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드러난 ‘높으신 분들의 연합‘은 이런 상상력 자체가 쓸모없음을, 아예 다른 세계가 있음을 증명했다. 어찌어찌 특목고에, 명문대에 진학하는 것만으로 경쟁은 끝나지않는다. 그건 시작일 뿐이고, 격차는 그 안에서 다시 ‘사람의 급에 따라 천지 차이로 벌어진다.
가난한 가정에서도 자녀 교육만큼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웬만한 중산층도 자녀를 학원에 보낼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제법 끙끙거린다. 하지만 정말로 성공하는 사람들은 돈만 있지않다. 높은 지위에서 맺을 수 있는 인간관계를 총동원하여 좋은결과를 도출한다. 사회적으로 맺은 인연을 마치 돈처럼 사용하는 셈인데, 밤낮없이 부모는 돈 벌고 자녀는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는 가정에서는 결코 구할 수 없는 일종의 ‘사회적자본‘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라는 사실은 세상 이치지만,
너무 높게 날고 있는 모습을 눈으로 마주하는 것은 정말 괴로운일이다.
이런 사회적 문제는 쉽게 조정되지도 않는다. 고교 블라인드제가 효과가 없는 이유다. 출신 학교의 후광효과를 방지하고자 수시전형에서 학교 이름을 가리곤 있지만, 서울대 수시 최초 합격자 수 상위 30위 안에 일반고는 한 곳도 없다. 학교 이름을 감춘들, 그 학교에 들어갈 만한 이들이 지닌 화려한 생애과정이 숨겨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각종 공모전이니 표창 경력 등을 기재하지 않도록 하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런 걸 받는 이들은 굳이 서류로 증명하지 않더라도 말하는 게 이미 다르다. 몇 가지 질문에 답하는 것만 봐도 높은 수준이 확연히 드러난다. 사람들은 이 차이에 대해, 객관적인 능력의 차이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한다. 능력의 차이를 야기한 계층이나 부모의사회적·경제적 지위는 없는 셈 친다. 블라인드 테스트가 오히려차별을 정당화해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불평등은 어떤 단계를지나쳐 버리면 무슨 수를 쓴들 그 간극이 좁혀지기는커녕 더 벌어질 뿐이다.
조국 사태 당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가 몇차례 있었다. 언론은 대학생들이 공정에 분노했다면서 보도하기 바빴지만, 이들 대학을 제외한 다른 학교 학생들은 별로 동참하지 않았다. 그 청년들의 눈에는 이른바 명문대라고 하는 곳에 다니는 학생 역시 ‘그들만의 리그‘를 충실하게 살아온 이들로비춰졌기 때문일 거다. 사실이 무엇인들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없다. 좋은 환경에서 자랐기에 공부도 잘할 수 있었을 명문대생들이, 평소 다른 청년들에게 박탈감을 느끼게 했을 그들이 갑자기 정의를 외치며 자신들의 소외감과 억울함을 호소하니 어찌공감할 수 있겠는가. 명문대 학생들의 스펙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리더십 캠프, 해외 봉사 활동 등의 기회는 결코 누구에게나열려 있지 않다.

공정한 불평등이라는 착각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자신이 직접 3루타를 친 것처럼 생각한다."
능력주의가 공정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현이다.
집안의 경제력이 능력으로 이어진다는 연구 결과는 차고 넘친다. 부모의 자산이 클수록 자녀는 보다 경쟁력 있는 학교에 다닌다. 자녀를 공부시키려면 대치동이나 목동에 살아야 한다고들 하는데, 그 동네 아파트값은 확인할 때마다 숨이 막힐 정도다. 부모의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자녀들은 품질이 뛰어나고 결과도 좋은 사교육을 받는다. 자식 잘 되게 하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비슷하지만, 한 달 사교육비 30만원과 300만 원이 같을리 없다. 이뿐이겠는가? 부모의 화려한 인적 네트워크는 자녀의생애과정을 훨씬 풍요롭게 한다. 방학을알차게 보내는 수준 자체가 다르다. 심지어 안정적인 생활에서 오는 부모의 건전한 생활 습관은 그 자체가 자녀들에게 훌륭한 모범 사례가 된다. 잘먹고, 잘 쉬고, 게다가 힘들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두께가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전문직이기 때문에 가능한 부모의 특별한 언어능력조차 자녀의인생을 좌우한다. 항상 궁금증을 가지는 태도, 그리고 이를 예의있게 질문하는 습관은 교사의 관심을 끌게 하니 말이다. 정리하면,뱁새와 황새는 많이 다르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자신의 성공을 운이라고 생각하라"는 말처럼, 3루까지 가 있는 건 우연이라 치더라도 3루에서 홈으로 들어가 득점을 올리는 것도 만만치 않다는 거다. 3루에 안착만 했다고 경쟁이 끝나는 게 아니다. 1루도 가지 못한사람에겐 부러운 고민이겠으나, 3루 주자는 나름의 긴장을 한다. 3루에 있다고 모든 주자가 홈으로 무사히 들어오지는 않는다. 타자가 힘없는 내야 땅볼이나 멀리 뻗지 않는 외야 플라이를 치면 3루 주자는 생사를 걸고 달려야 한다. 슬라이딩을 해야하고 포수와 충돌하는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 상황이 9회말 투아웃에 벌어진다면 주자가 팀의 승패를 좌우한다. 자신이 대주자로 투입되어 실제 시합에 참여한 건 몇 분에 지나지않을지 모르겠지만, 그날의 주인공은 마지막 결승 득점을 올린그 선수다. 게다가 부상이라도 입었다면 온갖 스포트라이트를받을 수밖에 없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할 거다. "이 한 번을 위해서 지금까지 흘렸던 엄청난 땀이 있었습니다. 매일 훈련, 또훈련했죠. 기회가 왔고 제가 잡았습니다!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가능했습니다. 역시 땀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능력주의의 모순은 여기서 등장한다. 3루까지 어떻게 갔는지는 잊게 하고, 3루에서 홈까지 들어온 능력만이 주목받는다.
멋진 슬라이딩을 하느라 더러워진 유니폼이 노력의 증거가 되면서, 전체 판에 흐르고 있는 불평등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린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부단하게 ‘공정한 불평등‘은 사회를 더이롭게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들의 눈에 입시 비리 뉴스에나오는 내용들은 3루 주자가 반칙을 해서 홈으로 들어온 ‘나쁜불평등‘이지만, ‘법만 어기지 않았다면‘ 능력에 따라 결과를 얻고 보상을 차등적으로 받는 것은 그 자체가 누군가에게 동기부여가 되기에 ‘좋은‘ 불평등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동기부여하는 시스템이 이미 불평등한데, 좋은 불평등이니 나쁜 불평등이니 하는 구분이 그렇게나 쉬울까 모르겠다. 물론 개천에서살다가 용이 된 사례를 내밀며 ‘아직 세상은 정직하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모든 통계는 개천이 그 자체로 불리함을 증명한다. 3루까지 남들보다 안정적으로 간 사람이 잘못된 것도아니고, 그 3루부터의 여정이 쉬웠다는 것도 아니다. 노력 끝에홈으로 들어온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게 3루에서 시작했기에더 ‘유리했다는‘ 사실을 감출 순 없다. 3루까지 가다가 아웃당한아무개와 출전도 못해 유니폼이 깨끗한 누구를 보고 ‘노력 부족‘
이라고 비난할 이유가 될 수 없다.
‘한국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강연을 다니다 보면 "자본주의라는 체제 자체를 없애는 것이 훨씬 빠른 해결책 아닌가요?"라고 묻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때마다 주변인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냐
면서 쳐다본다.약간 과격한 주장이긴 하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등장이 고작 몇백 년 전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판을 원래 그런 것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고정관념인 것도 사실이다.

