

역사의 발전 : 신의 섭리와 비슷하다.
노동자들의 낙원: 천국과 비슷하다.

이 사상은 신봉자에게 사적인 쾌락, 효용 행복을 초월할 기회를 약속한다. 개인에게 목적과 방향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그렇게 한동안 현대의 신령으로서, 종교로서 기능했다. 샤먼과 순교자들만 누릴 수 있었던 환희와 전율, 고양감을 현대지식인들이 조금 맛볼 수 있게 했다.
정치 원리로서도, 경제 이론으로서도 수명이 다한 뒤에도 이 사상이여전히 문화 이론으로서 우리 문명 한구석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그 매력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다른 현대 사상들은 사회의 도덕적기초와 개인의 삶의 의미 사이 간극을 메우지 못하고 있다.

신계몽주의는 개인에게 보다 길고 뚜렷한 도덕규범을 제시한다. 그규범은 과거에 종교가 주던 영적인 충족감을 얼마간 제공한다. 아마도그 규범은 어느 선을 넘으면 합격하는 식이 아니라 무언가를 끝없이 수련해나가야 하는 형태일 것이다. 신계몽주의의 도덕규범은 충분히 선량한사람에게도 더 높은 의미와 가치를, 그 방향을 보여준다.

그중 하나는 신계몽주의 세계관에서 자란 사람은 비극을 이해하게될지 모른다는 전망이다.
계몽주의 세계관에서 자란 현대인은 비극을 이해하지 못한다. 비극에 대해서는 고대인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뛰어난 전문가였다. 그들은비극을 그 자체로 받아들였다. 슬픔은 기쁨과 마찬가지로 삶과 세계의중요한 구성 요소였고, 해석이 필요하지 않았다.

신계몽주의는 명예와 모멸감에 대해서도 계몽주의와 다른 접근법을택하고, 새로운 설명을 내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계몽주의는 생명과 자유, 행복에 대한 추구를 얼버무려 인간의 존엄이라는 개념을 구성한다. 그것들이 침해될 수 없는 가치라고, 욕구가아닌 권리라고 한다. 의미에 대한 추구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렇기에계몽주의는 명예와 업적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사람이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인정투쟁은 유치한 일로, 부끄러운 행위로 여겨진다.
하지만 다섯 살 아이부터 여든 살 노인까지, 인정투쟁에서 자유로운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인간의 깊은 본성이다. 신계몽주의는 의미를 중시하며, 의미를 향한 열망, 더 큰 이야기에 포함되고자 하는 욕망을 자연권에 포함할 가능성이 높다. 김상은 얼굴에쓰고신계몽주의의 인권 규범과 형사사법시스템은 의미의 훼손을 중죄로간주할지 모른다. 인격권 같은 임기응변 없이 신계몽주의는 전근대인들이 명예라고 불렀던 가치에 대해 보다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설명을 제시할 수 있을지 모른다.

더 큰 전쟁 피해를 막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해도 괜찮은가? 엄청난인명 피해를 일으킬 폭탄 테러를 막기 위해 용의자를 고문해도 좋은가? 한정된 복지 예산을 어떻게 편성하고 어떤 순서로 집행할 것인가?
모두 트롤리 딜레마다.

그런 면에서 트롤리 딜레마가 계몽주의 윤리의 빈틈을 폭로한말할 수도 있다. 

나는 언덕 아래 멀리서 제동장치가 고장난 트롤리가 돌진해오고, 그앞에 놓인 선로에 다섯 사람이 묶여 있으며, 옆에 있는 뚱뚱한 남자를밀어서 트롤리를 멈춰 세울 수 있을 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뚱뚱한 남자가 내 옆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트롤리-선로 묶인 사람들‘이라는 시스템은 내게 멀리 떨어져 있어서다.
나는 도덕적 책임에 원근법을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구의 표면적이 반지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3차원 공간의 특성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우주의 깊은 본성이다. 빛의 강도, 중력이나 전자기력뿐 아니라 다른 힘과 에너지도 매질이 균질한 3차원 공간에서 퍼질 때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강도가 약해진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법칙은 물리 세계뿐 아니라 인지 세계에서도 거의 흡사하게 적용되는 듯하다. 어떤 사건이 사람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의 강도는사건과 사람 사이의 인지적 거리에 반비례한다.

연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에서 자란 사람만이 동물원에서 우리 안에 갇힌 육식동물을 보며 가슴 아파하고 가엾게 여긴다. 야생에서늑대를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은 창살에 대해 감상을 품지 않는다. 연지혜는 판사들이 우리에 갇히지 않은 범죄자를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처하지
‘사람은 먼 곳의 상황을 잘 알 수 없다‘는 인식은 자치와 지역공동체의 중요성으로 이어진다. 근대 이후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국가와 가정 사이에 있는 많은 중간 규모 공동체들이 무너졌다. 상당 부분계몽주의 윤리의 허점 탓이라고 본다. 신계몽주의 사회에서는 크고 작은 지역공동체들의 자치권이 훨씬 더 중요하게 논의된다.

다른 이유 하나는 미디어에 의한 왜곡이다.
우리의 공감 능력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들었느냐에 좌우된다. 우리는 자주 보고 들은 대상이 우리 곁에 있다고 여긴다.
이는 미디어 기술이 발전하기 이전 전근대에서는 이치에 맞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원거리 통신 기술이 발달하면서 우리의 정신은 거대한가상현실을 만들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남수단의 수도 주바까지의 거리는 1만 킬로미터 남짓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에게는 1만 10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뉴욕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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