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0월 항쟁 1946년 당시 38도선 이남을 통치하던 미군정은 일제가 전쟁 중 실시하였던 공출제와 배급제를 폐지하고 자유시장제를 채택하였다. 하지만 일부 악덕 상인의 사재기로쌀 가격이 3개월 만에 60배로 폭등하였고, 이에 미군정은 당황하여 다시 쌀을 강제로수집하고 배급을 부활시켰다. 하지만 강제로 쌀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경찰·공무원들이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고,시민들은 이에 반발하였다. 문제는 그 경찰과 공무원들이 대부분 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부 밑에서 일하던 친일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에 대한 불만은 고스란히 미군정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광복절 기념식에서 "저는 ‘건국 60년을 맞아 국가의 독립과 영토를 보전하고………"라고 말하였다. 2015년 박근혜 대통령도 "오늘은 광복 70주년이자 ‘건국 67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날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들의 발언은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의 출발인 ‘건국‘으로 삼겠다는 의도였다.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신격화하고 친일파를 건국 공로자로 둔갑시키려는 세력의 주장을대통령이 앞장서서 옹호한 것이다. 1948년 건국‘ 주장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문제가 있다. 1948년이 대한민국의 출발이 된다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역사 30년은 송두리째 사라진다.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단독 정부 수립에 불참한 독립운동가들은 ‘건국의 방해자‘가 되고, 단독 정부 수립에 협력한 친일 세력들이 ‘건국의 공로자‘가 된다. 이는 또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하는 대한민국의 헌법을부정하는 것이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은 "오늘은 광복 73주년이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 70주년을맞는 매우 뜻깊고 기쁜 날입니다."라고 말해 두 전직 대통령의 왜곡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았다. 치열하였던 독립운동의 역사를 부정하는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는 앞으로없어야 할 것이다.
여수와 순천을 되찾은 군인들은 14연대 봉기 군인들과 인민 위원회에 협력한 사람들을 찾아내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인과 경찰은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은 채 의심되는 사람들을 즉결 처분하였다. 군인과 경찰의 손가락질 하나면 사람이 쉽게 죽어 나감기에 그들의 손가락은 ‘손가락총‘이라 불렀다. 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피해 지역의 주민들은 큰 상처를 입었다. 14연대가 봉기하였을 때는 우파이거나 협조를 거절한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14연대 봉기 군인의가족이거나 빨치산에 식량을 제공한 사람들도 진압 군인들에게 처형되었다. 무엇보다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도 정당한 절차없이 희생되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은 한국을 철저한 반공 사회로 만들었다. 조금이라도 사회주의와관련 있다고 의심되는 사람은 ‘빨갱이‘라는 사회적 딱지가 붙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속에서 여수·순천 10-19 사건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의 유가족들도 숨죽이며 살아야 하였다. 2021년이 되어서야 ‘여수·순천 10-19 사건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었고, 진실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
재판도 없이 죄명도 묻지 않고 이렇게 죽인 것은 이건 사형이 아니고 학살이다. 이건 국법으로 사형을 시킨 것이 아니고 국민을 데려가 학살을 한 것이제 이건 국가의 죄다. 요것은 벗어 줘야 될 거 아니냐 그거여. - 여수·순천 10-19 사건 당시 아버지를 잃은 박○○ 씨 구술
옛 대전 형무소에는 여수·순천 10·19 사건 관련자 등 좌파 정치범, 재소자, 사전구금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대거 수감되어 있었다. 6·25 전쟁 발발 직후, 대전이 북한군에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 형무소에 수감된 좌파 인사들이북한에 협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1,800여 명(최대 7,000명 정도로 추산)의 수감자를 인근 산내골령골로 끌고 가 학살하였다. 학살은 대전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고양 금정굴, 공주 왕촌리, 경산 코발트광산 등 전국 각지에서 많은 민간인이 대한민국의 군인과 경찰에 의해 학살되었다. 학살은 대부분 인적이 드문 산골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너 말조심하지 않으면 골로 간다."라는 표현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6·25 전쟁은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국제전이기도 하였지만, 알고 지내던 사람들끼리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한 마을 안의 전쟁이기도 하였다. 6·25 전쟁의소용돌이는 전라남도 영암의 구림마을 사람들도 비껴갈 수 없었다. 북한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에 사회주의자로 분류된 국민 보도 연맹원들과 평소에 좌파로 찍힌 사람들이 학살당하였다. 학살은 경찰과 지역 상황을 잘 아는 민간인에 의해이루어졌다. 이후 구림마을이 북한군의 영향력 안에 놓이자 이번엔 경찰과 경찰에 협력한 사람들, 우파로 분류된 사람들이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혀 학살당하였다. 하지만피해자들은 경찰도 아니었고 이전에 일어난 학살과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다.