철학자들은 ‘변화하려는 세상의 성질‘을 변증법을 통해 설명했다. 변증법은 ‘정‘(正)이라는 원래 상태가 ‘반(反)이라는 다른 패러다임과 다투다 ‘합‘(合)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등장으로이어진다는 역사의 이치다. 과거엔 노예제도와 신분제도를 우주의 질서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 당시에도 세상은 꾸준히 꿈틀거렸다. 무엇을 타파해서 무엇이 등장했고, 또 그걸 타파해서 다른 사회가 등장한 건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니 "자본주의를 뜯어 버리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자."라는 고민을 무조건망상이라고 볼 순 없다.
내 의견을 굳이 말해야 한다면, 내 답은 거기까지 가지는 않는다. 권력에 무소불위의 힘을 주지 않고, 커다란 자본주의 체제안에서 사회주의적 속성을 현명하게 응용하면 지금보다 더 좋은 사회가 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이 답이 그게 가능해서인지, 아니면 그것 외에는 불가능하기에 떠올린 별수 없는도달지인지 묻는다면 솔직히 당당하지 못하다. 내 생각은, 그게유일한 방법 아닌가 하는 현실적인 체념의 연장선일지 모른다.
주눅 들어 있음에도 들키지 않으려는 내 강박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알면서도, 역시나 자본주의만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유일한 체제라고여기는 사람이 절대다수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늘이 허락한 만큼만, 주어진 팔자대로만 살아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평생 비슷한 집단의 사람들만 마주 보고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피라미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 한 단계 상승할 때마다 삶이 달라지리라는 기대를신분이나 지위 따위에 구애받지 않고 남녀노소 꿈꾸게 한 체제는 인류 역사상 자본주의가 처음이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건방진 포부는 그동안 금기였지만, 자본주의는 ‘희망‘을 개인에게 선사했다. ‘상상‘을 가능하게 했다. 사람들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겠다는 각오로 버틴다. 내일은 오늘과 다를것이란 기대로 고통을 참는다. 그결과 불평등을 진제한 자본주의는 ‘불평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각오를 다진 개인들 덕분에맹렬히 전진했다.
우리는 일곱 번 넘어져서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껐다. 우리의 ‘정의‘ 관념은 이런 적자생존의 법칙 위에서 빚어졌다. 사람들은 ‘정의‘를 모두가 동등하게 실질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누린다는 측면이 아니라, 노력의 크기에 따라 각자 도달하는 지점이 불가피하게 달라지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결과가 불평등해도 노력한 만큼이니 공정하다 여겼다.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형태를 갖춘 근대 공교육은 ‘공정한 불평등‘ 논리를 부단히 가르쳤다. 계급과 상관없이 누구나 학교를 다니니 기회는 평등해졌다고 포장했다. 그러니 시험 결과에 승복하라고 주술을 건다. "결과로 증명하라!"라는 말이 부유하는 세상에선, 결과를 의심하는 건 공정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조국 사태는 이 판이 깨진 게 아니다. 이 판의 정밀함, 견고함, 그리고무서운 폭력성이 고스란히 드러난 일이었다. 불평등은 자본주의사회의 부작용 정도가 아니라, 매우 정교한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매일 속고 있다.

세상이 나를 보고 ‘사회가 그깟 글 몇 자로 바뀐다고 생각했어?‘라면서 비웃는 것 같았다. 그만큼 사회구조적인 모순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기 때문일 거다. 그러니 구체적인 정책을 만들기 위해, 관습적인 나쁜 문화를 뿌리째 뽑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특단의 조치를 고민해야 하는 건 분명하다.

결국 ‘나쁜‘ 뉴스는, 나쁘기에 멀찍이 비켜서서 겉만 핥으며 잠시나마 씩씩거리는 용도에 지나지 않게 된다. 비일상적인불행이 익숙해져도, 익숙해진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꼴이다. 이와 비례하여 사회구조라는 거대한 덩어리는 원래의 속성이 더 강화되고 더 무시무시해지며, 그 위압감에 평범한 개인들은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철학만으로 살아가게 된다.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이 사회는 사람이 만든 거고 그걸 바꾸는 것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주하기 싫어도 마주해야 변화가 가능하다. 일단 화들짝 놀라고, 아직도 이런일이 있냐고 탄식하고, 피해자를 추모하고, 재발 방지를 모색하는 고민의 연속만이 사회를 움직인다. 교통사고 사망률이 이런관심으로 줄어들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이 좋아진 거와 상관없이, 여전히 세상이 엉망이라고 여겼기에 조금이나마 나쁜 수치가 줄었다. 염세적이고 비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건 아닐까 하는 괜한 성찰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사회의 슬픔은 조금이나마 줄어들 것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의 민낯에 익숙해지지 말자고 다짐한다. 안 그래도 사회가 엉망인데, 굳이 무거운 이야기로 사람들의마음을 스산하게 만들 필요가 있냐고 속삭이는 내 마음속 어딘가의 흐트러짐을 다잡는다. 지금 여기의 모습은, 우리의 결과다.
다시 우리가 원인이 되어야, 사회는 변한다.

익숙해지지 말자. 누구 말대로 좋은 사람이 돼야지.

왜 박정희 대통령을 악마처럼 묘사했냐‘며 편향되었다고 지적하는
식이다. 그러면서 그 시절을 모르는 청소년들이 "균형 잡힌역사관"을 가지는 걸 방해한다고 덧붙인다. 과연 그러한가?독재라는 명확한 나쁜 사실을 말할 때 독재 과정에서 발생한좋은 업적을 함께 따지는 게 공정한 태도인가? 온갖 부정선거를 일삼으며 헌법을 바꾸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정치인을, 장기 집권을 하겠다는 정치인과 그 주변 권력을 비판하는 것에도 균형이 필요할까? 독재는 했지만 경제는 발전시켰다. 독재는 독재고 경제는 경제 아니냐는 표현은 여전하다. 그런 기계적인 균형 감각이 정치인 박근혜의 성공과 몰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걸 누가 부인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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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이다. 대학 캠퍼스 안의 수십 개 화장실 중 한 개가 모두가 이용 가능한 화장실이 되었을 뿐이다. 대단한 변경도 아니고, 일반적인 화장실의 공용 공간을 없애서 내부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혼자 화장실을 이용하는 형태일 뿐이다. 쉽게 말해 ‘커다란 1인 화장실‘ 안에 세면대도, 기저귀 교환대도, 장애인을 위한 시설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걸마치 성 소수자만 사용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성별 구분에 따른 화장실 이용‘이 편리했던 사람들이 방해를 받는 것처럼 의심한다.
어떤 방해도 없다. 화장실 가고 싶을 때 거리낌 없이 화장실에 갈 수 있던 사람이라면, 평소와 다름없다. 원래보다 불편해진경우는 없고, 이래저래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원래의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덜어 낸 소수가 생겼을 뿐이다. 이 변화를 격려해서 확장시켜 나감이 마땅하지, 기울어진 기본값의 수정을 혼란으로만 여겨서야 되겠는가.

한때의 착각이면 괜찮다. 상식적인 세계는 틀린 생각을 고칠 기회를 개인에게 자연스레 제공한다. 우물 안 개구리 시절은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니 우물 밖을 경험하며 견문을 넓히면 될일이다. 문제는 우물의 깊이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데 있다. "어릴 땐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이젠 아니다."라는 흔한 성찰에는 성장하면서 자신과 다른 계층을 자주 접할 수 있다는, 즉 사회의 계층 간 교류 및 이동이 활발하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아니라면? 편견은 끊임없이 확신이 되어 누구를 공격할 이유가 된다.

이처럼 한국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물을 더 깊이 파야한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 이르면 내부의 담벼락이 너무 높아외부 세계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엘리트는 많은것을 결정하고 다수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인데, 그 엘리트의 세상 보는 눈이 편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의사는사례일 뿐이고, 핵심은 ‘같은 생각을 오랫동안 지닌 집단‘이 견고해질 때의 위험성이다. 이들이 휘두르는 창은, 공정한 창이 아니다. 게다가 본인들은 매우 공정하다고 여기기에 누가 창에 찔린들 관심이 없다. 이게 엘리트만 해당하는가. 통하는 게 많아끼리끼리 결집하며, 독선으로 무장한 집단은 무수하다.
그런데 방패가 튼튼하다면 부당한 창이 사람을 찌르지 못할 거다. 방패는 편협하고 독단적인 생각이 사회를 관통하며 자유자재로 날뛰는 것을 막아 준다. 인문학이 중요하고 사회 비판이 필요한 이유다. 

그렇기에 맥락을 뒤집어 지금과는 다른 사회를 상상해 본다. 사람들이 지금처럼 전투적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면 어떨까?
가령 소득 격차가 줄어드는 것에서 출발해 보자. 취업 경쟁 완화, 입시 교육의 부담 경감, 전인교육 확산 등 변화는 연쇄적으로 이어질 것이다. 입시가 중요하고 취업이 시급해 늘 추상적으로만 인권을 배워 왔고 그 결과가 걱정이라면, 무엇을 손봐야하는지는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면 과격하고 무례한 언행이 설 곳은 점차 사라지고, 언론도 자신들의 자극적인 뉴스를부끄러워하지 않을까? 이런 배경이 뒷받침되어야 인터넷 세상도 달라질 텐데, 그것보다 인류가 화성에 가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이러나 저러나 암담하다.

스포츠계의 괴기스러운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제 대회 성적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흥분하는 사회가 원인이었음을간과해선 안 된다. 이 과잉된 감정에서 엉터리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연장되었으며,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최숙현 선수는 전전긍긍하며 끝내 기댈 곳을 찾지 못했다.

고용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3년간(2018~2020년) 건설 현장 산재 사망사고에서 하청업체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55.8%였다. 주목할 것은 공사 규모 120억원 이상의 건설 현장에서는 이비율이 89.6%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길을 가다 쉽게 볼 수 있는대단지 아파트 건설 현장이나 조선소처럼 규모가 큰 산업 현장에서 죽는 사람은 대부분 하청업체 소속이라는 말이다. 이유는안전시설을 갖추지 않았거나 지침을 준수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으로 안전시설을 갖추면 적자이고, 지침을 다 지키다가는 공사 기간이 늘어나 역시나 적자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이들은 떨어지고, 깔리고, 끼여서 죽는다. 50~60년 전이라면 아파트 짓다가 간혹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2022년이라면 아니다. 

