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여파는 보다 크고 심오하다. 행복이라는 개념이 극히 모호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은 듯한 느낌에 빠지게 되었다. 행복을추구하라고 하는데 정확히 무엇을 좇아야 하는지 알수 없는 것이다. 행복을 고통의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보는 일반적인 해석 때문에 이런 혼란은 더 커진다.
예를 들어 성취감은 대개 행복으로 분류하지만, 이 감정을 느끼려면괴로운 인내 과정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이들은 노력 없이 즉각적으로 얻을 수 있는 다른 쾌락과 이런 기쁨을 구별하기 위해 ‘진정한 행복‘이라는 수사를 동원한다. 그 순간 행복은 위계가 있고 단기 평가와 장기 평가가 달라지는 복잡한 개념이 되어버린다.
낭만적인 이들은 그런 구분에 반발하며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들 역시 시간의 흐름과 관련된 특성을 무시하면서 행복의 많은 부분을 놓치기는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오락가락할수밖에 없다.
노력파와 순간 양쪽 모두 실패한 열정이나 보답받지 못하는 짝사랑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을때, 우리는 그 도전이 존중할 만한 일이라고 느끼면서도 그것을 행복이라고 선뜻 부르기는 주저한다.

계몽주의 사회의 정책 입안자들은 숫제 고통이 따르는 장기적 행복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런 가치는 평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신 효용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는 결국쾌락을 가리키는 말이다.

계몽주의 사회에서 국가, 기업, 대학의 목표: 더 많은 효용.

계몽주의 사회에서 어느 정도 규모에 이른 집단은 모두 이 방법론을사용하며, 그 결과 공동체들은 점점 더 납작해진다. 경제적 효용 이외의가치를 집단적으로 추구하자고 제안하는사람은 몽상가 취급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 욕구는 인간 본성 깊숙한 곳에 남아 있다. 수치를 당하느니 죽음을 택하는 사람도 여전히 있다.

세계에는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7억 명이 넘는다. 보통 사람이라도 구호단체를 통해 그들에게 돈을 보내는 방법은 아주 쉽다. 그러므로 내가 당장 필요하지 않은 최신형 스마트폰을 살 때, 나는명백히 선택을 하는 것이다. 사하라사막 남쪽에 사는 사람들 수백 명의끼니보다 과시성 소비로 인한 나의 만족감이 더 중요하다는향이 좋은 프리미엄 커피를 마실 때, 플라스틱 가구 대신 원목 가구를살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택시를 타거나 자동차를 운전할 때,
집에 있지 않고 여행을 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절대빈곤 상태에 있는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죽게 내버려두자고 선택한다. 우리는모두 학살자이다.

이것은 계몽사상이 개인이 추구해야 할 도덕적 가치의 우선순위에대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계몽사상은 좋은 개인이 아니라 좋은 사회에 대한 것이다. 계몽사상의 창시자들은 절대왕정의 횡포에 치를 떨었으므로, 국가권력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게 하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
계몽사상은 그런 사회에서 개인이 어떻게 해야 좋은 삶을 살 수 있는지, 어떤 목표를 다른 일에 앞서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다. 시민의 의무를 다한 뒤에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행복을 추구하라는 정도다.
다시 말해 각자 알아서 하라고 한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정의의 시스템도 교화의 시스템도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리라.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은 형사와 교도관과 죄수이며, 그들은 자신들이 행사할 수 있는 힘과 얻을 수있는 이익을 판단해 행동할 뿐이라는 정의나 교화는 그 앞에 붙은 흐릿한 간판일 뿐이라는

도덕적 가치의 우선순위는, 한 사람이 그걸 추구하느라 얼마나 고생하는지와는 관련이 없어야 한다.
앞서 나는 의미와 고통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적었다. 하지만세상에는 의미 없는 고통도, 고통 없는 의미도 있다. 내가 고통을 느낀다고 반드시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의미의 크기가 고통의 크기에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불행히도 인간의 본능 - 우리가 ‘도덕적 직관‘이라고 부르는 것 -은 이런 분명한 사실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들의 고통이 클수록 값진 희생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귀여운 북극곰들을 살리기 위해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종이컵이 아니라 해외여행을 막아야 한다. 관광목적의 출국은 5년에 1회 정도로 제한해야 한다. 유명 해외 관광지의 사진을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람들을 비난해야 한다.
그러나 탄소 줄이기 캠페인은 종이컵 쪽에 더 초점을 맞춘다. 해외여행보다는 종이컵이 종교적 금지 대상에 좀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종이컵 쪽이 보다 일상적이고, 현시적(示的)이며, 고통스럽다(보통 사람들은 해외여행을 그리 자주 가지 않으며, 해외여행을 가지 않는 상태는 티가 나지 않지만 텀블러는 눈에 잘 띈다).
채식주의도 비슷하다. 육식이라는 유혹을 참는 일은 일상적이고, 현시적이며, 고통스럽다. 그리고 자주 논리적 모순에 부딪힌다. 동물 복지를 위해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고양이를 키워도 될까? 고양이는동물성 단백질을 먹어야 하고, 고양이 사료는 닭이나 연어로 만든다.
그러나 많은 채식주의자들은 그런 복잡성을 탐구하기보다는 거기에서 눈을 돌린다. 상당수는 희생의 결과보다는 희생이 그들에게 주는 도덕적 충족감을 추구하는 듯 보인다. 어떤 이들은 타협과 확장을 거부하고 고행의 순수함에 집착한다. 이는 정확히 종교인의 태도와 일치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귀여운 것에 쉽게 공감하지만 추상적인 통계에는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요구에 결코 다 응할 수 없다. 어떤 요구에 먼저 응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적 환경이 된다. 거대한 ‘공감 노동‘과 도덕적 피로감, 죄의식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몇몇 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의제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모두 공범으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내 안의 스타브로긴은 부정적이다. 스타브로긴은 그보다는 우리가서구의 1960년대와 같은 시기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1960년대에도 하나의 비전으로 모일 듯 말 듯한 커다란 에너지는 있었다. 그러나기득권에 대한 막연한 불신과 세부 사항이 없는 낭만적인 이상주의는끝내 일관되고 구체적인 사상 체계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 에너지는 저항문화, 반전운동, 히피즘, 성 혁명, 로큰롤, 마약 등에 뿔뿔이 흩어졌다.
그것은 방향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였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살롱에서 논쟁을 벌이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1960년대 서구젊은이들은 우드스톡에서 자아에 도취됐다.
서구의 1960년대는 사상을 낳지 못한 대신 문화적 유산이 되었다. 그유산에는 페미니즘과 소수자 운동처럼 긍정적인 것도 있고 가정의 해체와 허무주의, 마약 확산처럼 부정적인 것도 있다.
내 안의 스타브로긴은 금기로 가득한 시대가 올지 모른다고 냉소적으로 내다본다. ‘감수성 운동‘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을 중요시한다. 인간은 비윤리적인 행위로도 고통받지만 무례함으로도 상처를 받는다.

새로운 도덕법칙은 개인윤리에서 사회의 구성 원리로 매끄럽게 이어져야 한다. 폭력을 줄이고 사회를 안정시켜야 한다. 개인의 선택과자유를 존중하는 계몽사상을 잇고, 고대 철학자들이 중시했던 공공선의 추구도 되살려야 한다. 그러나 번영과 성장이 사회 목표는 아닐 것이다. 어떤 폭력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 역시 공상적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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