정부 수립 직후인 1949년 3월 26일 오전 9시부터 중앙청 광장에서는 어떤 기념식이진행되었다. 사람들은 만세 삼창하였고, 집마다 태극기를 내걸었다. 이는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생일 기념식 풍경이었다. 놀랍게도 6·25 전쟁 중에도 이 기념식은계속되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할 때까지 이승만의 생일이 되면 서울 운동장에서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고, 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했으며, 밤에는불꽃놀이가 장관을 이뤘다. 경무대(오늘날 청와대)에는 여학생들을 데려와 이승만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특히 80세 생일이었던 1955년에는 특별한 행사가 많이 기획되었는데,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승만 기념 동상 제작이었다. 2억 656만 환의 경비를 들여 남산에 있던 일제가 세운 옛 조선 신궁 터에 약 24.5m(아파트 10층 정도의 높이)의 ‘세계 굴지의 동상‘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기념 동상 건립은 80살 생일을 기준으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자는재출발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리하여 10월 3일 개천절에 기념 동상 건립 기공식을하고, 다음 해 광복절에 건립 준공식(제막식)을 하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날짜를 이렇게 잡은 것은 이승만이 조선 신궁을 철폐하고 새로운 나라를 연 사람임을 상징적으로보여 주려는 의도였다. 이승만 동상은 한복 두루마기 고름을 날리며 오른손을 들고 무슨 말을 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오른손을 들고 있는 것은 예전부터 황제를 상징하는 모습이었으며,승리한 장군이 취하던 자세였다. 한편으로 국내에 세워진 동상 중 오른손을 들고 있는것은 민중을 이끄는 지도자임을 의미한다. 왜 이런 모습으로 동상을 만든 것일까? 동상 건립 1년 전인 1954년은, 이른바 사사오입개헌으로 온 세상이 시끌벅적했던해였다. 억지 개헌으로 대통령의 정통성은 의심받았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믿음은 땅끝으로 추락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당은 돌파구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자유당은 장기 집권을 위해 이승만을 민족의 영웅이자 국가의 아버지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우상화 작업은 이승만의 호인 ‘우남‘이 들어가는 공원이나 기념관 건립, 화폐 제작 등으로도 이어졌다.
조봉암은 3·1운동과 6·10만세 운동, 신간회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순간도 서대문 형무소에서 맞이하였다. 이러한 이력을 발판으로 제헌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 개혁을 추진하여 농민들의 오랜 염원을 실현하면서 정치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이승만이 사사오입개헌으로 장기 집권 의도를 드러냈던 제3대 대통령 선거 때, 야당의 단일 후보는 민주당의 신익희였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로 돌풍을 일으키던 신익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조봉암은 뒤늦게 출마를 선언하였다. 짧은 선거 운동 기간, 여당과 관공서의 방해로 선거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음에도 조봉암은 유효득표수의 30%를 얻는 높은 지지를 받았다. 조봉암의 성장에 이승만은 정치적부담감을 느꼈고, 조봉암을 제거할 필요를 느꼈다.
1961년 5·16군사 정변을 주도하여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으로서 그해 11월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도중 일본에 들렀다. 그는 수상 관저에서 열린 만찬회에 초대받아 기시 노부스케와 만났을 때 다음과같은 말을 하였다.