5층짜리 건물을 해체할 땐 위에서부터 부수고, 치우고,
부수고, 치우고 해야 한다. 하지만 시간을 아끼기 위해 1층의 기둥을 부숴 건물이 중심을 잃고 저절로 무너지도록 한다. 업계용어로 ‘꺾기‘라고 하는데 4~5일 걸릴 일이 하루 만에 처리된다.
광주의 건물도 그 방법으로 철거되다가 예상하지 않은 방향으로 무너졌을 뿐이다. 예측이 아예 불가능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정교하게 현장을 살펴볼 전문가를 고용할 여력이 없다. 임금이 낮고 현장은 위험하니, 숙련된 노동자들이 외면하는 것은 당연하다. 안전 불감증이라고들 하는데, ‘불감‘하다고 느낄 사람도없고 느낀들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만 그나마 현장이 굴러간다.
사고는 인재지만, 그 인재가 사회와 무관한 경우는 없다.

김훈 작가는 위험의 외주화를 이렇게 표현한다.

이윤은 나에게 불이익은 너에게, 안전은 나에게 죽음은 너에게, 건강은 나에게 골병은 너에게. 죽음, 위험, 골병은 따로 모아서 남에게. 이것은 생산력 강화가 아니고 경영합리화가 아니고 일자리창출이 아니다. 이것은 약육강식이다. ‘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2021)는 노동 양극화를선명하게 다룬다.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하청업체 직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작업 전에 함께 모여 손을 모아 ‘안전제일‘을 외치는 순간을 말하고 싶다. 외치기는 외치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고 자세는 흐느적거린다. 안전이 중요한 건 알지만, 실제는 전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는 걸 본인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듯보인다. 그러니 그 구호는 무엇보다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면서기본에 충실하자는 게 아니라, 오늘도 운 좋게 살아남자는 불확실한 기도에 불과하다. 

현실은 어떠할까? 영화처럼 야비한 질문을 직접적으로 던지는 경우는 드물겠지만 직장에서 그토록 강요하는 이윤은 누군가가 목숨을 건 대가로, 담보로 발생한다. 노동자들의 안전을보장하고 제대로 된 대우를 하자고 하면 누구든 동의한다. 그러나 "성과급을 줄이고 하청업체 몫을 늘리는 데 찬성하시나요?"
라는 질문에는, 노동자들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올 것이 쉽게 예측된다. 위험의 외주화는, 누군가에게는 위험이지만 누군가에는 엄청난 이득이다. 이처럼 산업구조의 변화는 함께 을이었던 노동자들을 병, 정, 무로 더 세분화시키며연대를 무용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세상은 이 반대에 관대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시절 산업재해 현장을 찾아가 ‘이건 개인 실수‘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이 발언이 당선에 별 영향을 주지도 않았다. 일부 정치권과 언론들은 중대재해처벌법이 ‘없어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고 ‘있으면‘ 이러쿵저러쿵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말만 반복한다. 하지만 그 문제가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덜 죽을 수 있는 이득과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인지 의문이다. 이런 인식이 사람과 보너스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만 넘쳐 나는 곳에서 억울한죽음은 참으로 서글프다.

가난이 죄책감이 되지 않기를

성북 네 모녀의 무연고 장례식장에 붙은 포스트잇에 적힌 글귀였다(천민아 기자,
성북 네 모녀, 무연고 장례…마지막은 외롭지 않았다. <뉴시스》, 2019. 12, 10.). 가난을 구원의 대상으로 여기는 선별적 복지 패러다임은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자신의 비루함을 증명하길 개인에게 강요한다. 생존을 위해 매번 스스로의 존엄성을 파괴해야 한다면 그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사회의 존재 이유를 상식을 지킬 토대를 개인에게 제공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홍익인간 정신이 널리 퍼지기 위해서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더불어 국가에 대한 믿음이필요하다. 국가가 모두에게 부귀영화를 보장해 주는 건 아니지만 ‘누구라도‘ 깊은 수렁에 빠지지 않게 지켜 줄 것이라는 견고한 믿음 말이다. 이게 없다면 사람들은 ‘각자도생‘이라는 위험하고 차가운 철학으로 살 수밖에 없다.
펴새 모스 서시

취약 계층으로 인정받은 사람만을 돕는 선별적 복지 시스템에서는 자격 심사에서 살아남은 자만이 계속 삶을 유지할 수있다. 생존을 위해 더 처절해지고 비굴해져야 하니, 자존감이 추락한다. 이런 과정이 싫어서 신청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신청주의 복지 제도는 필연적으로 부정수급자가 존재하고 또 이를 찾아내라는 민원이 빗발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복지 대상자를 선별하고 검증하는 데 드는 비용이 더 낭비 아니냐는 지적이 등장한다.

보편적 복지란 일상의 ‘공공성‘을 강화하지 않고서는 빈곤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얼음에 빠진사람을 구하는 노력만큼, 얼음판 두께를 탄탄하게 만드는 접근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사람을 찾아내는 것보다, 최저임금을 현실적으로 인상하고 사업주가 이를 잘 준수할 환경을 만드는 일이 ‘무너지는‘ 사람을줄일 수 있다는 논리다

2021년 서울시의회는 ‘시민의 삶을 바꾼 최고의 조례‘를 투표한 바가 있는데, 무상급식 조례가 1위로 선정되었다(정식 이름은 ‘친환경 학교 급식 등 지원에 관한 조례‘로 2010년 12월 제정되었다)

사람들은 무상급식 논쟁을 통해 지금까지 당연하다고만 여겼던 선별적 복지의 문제점을 이해했고, 보편적 복지가 왜 시대적  과제가 되었는지를 깨달았다. 제도 하나가 던진 질문이이토록 철학적이었으니, 본인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와 상관없이 삶을 바꾼 경험으로 기억되지 않았겠는가.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를 읊어 본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누구나 ‘자유롭게 살 권리‘와 누구도 ‘존엄한 권리를 침해받지 않을 정의‘가 상호 보완적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시장경제가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운영될 때 가능하다. 장사는 누구나 해도되지만, 장사를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 아니다. 근로시간, 최저임금 등 지켜야 할 것이 많다. 당연히 아무거나 팔 수 없다. 그자유가 누군가의 존엄성을 파괴한다면 국가는 시장의 자유를규제한다. 그게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인들, 기업의 명운이 걸린것인들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다.

한국에서 ‘규제‘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 덫인 양 부정적으로해석된다. 기업인은 대통령을 만나, 상품을 승인받기까지 제출해야 할 서류도 많고 기준도 까다로워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면 언론은 이 고민을 빨리 해결하는 일이 옳은 것처럼 포장하고, 공무원의 원칙적 행동을 늦장 태도라고 비판한다. 그사이 수십억 원이 증발한다고 겁을 준다. 물론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못한 쓸데없는 기준을 가려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규제를 무작정 ‘낭비‘라고 보는 게 과연 공동체에 이득이 될까?
마지막으로 국가에 대한 신뢰가 깨질 때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짚어 보자. 국가를 믿고 상품을 구매할 수 없으면불안하고 혼란하다. 

공개되어야 할 사생활이란 없다. 개인의 이야기는 개인 밖으로 나가는 순간 어떻게든 오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비상시국에는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비상일수록 제한된 정보만으로 믿고 싶은 대로 믿어 버리는 사람들은 많아진다. 코로나는, 헌법이보장하고 있는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가 대한민국에서 엉성하게 활용되고 있음을 드러냈다. 법은 잘못한 게 없다. 사람들의조급함이 누군가의 권리를 무시했을 뿐이다.