경험도 없는 우리한테는 그저 맨주먹으로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의욕만 왕성합니다. 마지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청년 지사와 같은 의욕과 사명감을 품고 그분들을 모범으로삼아 우리나라를 빈곤으로부터 탈출시키고,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발언 속의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청년 지사는 누구를 말하는 걸까? 박정희 의장은 평소에 일본의 요시다 쇼인을 특별히 존경한다고 표현하였다. 요시다 쇼인은 서양처럼 힘을 기르기 위해 한반도를 점령하자는 ‘정한론‘을 주장하였던 인물이었다. 박정희는 왜 이러한 말을 하였으며, 그가 만난 기시 노부스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기시 노부스케는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이후 농상무성에서 관료로 일하다가 1936년 만주로 건너갔다. 그는 만주국에서 총무청 차장, 산업부 차장을 맡아 산업계를 주도하였다. 그에게 민주국은 국가가 경제 활동을 통제 · 간섭하는 통제 경제를기초로 한 이상적 일본을 위한 ‘실험 무대‘였다. 일본의 패전 이후 A급 전범으로 잠시복역하다 석방되었고, 나중에는 2대에 걸쳐 총리까지 역임하였다. 그는 정계에서 물러난 뒤에도 계속 배후에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쇼와시대)의 요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박정희 정권의 후견인 역할을 지속하였다. 1917 년에 태어난 박정희는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보통학교(초등학교) 교사로 복무하였다. 이후 혈서까지 씨가며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에 지원하였고, 1910년 교직을 그만둔 후 만주로 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특별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만주는 식민 지배로 벼랑 끝에 내몰린 청년들에게 ‘신천지‘ 혹은 ‘동양의 엘도라도‘로 여겨졌으며, 가난한 농촌 출신 박정희에게도 꿈과 희망의 무대였다.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를 이어준 것은 만주국에서의 인맥이었다. 1965년 한·일기본 조약 체결 당시, 일본의 외무상이었던 시나 에쓰사부로도 만주국에서 기시 노부스케 밑에서 일하였던 인물이다. 만주국에서 장교로 근무하였던 박정희의 경험은 이후 유신 체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대통령이었던 시절에 깊은 ‘인연‘을 맺었던 아베 신조전 총리 또한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이다.
아래 사진을 보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여성 노동자들이 눈에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수출 자유 지역을 정부가 주도한 산업화의 성공 사례로 홍보하였다. 그런데 마산은 부마 민주 항쟁 당시 노동자들의 저항이 거셌던 곳이다. 정부의 홍보대로라면 노동자들이 유신 철폐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마산수출 자유 지역은 정부 주도 산업화의 상징이 맞을까? 수출 자유 지역을 처음 구상한 것은 전국경제인연합회였다. 경제인들은 타이완의가오슝이나 홍콩의 사례를 들어 한국에도 수출 자유 지역을 설치하자고 제안하였다. 박정희 정부가 이를 수용해 수출 자유 지역 설치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투자할미국 등 외국의 대기업을 찾기 어려웠고, 주로 전자·기계·금속 등 노동집약적인 일본 중소기업 공장들이 자리 잡았다. 그럼 정부가 홍보한 대로 ‘수출 증진과 고용 증대‘는 이루어졌을까? 일단 수출량은예상만큼 늘지 않았다. 타이완의 수출자유지역과 비교하였을 때 마산의 수출량은 형편없었다. 정부의 기대만큼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수출 자유 지역을 향한 관심과 지원은 자연스레 시들해졌다. 노동자들의 형편은 더 나빴다. 정부는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해 노동자들의 권리를 제약하였다. 노동조합 설립 자체를 제한하였고, 만약 노동조합이 생겨도 노동 쟁의는 불가능하였다.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 조건을 감당해야 하였다. 더 큰 문제는고용 불안이었다. 1972년부터 적자 사업체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휴업과 공장에서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제1차 석유파동 직후부터는 휴업하거나 폐업하는 회사가 속출하면서 ‘해고 선풍‘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마산 지역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은 짙어져 갔다. 1979년 부산에서 유신 철폐와 독재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시작된 지 이틀 만에 마산에서도 유신 반대 시위가 전개되었다(부마 민주 항쟁), 퇴근하던 노동자들은 거리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파출소를 불태우는 등 과격한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1970년대 말 전국 평균과 비교할 때, 마산의 임금은 낮았고 실업률도 높았다. 박정희정부의 경제 실패가 노동자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의 폭력에 희생된 노동자가 유치준이었다. 유치준은 수출 자유 지역의 하청 건설 노동자로, 퇴근하다가 시위에 휩쓸렸다. 그는 경찰의 폭력으로 쓰려졌고, 사망의 원인이 은폐되었다가 40년이 지난 후에 공권력에 의한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유치준의 죽음은 박정희 정부가 홍보한 것처럼 수출 자유 지역이 한국 경제 발전을이끌었다는 상식이 실제로 맞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김경숙은 YH 무역의 노동자였다. 그는 1979년 8월, 고의로 공장 문을 닫고 월급을떼먹은 회사와 싸우다가 동료 ‘여공‘들과 함께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당사에 들어가농성하였다. 그러나 안전지대라 생각했던 제1야당의 당시를 경찰이 새벽에 습격하는만행을 저질렀고, 강제 진압 과정에서 그는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죽음을 슬퍼해 줄동료는 다 잡혀가 철창에 갇혀 있었고, 가족은 경찰의 방해로 제때 올 수가 없었다. 그의 장례식장이 적막하였던 이유이다. 김경숙의 죽음에 신민당이 강력히 항의하자, 여당은 10월 4일 야당 총재인 김영삼의 국회 의원직마저 박탈하였다. 10여일 뒤 대규모 시위가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다. 이 시위가 바로 부마 민주 항쟁이다. 부산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시위에 다른 대학 학생과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시위대는 수만 명에 달했다. 파출소 11개가화염에 휩싸이고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태워질 정도로 시위는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항쟁은 인근 도시인 마산으로 번졌고, 정부는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탱크가 부산 시내 곳곳에 배치되고 공수 부대가 투입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급하게 부산에 내려와 항쟁을 직접 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부산시위는 민란"이라며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박정희에게 보고하였다. 하지만 박정희는 버럭 화를 내며, "부산 같은 사태가 서울에서 일어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지."라고 소리를 높였고, 옆에 있던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하는 놈들 100만, 200만 명 죽인다고 까딱하겠습니까? 까불면 탱크로 싹 깔아뭉개버리겠습니다."라고 거들었다. 그때 ‘유신의 심장‘을 쏘는 총성이 울렸다.