6·25 전쟁을 분기점 삼아 사회의 변화를 설명하는 무게감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 한국은 외환 위기이후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더 나빠졌다. 외환 위기는 급속한 경제성장의 결과였는데 (재벌이 관과 밀착해 은행 돈으로문어발식 확장에 몰두하다 유동성 위기가 오자 한계상황에 이르러 줄줄이파산했다), 이를 극복하는 속성 치료법은 기존의 성장 일변도의그릇된 패러다임을 수정하는 게 아니라 더 강화시키는 방식이었다. 불에 기름을 부은 셈이었다. 노동자들을 자유롭게 해고해야 기업이 살아남는다, 그러니 비정규직이 많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당당해졌다.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다는 걸 인정하자는 거였다. 양극화는 선명해졌다. 개천 출신의 용은 판타지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잘못되면 끝장이라는 절박함과 나부터 살고 보자는 강박이 한국인을 지배했다. 이게 잘못된 거라고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과거보다 패배감을 빨리 접하게 되었다. 여기에 비례하여 체념하 는 시기가 빨라졌다. 같은 자본주의지만, 그 자본주의의무서움을 느끼는 사람이 훨씬 많아진 셈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공동체는 집단 그 이상의 의미로 확장되지 못하고 연대 의식은파괴된다. 양극화의 민낯이 드러난 이상, 안정적인 직업을 보장하는 바늘구멍을 통과하려는 자들은 넘쳐 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누구는 오랫동안 경쟁해야 하고, 누구는 일찌감치 경쟁을 포기하게 된다. 전자는 후자에 대한 편견을 굳힌다. 앞으로 "젊을때 공부 안 하더니"와 같은 혐오의 표현은 "저 인간은 초등학생일 때 공부 포기했지"라면서 더 섬세해질 것이다. 이는 노력도하지 않은 인간을 왜 사회가 책임지냐는 빈정거림이 되어 제대로 된 사회 안전망이 설계되고 안착되는 걸 방해한다. 공동체는 ‘어쩌라고?‘라는  냉소 앞에서  갈기 갈기 찢어질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흔적도 없이.
외환 위기 이후, 각자도생의 법칙이 만병통치약이 된 이유는 사회가 ‘살아남은 자‘에게만 주목했기 때문이다. 바늘구멍이좁아지면 구멍을 넓히는 게 지당하지만, 사람들 사이에는 ‘구멍을 통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만 무성했다. 위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변화에 얼마나 유연할 수 있는가를 강조하면서 마치 모두가 생존 비법대로 행동하면 살아남을 것처럼 떠들었다. ‘살아남는 법만 부유하는 사회에서는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없다. 그래서 공동체의 토대가 푸석해져도 이를 공론화하지 못한다. 지금은 다른가?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누구든지, 무엇이든 다운로드한다.
끔찍한 영상과 사진으로 ‘헤비 업로더‘가 되어 돈을 긁어모으는구조를 한국 사회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저 ‘일부 어둠의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여기던 것이 이토록 광범위하게일상을 파고든 일종의 ‘산업‘이 되어 버릴 줄 어떤 전문가도 예상하지 않았다.
지금은 ‘한 번쯤‘으로 끝나는 게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더빨리 접하고, 더 오래 머무른다. 수요가 형성되니 공급은 자극적으로 변한다. 돈을 쓰겠다는 이들 앞에서 돈을 벌겠다는 이가이것저것 고려할 틈은 없다. 고객을 뺏기지 않으려고 끊임없이신제품을 개발하는 시장의 논리와 비슷하다. 연기자들의 합의된 성관계인 예전 포르노는 상품성이 없으니 ‘리얼리티‘가 이를대체한다. 연인 사이의 은밀한 동영상이 유출되고, 몰래 찍은 영상들이 공유된다. 사람들은 연기자가 아닌 피해자를 감상한다.

이런 무대 위를 부유하는 ‘태아도생명이다‘라는 말은 임신·출산의 당사자만이 겪는 복잡한 경험과 혼란한 심리 상태를 생명윤리 문제로 쉽사리 응축시켜 버리는 다분히 사변적인 주장일 뿐이다. 사변적이라는 건 경험에 의하지 않고 오직 생각에만 의존한다는 것인데, 왜 이런 표현을 했는지는 단박에 설명할 수 있다.

낙태를 ‘웃으면서‘ 하는 사람은 없다. 태아가 잠재적 생명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낙태 찬성론자‘는 단언컨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 가치관이 당사자로 하여금 원치 않는 임신을 지속했을 때 닥쳐올 상황의 무게감을 고민하는 걸 멈추게 하지 않는다. 임신과 출산은,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할 사람의 문제다. 자신의 신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즉 임신유지와 임신 중지 가운데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한 인간의 생애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여기엔 경제적 요인은 물론 개인의 사회적 위치, 미래에 대한 계획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복합적이니 더더욱 단순하게 생각하기 어렵다.
추사 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내뱉는 말 가운데 고정관념을 전제한 표현이 많다. 고정관념이 강할수록 표현은 매우 즉각적이며, 때로는 공격적으로 표출된다. 공공장소에서 아이의 소란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엄마는 뭐 하는거야!" 라며 화를 내는 경우를 보자. 이게 가능하려면 세 가지고정관념이 견고해야 한다.
우선, 아이에게 반드시 ‘부‘나 ‘모‘가 있을 거라는 건 모두가 정상가족이라 불리는 가족형태 속에서 살고 있다고 여겨서다. 최근 ‘학부모‘라는 표현을 ‘보호자‘로 바꾸자고 하는건 이런 기본값에 대한 성찰이다.
두 번째 고정관념은 십중팔구 ‘엄마부터‘ 떠올리는 시선이다. 육아의 일반적인 모습이 특정 성별에게 치우쳐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인식일 거다.
마지막은 그 엄마를 찾는 격앙됨에 있다. 정말로 엄마를 찾아 주
려는 안쓰러운 마음이 아니라, ‘도대체 엄마란 사람이!‘라는 위압스러운 태도가 드러나는 게 다반사다. 엄마가 자기 역할 못했으니 욕먹어도 싸다는 식인데, 이 편견 안에서엄마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은 티끌만큼도 인정받지 못한다.
이런 정상가족 신화와 기-승-전-엄마 책임론이 팽배한 세상에서 
‘낙태‘는 개인 신체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철학적 논의로 넘어가지 못한다. 고정관념을 도덕으로 포장하는 사회제도를 비판하는 단계로 이어지지 않는 것도 물론이다.
여성을 사람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성별과 그에 어울리는 역할을 잘 수행하는지에 따라 판단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출생률이 낮다는 이야기가 거듭되다 보면 항상 "요즘 여성들이 이기적이어서 출산을 피한다"는 식의 망언이 등장하는 것을 보라.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박근혜 후보, 그리고 202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윤석열 후보의 배우자는 "출산 경험도없는데" 하는 식의 말을 들어야 했다. 원시적인 상상력이 여전히 한국 사회를 떠돌고 있다.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는 어떻게 변했을까? 초등학생이 ‘생존 수영‘을 배우는 모습을 보니 우리가 안전 문제에 예민해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수영을 못해서 그 난리가 난 게 아니다.
안전보다 효율을 우선시하면서 공적 가치를 의미 없게 여기는가치관이 사라지지 않는 한 ‘변했다‘고 하기엔 너무 이르다. 세월호 참사는 돈만을 향해 맹렬히 진격하는 마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나
절벽으로 떨어진 것과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이라는 배를 향한 자화자찬은 많았지만, 사람들은 허술한 배 위에서 파도가 칠 때마다 불안했다. 그런데 진짜로 ‘이윤과 효율‘에 미쳐 있던 배가 침몰했다.
우리의 추모에는 이 잘못된 시스템에 대한 경고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먹먹하게 누군가의 죽음을바라볼 것이고, 또 그 죽음을 조롱하는 이들을 보며 역시나 먹먹해질 것이다. 지나간 일을 왜 그렇게 붙들고 있냐는 그 생각,
추모가 밥 먹여 주냐는 그 생각, 이왕이면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나는 그 생각이야말로 엉터리 시스템이 가장 원하는 결과라는걸 잊어선 안 된다.

이 정도면 언론 시스템이라는 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참사 당일, 구조에 투입된 잠수부는 단 16명이었다. 그런데공중파의 뉴스 헤드라인은 "육해공 총동원, 하늘·바다서 입체적구조 작업" (KBS 뉴스 9), "구조 작업 총출동, 함척 23척 · 병력 1천여 명 동원"(MBC 뉴스데스크), "혼신의 구조, 헬기에 함정에 어선까지" (SBS 8시 뉴스)였다.47 특종에 눈먼 취재진은 팽목항에서 생존자들을 괴롭혔다. 구조된 학생에게 "친구가 사망한 것 알고있나요?"라고 질문한 기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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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10월 항쟁
1946년 당시 38도선 이남을 통치하던 미군정은 일제가 전쟁 중 실시하였던 공출제와 배급제를 폐지하고 자유시장제를 채택하였다. 하지만 일부 악덕 상인의 사재기로쌀 가격이 3개월 만에 60배로 폭등하였고, 이에 미군정은 당황하여 다시 쌀을 강제로수집하고 배급을 부활시켰다.
하지만 강제로 쌀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경찰·공무원들이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고,시민들은 이에 반발하였다. 문제는 그 경찰과 공무원들이 대부분 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부 밑에서 일하던 친일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에 대한 불만은 고스란히 미군정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광복절 기념식에서 "저는 ‘건국 60년을 맞아 국가의 독립과 영토를 보전하고………"라고 말하였다. 2015년 박근혜 대통령도 "오늘은 광복 70주년이자 ‘건국 67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날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들의 발언은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의 출발인 ‘건국‘으로 삼겠다는 의도였다.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신격화하고 친일파를 건국 공로자로 둔갑시키려는 세력의 주장을대통령이 앞장서서 옹호한 것이다.
1948년 건국‘ 주장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문제가 있다. 1948년이 대한민국의 출발이 된다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역사 30년은 송두리째 사라진다.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단독 정부 수립에 불참한 독립운동가들은 ‘건국의 방해자‘가 되고, 단독 정부 수립에 협력한 친일 세력들이 ‘건국의 공로자‘가 된다. 이는 또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하는 대한민국의 헌법을부정하는 것이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은 "오늘은 광복 73주년이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 70주년을맞는 매우 뜻깊고 기쁜 날입니다."라고 말해 두 전직 대통령의 왜곡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았다. 치열하였던 독립운동의 역사를 부정하는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는 앞으로없어야 할 것이다.

여수와 순천을 되찾은 군인들은 14연대 봉기 군인들과 인민 위원회에 협력한 사람들을 찾아내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인과 경찰은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은 채 의심되는 사람들을 즉결 처분하였다. 군인과 경찰의 손가락질 하나면 사람이 쉽게 죽어 나감기에 그들의 손가락은 ‘손가락총‘이라 불렀다.
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피해 지역의 주민들은 큰 상처를 입었다. 14연대가 봉기하였을 때는 우파이거나 협조를 거절한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14연대 봉기 군인의가족이거나 빨치산에 식량을 제공한 사람들도 진압 군인들에게 처형되었다. 무엇보다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도 정당한 절차없이 희생되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은 한국을 철저한 반공 사회로 만들었다. 조금이라도 사회주의와관련 있다고 의심되는 사람은 ‘빨갱이‘라는 사회적 딱지가 붙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속에서 여수·순천 10-19 사건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의 유가족들도 숨죽이며 살아야 하였다. 2021년이 되어서야 ‘여수·순천 10-19 사건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었고, 진실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

재판도 없이 죄명도 묻지 않고 이렇게 죽인 것은 이건 사형이 아니고 학살이다. 이건 국법으로 사형을 시킨 것이 아니고 국민을 데려가 학살을 한 것이제 이건 국가의 죄다. 요것은 벗어 줘야 될 거 아니냐 그거여.
- 여수·순천 10-19 사건 당시 아버지를 잃은 박○○ 씨 구술

옛 대전 형무소에는 여수·순천 10·19 사건 관련자 등 좌파 정치범, 재소자, 사전구금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대거 수감되어 있었다. 6·25 전쟁 발발 직후, 대전이 북한군에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 형무소에 수감된 좌파 인사들이북한에 협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1,800여 명(최대 7,000명 정도로 추산)의 수감자를 인근 산내골령골로 끌고 가 학살하였다.
학살은 대전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고양 금정굴, 공주 왕촌리, 경산 코발트광산 등 전국 각지에서 많은 민간인이 대한민국의 군인과 경찰에 의해 학살되었다. 학살은 대부분 인적이 드문 산골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너 말조심하지 않으면 골로 간다."라는 표현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6·25 전쟁은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국제전이기도 하였지만, 알고 지내던 사람들끼리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한 마을 안의 전쟁이기도 하였다. 6·25 전쟁의소용돌이는 전라남도 영암의 구림마을 사람들도 비껴갈 수 없었다.
북한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에 사회주의자로 분류된 국민 보도 연맹원들과 평소에 좌파로 찍힌 사람들이 학살당하였다. 학살은 경찰과 지역 상황을 잘 아는 민간인에 의해이루어졌다. 이후 구림마을이 북한군의 영향력 안에 놓이자 이번엔 경찰과 경찰에 협력한 사람들, 우파로 분류된 사람들이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혀 학살당하였다. 하지만피해자들은 경찰도 아니었고 이전에 일어난 학살과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다.

정부 수립 직후인 1949년 3월 26일 오전 9시부터 중앙청 광장에서는 어떤 기념식이진행되었다. 사람들은 만세 삼창하였고, 집마다 태극기를 내걸었다. 이는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생일 기념식 풍경이었다. 놀랍게도 6·25 전쟁 중에도 이 기념식은계속되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할 때까지 이승만의 생일이 되면 서울 운동장에서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고, 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했으며, 밤에는불꽃놀이가 장관을 이뤘다. 경무대(오늘날 청와대)에는 여학생들을 데려와 이승만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특히 80세 생일이었던 1955년에는 특별한 행사가 많이 기획되었는데,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승만 기념 동상 제작이었다. 2억 656만 환의 경비를 들여 남산에 있던 일제가 세운 옛 조선 신궁 터에 약 24.5m(아파트 10층 정도의 높이)의 ‘세계 굴지의 동상‘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기념 동상 건립은 80살 생일을 기준으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자는재출발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리하여 10월 3일 개천절에 기념 동상 건립 기공식을하고, 다음 해 광복절에 건립 준공식(제막식)을 하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날짜를 이렇게 잡은 것은 이승만이 조선 신궁을 철폐하고 새로운 나라를 연 사람임을 상징적으로보여 주려는 의도였다.
이승만 동상은 한복 두루마기 고름을 날리며 오른손을 들고 무슨 말을 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오른손을 들고 있는 것은 예전부터 황제를 상징하는 모습이었으며,승리한 장군이 취하던 자세였다. 한편으로 국내에 세워진 동상 중 오른손을 들고 있는것은 민중을 이끄는 지도자임을 의미한다. 왜 이런 모습으로 동상을 만든 것일까?
동상 건립 1년 전인 1954년은, 이른바 사사오입개헌으로 온 세상이 시끌벅적했던해였다. 억지 개헌으로 대통령의 정통성은 의심받았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믿음은 땅끝으로 추락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당은 돌파구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자유당은 장기 집권을 위해 이승만을 민족의 영웅이자 국가의 아버지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우상화 작업은 이승만의 호인 ‘우남‘이 들어가는 공원이나 기념관 건립, 화폐 제작 등으로도 이어졌다.

조봉암은 3·1운동과 6·10만세 운동, 신간회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순간도 서대문 형무소에서 맞이하였다. 이러한 이력을 발판으로 제헌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 개혁을 추진하여 농민들의 오랜 염원을 실현하면서 정치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이승만이 사사오입개헌으로 장기 집권 의도를 드러냈던 제3대 대통령 선거 때, 야당의 단일 후보는 민주당의 신익희였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로 돌풍을 일으키던 신익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조봉암은 뒤늦게 출마를 선언하였다. 짧은 선거 운동 기간, 여당과 관공서의 방해로 선거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음에도 조봉암은 유효득표수의 30%를 얻는 높은 지지를 받았다. 조봉암의 성장에 이승만은 정치적부담감을 느꼈고, 조봉암을 제거할 필요를 느꼈다.

1961년 5·16군사 정변을 주도하여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으로서 그해 11월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도중 일본에 들렀다. 그는 수상 관저에서 열린 만찬회에 초대받아 기시 노부스케와 만났을 때 다음과같은 말을 하였다.

경험도 없는 우리한테는 그저 맨주먹으로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의욕만 왕성합니다. 마지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청년 지사와 같은 의욕과 사명감을 품고 그분들을 모범으로삼아 우리나라를 빈곤으로부터 탈출시키고,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발언 속의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청년 지사는 누구를 말하는 걸까? 박정희 의장은 평소에 일본의 요시다 쇼인을 특별히 존경한다고 표현하였다. 요시다 쇼인은 서양처럼 힘을 기르기 위해 한반도를 점령하자는 ‘정한론‘을 주장하였던 인물이었다. 박정희는 왜 이러한 말을 하였으며, 그가 만난 기시 노부스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기시 노부스케는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이후 농상무성에서 관료로 일하다가 1936년 만주로 건너갔다. 그는 만주국에서 총무청 차장, 산업부 차장을 맡아 산업계를 주도하였다. 그에게 민주국은 국가가 경제 활동을 통제 · 간섭하는 통제 경제를기초로 한 이상적 일본을 위한 ‘실험 무대‘였다. 일본의 패전 이후 A급 전범으로 잠시복역하다 석방되었고, 나중에는 2대에 걸쳐 총리까지 역임하였다. 그는 정계에서 물러난 뒤에도 계속 배후에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쇼와시대)의 요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박정희 정권의 후견인 역할을 지속하였다.
1917 년에 태어난 박정희는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보통학교(초등학교) 교사로 복무하였다. 이후 혈서까지 씨가며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에 지원하였고, 1910년 교직을 그만둔 후 만주로 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특별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만주는 식민 지배로 벼랑 끝에 내몰린 청년들에게 ‘신천지‘ 혹은 ‘동양의 엘도라도‘로 여겨졌으며, 가난한 농촌 출신 박정희에게도 꿈과 희망의 무대였다.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를 이어준 것은 만주국에서의 인맥이었다. 1965년 한·일기본 조약 체결 당시, 일본의 외무상이었던 시나 에쓰사부로도 만주국에서 기시 노부스케 밑에서 일하였던 인물이다.
만주국에서 장교로 근무하였던 박정희의 경험은 이후 유신 체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대통령이었던 시절에 깊은 ‘인연‘을 맺었던 아베 신조전 총리 또한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이다.

아래 사진을 보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여성 노동자들이 눈에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수출 자유 지역을 정부가 주도한 산업화의 성공 사례로 홍보하였다. 그런데 마산은 부마 민주 항쟁 당시 노동자들의 저항이 거셌던 곳이다. 정부의 홍보대로라면 노동자들이 유신 철폐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마산수출 자유 지역은 정부 주도 산업화의 상징이 맞을까?
수출 자유 지역을 처음 구상한 것은 전국경제인연합회였다. 경제인들은 타이완의가오슝이나 홍콩의 사례를 들어 한국에도 수출 자유 지역을 설치하자고 제안하였다.
박정희 정부가 이를 수용해 수출 자유 지역 설치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투자할미국 등 외국의 대기업을 찾기 어려웠고, 주로 전자·기계·금속 등 노동집약적인 일본 중소기업 공장들이 자리 잡았다.
그럼 정부가 홍보한 대로 ‘수출 증진과 고용 증대‘는 이루어졌을까? 일단 수출량은예상만큼 늘지 않았다. 타이완의 수출자유지역과 비교하였을 때 마산의 수출량은 형편없었다. 정부의 기대만큼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수출 자유 지역을 향한 관심과 지원은 자연스레 시들해졌다.
노동자들의 형편은 더 나빴다. 정부는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해 노동자들의 권리를 제약하였다. 노동조합 설립 자체를 제한하였고, 만약 노동조합이 생겨도 노동 쟁의는 불가능하였다.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 조건을 감당해야 하였다. 더 큰 문제는고용 불안이었다. 1972년부터 적자 사업체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휴업과 공장에서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제1차 석유파동 직후부터는 휴업하거나 폐업하는 회사가 속출하면서 ‘해고 선풍‘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마산 지역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은 짙어져 갔다.
1979년 부산에서 유신 철폐와 독재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시작된 지 이틀 만에 마산에서도 유신 반대 시위가 전개되었다(부마 민주 항쟁), 퇴근하던 노동자들은 거리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파출소를 불태우는 등 과격한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1970년대 말 전국 평균과 비교할 때, 마산의 임금은 낮았고 실업률도 높았다. 박정희정부의 경제 실패가 노동자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의 폭력에 희생된 노동자가 유치준이었다. 유치준은 수출 자유 지역의 하청 건설 노동자로,
퇴근하다가 시위에 휩쓸렸다. 그는 경찰의 폭력으로 쓰려졌고, 사망의 원인이 은폐되었다가 40년이 지난 후에 공권력에 의한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유치준의 죽음은 박정희 정부가 홍보한 것처럼 수출 자유 지역이 한국 경제 발전을이끌었다는 상식이 실제로 맞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김경숙은 YH 무역의 노동자였다. 그는 1979년 8월, 고의로 공장 문을 닫고 월급을떼먹은 회사와 싸우다가 동료 ‘여공‘들과 함께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당사에 들어가농성하였다. 그러나 안전지대라 생각했던 제1야당의 당시를 경찰이 새벽에 습격하는만행을 저질렀고, 강제 진압 과정에서 그는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죽음을 슬퍼해 줄동료는 다 잡혀가 철창에 갇혀 있었고, 가족은 경찰의 방해로 제때 올 수가 없었다. 그의 장례식장이 적막하였던 이유이다.
김경숙의 죽음에 신민당이 강력히 항의하자, 여당은 10월 4일 야당 총재인 김영삼의 국회 의원직마저 박탈하였다. 10여일 뒤 대규모 시위가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다. 이 시위가 바로 부마 민주 항쟁이다. 부산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시위에 다른 대학 학생과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시위대는 수만 명에 달했다. 파출소 11개가화염에 휩싸이고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태워질 정도로 시위는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항쟁은 인근 도시인 마산으로 번졌고, 정부는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탱크가 부산 시내 곳곳에 배치되고 공수 부대가 투입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급하게 부산에 내려와 항쟁을 직접 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부산시위는 민란"이라며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박정희에게 보고하였다. 하지만 박정희는 버럭 화를 내며, "부산 같은 사태가 서울에서 일어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지."라고 소리를 높였고, 옆에 있던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하는 놈들 100만, 200만 명 죽인다고 까딱하겠습니까? 까불면 탱크로 싹 깔아뭉개버리겠습니다."라고 거들었다. 그때 ‘유신의 심장‘을 쏘는 총성이 울렸다.

1980년대 당시 가족법은 어땠을까? 해방 이후 만들어진 대한민국 법률은 여성에게매우 불리하였다. 이전 시대부터 이어진 남성 위주의 가족 관리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가족법은 가성의 주인인 호(戶)를 정해 호주에게 가정에 관한 모든 권리를 부여하였다. 이를 호주제라 한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남녀평등이 명시되어 있지만, 실생활에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남편이 사망할 경우, 여성이 생계를 책임지고 있어도 아들이나 손자를 호주로 삼아야했다. 이혼을 하면 호주인 전 남편의 동의를 받아야만 자녀의 각종 서류 등록이 가능하였다. 남편의 혼외 자식이 아내의 의사와 상관없이 호주가 될 수도 있었다. 자녀 양육권은 물론 상속에서도 남성이 여성보다 법적으로 우선권을 가졌다. 여성을 평등한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였던 이태영은 이러한 불합리한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여성은 판사가 될 수 없다‘라는 이유로 임용이 거부되는 등 차별을 몸소 겪어 왔다.
그는 1950년대부터 여성 단체를 조직해 꾸준히 가족법 개정 운동을 펼쳤다. 법 개정을위한 진정서 제출은 물론 여론을 모으기 위해 집회나 방송 활동도 함께하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상당 기간 우리 사회는 남성 위주의 사회 운영을 당연하게 여겼다. 대다수 사람은 가족법 개정 운동이 전통을 해친다고 여겼다. 특히 유교 문화를 지켜 가던 다수의 유림은 전통 수호를 외치며 대대적인 가족법 개정 반대 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족법 개정은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다.
이후에도 이태영은 1984년 ‘가족법 개정을 위한 여성단체연합‘을 결성해 서명 운동과 홍보를 이어갔다. 해방 이후 40여 년이나 지속한 이 운동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 1989년 가족법 개정이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사회 전반의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여성 차별 또한 개선되어야 할 문제로 인식된 결과였다.
가족법 개정으로 여성은 시민으로서의 온전한 권리를 획득하기 시작하였다. 여성이호주가 될 가능성을 높였으며, 이혼한 여성의 양육권과 재산분할권을 인정하였다. 성별에 따른 상속 차별도 개선되었다. 하지만 여성이 남자 호주에 편입되어야 했던 호주제는 2005년 헌법 재판소가 헌법 불합치 판결을 하고 나서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태영이 여성 운동을 시작한지 50여 년 만의 일이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에 각계각층에서 통일 논의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지만, 1년 뒤 5·16 군사 정변으로 모든 것이 막혀 버렸다. 이후 박정희, 전두환 정권 20여 년 동안 민간 차원의 통일 노력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나 머리에 뿔 달린 괴물들만 사는 줄 알았던 금단의 땅을 황석영, 문익환이 먼저 밟고, 그 뒤를 임수경이 따라가면서 통일의 길이 생겨났다. "한 소녀가 세상을 바꿀수는 없다."라며 임수경의 방북을 두고 당시 여당 대표가 비아냥거리기도 했지만, ‘창구 단일화‘의 이름으로 민간의 통일 운동을 차단했던 노태우 정부도 민간과 경쟁하지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사실 임수경이 참가한 평양 축전 개막식에는 노태우 정부의 대북 정책을 총괄하던 박철언 청와대 보좌관이 비밀리에 파견되어 있었다. 이후 평양과서울에서 남북 종교계 인사들 간의 만남, ‘통일 음악회‘, ‘남북 통일 축구 대회‘가 정부의 허가로 열리는 등 사회 각 분야에서 통일의 분위기가 높아졌다. 급진전한 남북 관계는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으로 이어졌다.
1989년 민간 차원의 방북 후 채 10년이 안 된 1998년 11월, 1,418명의 금강산 관광객을 태운 금강호가 동해항을 출발하여 북한의 장전항에 도착하였다.

할머니들은 일본 총리의 한국 방문에 앞서 첫 ‘수요 시위(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 시위‘를 진행하였다. 이후 한 주도 거르지 않고 30년 이상 계속하고 있는 수요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수요 시위는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는 공간이며, 자라나는 세대가 할머니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일본의 진심 어린 사죄와 배상을함께 요구하는 역사 교육의 현장이다. 두 손을 꽉 쥔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 정부의 사과를 꼭 받아내겠다는 의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왜 ‘위안부‘에 작은따옴표(")를 쓸까? 이유는 일본군이 할머니들을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당시의 역사를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범죄 주체인일본군을 앞에 붙여 일본군‘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정주영의 소떼 방북과 활발해진 민간 기업의 남북 경제 협력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가능하였다. IMF의 외환 위기 속에서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남북 경제 협력 활성화 조치‘를 발표하였다. 이 조치에 따라 대기업 총수와 경제 단체장의 방북이전면 허용되었고, 대북 투자 규모 제한과 생산 설비 대북 반출 제한 등이 폐지되었다.
정주영의 소떼 방북으로 본격화된 남북 간의 교류는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과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으로 이어졌다. 이후 남측이 자본과 기술을, 북측이 토지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개성 공단이 열리며 남북 간의 경제 협력이 본격화되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핵과 미사일 실험, 이에 따른 대북 제재로 남북 경제 협력 사업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남북이 자유롭게 오갈 날을 위해 남북 양측이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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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비석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최근 서울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의 암석 성분을 분석한 연구 결과 북한산의 돌이 아닌 경주에 분포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음이 밝혀졌다. 신라의 화강암으로 만든 비석을 새롭게 개척한 영토에 세움으로써 영토 확장의 상징적 의미를 더한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이 공들여 만든 비석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에게 점차 잊혔다.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가 세운 비석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다. 비석의 존재가 다시세상에 알려진 것은 19세기 활동한 실학자들에 의해서였다. 특히 추사 김정희는 비석에 새긴 문구를 연구한 끝에 비석을 세운 주인공이 진흥왕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김정희는 비석의 옆면에 자신이 비석을 보고 연구하였다는 기록을 남겨 놓기도 하였다.
비석에 신라의 역사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실학자의 역사 연구가 더해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비석에는 또 하나의 역사가 새겨졌다. 비석 곳곳에 6·25전쟁 중에 발생한 총탄의 흔적이 무수히 남겨진 것이다.

우리가 대동여지도」에 관해 잘못 알고 있는 사실도 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려고 백두산을 7번이나 올랐다느니, 세 차례나 전국 방방곡곡을 답사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인 1925년에 민족의식을 높이려고 신문에 처음 실렸는데, 계속 살이 붙어 하나의 신화가 되어 버렸다. 흥선대원군이 김정호와 그의 어린 딸을 죽이고 목판을 불태웠다는 가공의 이야기도 덧붙여져 조선이 인재도 몰라보는 무능한 나라여서 망했다는 이미지도 만들어졌다. 많은 사람이 국토 정보를 이용할수 있도록 김정호가 평생에 걸쳐 헌신한 것은 맞지만, 당시 조선에는 굳이 백두산에오르고 전국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될 만큼 수준 높은 지도가 많이 있었다. 김정호는축적되어 있던 지도 정보와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기존의 지도와 지리서를 비교하여이를 집대성하였다.

「청구도」를 다시 업그레이드한 것이 「대동여지도」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남북을 22층으로 자르고, 다시 각 층을 19면으로 나눠 병풍처럼 접을 수 있는 첩(帖)의 형태였다. 첩을 펼치고 위아래로 연결하면 동서남북으로 이어 보기가 가능했다. 게다가필요한 지역만 접어서 다닐 수가 있어서 지니기도 편했다. 한마디로 정확성, 편의성, 휴대성을 모두 갖춘 만능 지도였다.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의 장점인 과학기술을 배워 그들을 이기려고 하였다. 신헌 등은 「해국도지를 보고 신무기를 개발하였는데, 수뢰포도그중에 하나였다. 또 김기두라는 기술자가 쇠로 된 철선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김기두는 대동강에서 격침한 제너럴 셔먼호의 부품으로 「해국도지를 참고해 가며 서양식 증기선을 만들었다고 한다. 석탄은 구할 수가 없어서 숯을 연료로 증기를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무거운 철선을 움직이기에는 힘이 약해 한강에서 1분에 열 발자국 정도밖에 나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서양 기술을 도입하는 것은 무리였다. 모순이 심화된 봉건 사회를 그대로 둔 채, 서양의 기술만 배워 왕조 체제를 지키려고 한 생각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결국 일본에 폭력적으로 개항을 당한 뒤, 이후 청에서 기술을배워 온 유학생들이 기기창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신식 무기 제작이 가능하였다.

광성보 전투의 끔찍함은 그림에서 그대로 전해진다. 그런데 여기에는 약간의 연출이 들어갔다. 사진사는 촬영 전에 ‘야만인‘과의 전투 흔적이 실감나게 보이도록 시신들을 인위적으로 배치하였다. 맹수를 사냥하고 이를 기념해 포즈를 취할 때와 비슷한 연출이었다. 세상을 문명과 야만으로 나누고 자기와 다르다면 인간도 동물처럼 취급하는 발상, 과연 누가 야만인 것일까? 처참한 시신을 보고 전쟁의 참혹함이 아니라 야만을 물리친 미국의 위대함을 느낀다면 ‘문명국‘이라 할 수 있을까?

해국도지 청의 위원이 지은 세계 지리서이다.

조선에는 1845년 베이징을 방문한 한 사신이 가지고 들어오면서 소개되었고, 중보판(1842년 40권으로 간행되었다가 1847년에 60권, 1852년에 100권으로 증보 간행) 역시 꾸준히 도입되었다. 조선에 소개된 ‘해국지』는 최한기, 박규수, 오경석 등 초기 개화파 인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최한기는 「해국도지』를 바탕으로 지구전요』라는 세계 지리서를 저술하였다. 병인양요 직후 박규수와 김윤식, 신헌 등은 전함 3척과 수중 지뢰(수뢰포)를 제작하였는데, 모두 「해국도지』에 적힌 제조 기술에 따른 것이었다.
한편, 「해국도지」에서 위원은 미국이 "강대국인 영국에 맞서 싸운 나라이며, "선거로 나라의 대표를 뽑는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해국도지를 통해 미국 사정을 파악한 박규수는 미국을 적대시하던 기존의 생각을 바꾸었다. 그리고 김옥균·박영효 등 젊은 개화파들에게 ‘해국지』를 읽게 하여 서양 문물을 익혀 나가도록 도왔다. 「해국지』는 우리나라에서 개화 세력이 형성되는 데 값진역할을 한 책이었다.

기기국 번사창(서울 종로구) 1884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무기 제조 공장인 기기창 건물 중 하나이다. 기기국은 무기 제조 관청이고, 여기에 속한 공장이 기기창이다. 기기창은 총 5개의 건물로 이루어졌으나 현재는 번사창만 남아 있다. ‘번사는 흙으로 만든 틀에 금속 용액을 부어 주조하는 것을 뜻한다.

1882년 조선은 청의 주선으로 서양 국가 중 최초로 미국과 국교(조미수호통상조약)2015 866를 맺었다. 미국은 서울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초대 공사로 푸트를 파견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청이 조선을 속국으로 묶어 두려는 상황에서 미국이 공사까지 파견하며 조선을 독립 국가로 대접하자, 고종은 청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에 답방 형식의 사신단인 보빙사를 파견하였다.
사신단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이들은 귀국해 육영 공원 등의 근대식 학교를 설립하고, 경복궁에 발전기를 설치하여 궁궐에 전구를 밝히는 등 조선의 근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는 김옥균의 죽음을 각자의 입장에서 이용하였다. 청은 자국 군함에 김옥균의 시체를 실어 보내 조선 정부의 점수를 얻었고, 조선은 그 시신을능지처참하여 반역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는 본보기로 삼았다. 일본은 김옥균 암살사건과 동학 농민 운동을 연계하여 청·일 전쟁의 구실로 활용하였다.

1845년 영국 함대는 남해를 지나다 거문도를 처음 본 후 이를 포트해밀턴(PortHamilton)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1885년 영국은 동아시아 남쪽으로 진출하는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구실로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였다. 이를 ‘거문도 사건‘이라 부른다. 영국군은 거문도를 포트해밀턴이라 부르며 섬 안에 포대를 만들고 영국 국기를 게양하였다. 영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의 주권을 짓밟는 명백히폭력적인 행동이었다.
거문도는 당시 ‘화려한 배들이 모여드는 곳‘, ‘동양 최고의 요충지‘라 불리던 곳이었다. 일본의 나가사키와 중국의 상하이를 오가는 항로에서 험한 바람과 파도를 피하는기항지로 거문도만 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1854년에 러시아 군함이 거문도에 정박하여 주민들과 교류한 일이 있었고, 다른 나라들도 거문도에 관심을 두고있었다. 더구나 영국 입장에서는 러시아의 극동 함대가 대한 해협을 통과할 때 이를공격하는 전진기지로도 안성맞춤이었다.

이후에도 거문도는 무수한 외국인과 접촉하면서 조선 어느 지역보다 빨리 근대 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등대가 설치되었고, 우리나라최초로 테니스장도 생겼다. 영어나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주민들도 생겨났다. 적어도거문도 주민들에겐 서양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다.
현재 거문도에는 거문도 사건 당시 병으로 세상을 떠난 영국인들의 묘지가 남아 있다.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나쁘지 않았던 거문도 주민들은 영국인 묘지를 외면하지 않고 관리해 왔다. 이를 알게 된 영국 대사관은 거문도 주민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거문도의 중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제국주의 침략이 일어난 거문도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한국과 영국 사이에 우호의 상징이 되었다.

독립 협회는 1896년 7월 창립 후 국민들에게 독립문 건설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조선의 독립은 정부만의 경사가 아니라 인민의 경사이니 함께 돈을 내자는 것이었다. 왕실이 왕태자(후에 순종) 명의로 1,000원이라는 거액을 기부했고, 국민의 모금으로12월 말에는 4,700여 원의 기금이 모였다. 독립문은 대한 제국을 선포한 직후인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되었다. 독립문의 앞쪽에는 한글로 ‘독립문‘과 태극기, 그리고 대한 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을 새겨 독립의 의지와 함께 새로 태어난 대한 제국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었다. 반면 중국 사신이 들어오던 방향인 독립문의 뒤쪽에는 보란 듯이 중국인들이 읽을 수 있는 한자로 ‘獨立門(독립문)‘ 글자를 새겼다.

조선의 마지막 선비라 불리는 황현은 양무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초야의 선비 눈에도 보이는 것이 왜 고종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까?
그 군함이 도착하자 어떤 사람은 시급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반환을 요청하였으나 누차일본인의 질책을 받아 부득이 받은 것이다. 그러나 군함은 고물인 데다가 누수까지 되어 빨리항해할 수 없었으므로 일본인을 고용하여 수선 작업을 벌이는 바람에 전후에 걸쳐 거액의 비용이 소모되었다
황현, 『매천야록』

헐버트는 조선에서 처음 한글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배운 지 4일 만에 한글로 된 책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글을 가리켜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라고 평가하였고, 「조선 글자」라는 논문까지 영문으로 발표하였다. 또한글로 된 세계 지리서인 『사민필지(직접 저술하였다. "양반과 평민 모두知)를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의 사민필지는 육영 공원과 배재학당에서 세계지리 교과서로 사용되었고, 나중에 한역본과 국한문혼용본으로 재출판되어 일반인들이 세계의 역사와 지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주시경과 함께 한글 연구도계속하여 『독립신문』에 본격적으로 띄어쓰기와 점찍기(쉼표, 마침표)를 도입하는 등 한글 문법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고구마 기지시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민씨 세력의 중심인물이었던 민영익은 칼을 여러곳에 맞아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당시 조선의 외교 · 재정 고문이었던 뵐렌도르프는민영익을 자기 집으로 옮기고 미국인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알렌에게 치료를 요청하였다. 알렌의 처치 덕분에 민영익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일로 알렌은 고종과 왕비(명성황후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자 알렌은 자신의 사명인 선교를 위해 병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고종에게 병원 설립을 건의하였다. 고종 역시 근대식 시설들을 설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한방 치료를 하던 기존의 혜민서를 없애고 제중원을 세웠다(처음 이름은 ‘광혜원‘이었는데, 2주 만에 제중원으로 바꾸었다), 흉가나 다름없던 홍영식의 집은 이렇게 서양식 병원으로 재탄생하였다. 이 자리는 지금 헌법 재판소(서울 종로구)가 있는 곳이다.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 중에 미국에 가면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는 말을 믿고사진 결혼을 했지만, 실제로는 열악한 농장 노동에 시달린 예도 있었다. 왼쪽 사진 속천연희 역시 진주에서 중·고등 과정을 다닌 엘리트 여성이었는데, 일본의 통치에서벗어나 학교에서 배운 정치적 자유를 얻기 위해 사진 신부를 택하였다. 하지만 막상남편은 자신보다 27세나 많은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생계를 책임지며 자식을 교육하였고, 독립운동도 후원하였다. 다른 여성들도 각종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이들은 안중근의 재판 비용을 모으거나,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대하는 전보 발송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였다. 또한 3·1 운동, 간도 참변 피해자를 위한 모금 활동도 전개하였다. 낯선 땅에서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었지만, 이들은 식민지 조국을 잊지 않았다.

매켄지는 자신의 저서 『자유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 서문 마지막에 "나는 자유와 정의를 기원한다(I plead for Freedom and Justice)."라고 썼다. 매켄지가 한국을 도운 것은 결코 동정심이나 정치적 계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의병전쟁과 3·1운동에서 자유를향한 한국인들의 갈망과 불의로 가득한 일제의 폭압을 보았다. 자유인으로서 그는 폭압에 맞서 싸우는 또 다른 자유인들을 돕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2014년 대한민국 정부는 매켄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러한 학생 조직 결성 경험은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당시 큰 힘을 발휘하였다. 독서회 회원들은 학교 간 연락을 맡으며 학생 시위를 이끌어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특히 장재성은 투쟁 방향을 지휘하고 다른 지역과 긴밀히 연락해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전국으로 확산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 일로 그는징역 4년 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출소 후 광주학생항일 운동 참가자들과 비밀 조직을모색하다 검거되어 또 한 번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장재성은 일제 강점기에 사회주의자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해방 후에는 좌파 활동에 참여하였다. 공산주의 체제와 대립하던 미군정은 그의 활동을 용납하지 않았고, 결국 1948년 7년 형을 받고 다시 투옥되었다. 그리고 투옥 중에 6·25 전쟁이 일어나자 북한에 동조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정부에 의해 처형당하였다. 조국의독립운동에 힘썼지만, 이후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선정에서도 제외되었다. 그에 대한제대로 된 평가는 언제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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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는 세 가지 보물을 뜻하는 ‘삼보‘가 있다. 세 가지 보물이란 부처(불보), 부처의말씀을 적은 경전(법보), 부처의 말씀을 공부하는 승려(보)를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이세 가지 보물을 각각 상징하는 3개의 절이 있는데 이를 ‘삼보사찰‘이라고 한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고 있는 양산의 통도사, 부처님의 말씀을 종합하여 정리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합천의 해인사, 그리고 고승덕이 높은 승려)을 많이 배출한 사찰인사진 속 순천의 송광사이다.

금속 활자로 인쇄한 『직지심체요절』의 원래 제목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백운화상이 부처와 자신의 선배 승리들불조)의 ‘직지심체‘에 대한 핵심 구설을(요절) 뽑아 수록해 (초록) 놓은 책"이라는 뜻이다. ‘직지심체란 참선을 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고려 왕실이 신성시한 태조 왕건 청동상은 고려가 망하면서 조선 초에 폐기되었다. 그러나 아주 우연한 발굴로 역사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세상에 나온 태조왕건 청동상을 통해 우리는 고려가 황제국을 내세웠다는 것과 고구려의 전통적인 제사 의식을 이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정효공주 무덤의 특징은 당 양식처럼 벽돌탑 아래 사리함을 두지 않고 시신을 두는무덤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무덤방 위에 봉분 대신 탑을 세운 것은 고구려 양식과도다르다. 이를 통해 발해는 당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창적인 문화를 이루었다고 할 수있다. 무덤 안에서 발견된 묘지석에는 다음 내용이 쓰여 있다.

석가모니의 사리나 팔만대장경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승려가 없는 사찰은 없는 법인데 왜 유독 송광사의 승려는 높이 평가받았을까? 고려 왕조는 승려들에게 지금의 공무원처럼 일정한 직급을 부여하고 관리하였다. 특히 학문이나 수행이 뛰어난 고승에게는 국가 혹은 왕의 스승이란 뜻의 ‘국사‘, ‘왕사‘라는 칭호를 주었다. 고려는 불교 국가였던 만큼 승려의 숫자도 많았기에 국사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도 순천송광사는 고려 5백여 년 동안 무려 16명의 국사를 배출하였다. 고려 후기 국사는 모두송광사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송광사는 불교의 삼보 가운데승려를 대표하는 승보사찰이 되었다.

순천 송광사(전남 순천)사찰의 본래 이름은 길상사였다. 정혜결사가 길상사에 자리 잡고절의 명칭도 정혜사로 바꾸었지만, 가까운 곳에 같은 이름의 절이 있어 이후 수선사라는명칭을 사용했다. 수선사는 뒤에 사찰이 자리한 송광산의 이름을 따서 송광사가 되었다.

『삼강행실도』는 유교의 주요한 덕목인 삼강, 즉 부자 · 군신 · 부부의 행실을 훌륭하게 실천한 효자 · 충신·열녀의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그려낸 책이다. 

삼강이란 아버지가 아들을, 임금이 신하를, 남편이 아내를 확실하게 장악하고 주관하기 위함이었다. 공자가 다시 태어나서 본다면 기겁하였을 ‘단지‘라는 행위는 대체로한쪽의 의무만을 강조한 것이었다. 즉 임금이 신하를 위하여,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여, 남편이 아내를 위하여 손가락을 자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삼강행실도』는 이러한 가부장제 유교적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교과서였다.

여기 400여 년 전 중국에서 제작된 하나의 세계 지도가 있다. 명말기 중국에 온 천제가주교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중국인 이지조와 함께 1602년 당시의 최첨단 도법을 활용해 제작한 세계 지도로, 지도의 이름은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이다.
이 지도는 중국인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곤여만국전도는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익숙했던 동아시아가 서양과 세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창문‘ 역할을 하였다.
[곤여만국전도」는 세계를 구라파(유럽), 리미아(아프리카), 아세아(아시아), 북아묵리가(북아메리카), 남아묵리가(남아메리카), 북극, 묵와납니가(남극)의 7개 권역으로 구분하였다. 지명은 다양한 형태로 기재되었는데, 접미어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아(亞)‘이다. 대니아(亞, 덴마크)처럼 대부분 국가와 지방의 지명에 사용되었다. 특이하게도‘국(國)‘자는 왜인국(國)처럼 대부분 부족 등의 이름을 표현하는 데 쓰였다.
아시아 지역은 중국 ·조선 · 일본을 중심으로 다른 대륙에 비해 상세하게 표현되었다. 중국은 만리장성과 험준한 산지, 사막을 표현하여 이민족과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조선의 경우, 반도의 모습으로 팔도 지명과 함께, ‘고백‘, ‘고부여‘, ‘고신라‘ 등 옛지명이 적혀 있으며, 중국의 제1조공국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일본은 지금의 일본과같이 4개의 섬으로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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