1980년대 당시 가족법은 어땠을까? 해방 이후 만들어진 대한민국 법률은 여성에게매우 불리하였다. 이전 시대부터 이어진 남성 위주의 가족 관리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가족법은 가성의 주인인 호(戶)를 정해 호주에게 가정에 관한 모든 권리를 부여하였다. 이를 호주제라 한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남녀평등이 명시되어 있지만, 실생활에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남편이 사망할 경우, 여성이 생계를 책임지고 있어도 아들이나 손자를 호주로 삼아야했다. 이혼을 하면 호주인 전 남편의 동의를 받아야만 자녀의 각종 서류 등록이 가능하였다. 남편의 혼외 자식이 아내의 의사와 상관없이 호주가 될 수도 있었다. 자녀 양육권은 물론 상속에서도 남성이 여성보다 법적으로 우선권을 가졌다. 여성을 평등한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였던 이태영은 이러한 불합리한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여성은 판사가 될 수 없다‘라는 이유로 임용이 거부되는 등 차별을 몸소 겪어 왔다. 그는 1950년대부터 여성 단체를 조직해 꾸준히 가족법 개정 운동을 펼쳤다. 법 개정을위한 진정서 제출은 물론 여론을 모으기 위해 집회나 방송 활동도 함께하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상당 기간 우리 사회는 남성 위주의 사회 운영을 당연하게 여겼다. 대다수 사람은 가족법 개정 운동이 전통을 해친다고 여겼다. 특히 유교 문화를 지켜 가던 다수의 유림은 전통 수호를 외치며 대대적인 가족법 개정 반대 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족법 개정은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다. 이후에도 이태영은 1984년 ‘가족법 개정을 위한 여성단체연합‘을 결성해 서명 운동과 홍보를 이어갔다. 해방 이후 40여 년이나 지속한 이 운동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 1989년 가족법 개정이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사회 전반의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여성 차별 또한 개선되어야 할 문제로 인식된 결과였다. 가족법 개정으로 여성은 시민으로서의 온전한 권리를 획득하기 시작하였다. 여성이호주가 될 가능성을 높였으며, 이혼한 여성의 양육권과 재산분할권을 인정하였다. 성별에 따른 상속 차별도 개선되었다. 하지만 여성이 남자 호주에 편입되어야 했던 호주제는 2005년 헌법 재판소가 헌법 불합치 판결을 하고 나서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태영이 여성 운동을 시작한지 50여 년 만의 일이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에 각계각층에서 통일 논의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지만, 1년 뒤 5·16 군사 정변으로 모든 것이 막혀 버렸다. 이후 박정희, 전두환 정권 20여 년 동안 민간 차원의 통일 노력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나 머리에 뿔 달린 괴물들만 사는 줄 알았던 금단의 땅을 황석영, 문익환이 먼저 밟고, 그 뒤를 임수경이 따라가면서 통일의 길이 생겨났다. "한 소녀가 세상을 바꿀수는 없다."라며 임수경의 방북을 두고 당시 여당 대표가 비아냥거리기도 했지만, ‘창구 단일화‘의 이름으로 민간의 통일 운동을 차단했던 노태우 정부도 민간과 경쟁하지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사실 임수경이 참가한 평양 축전 개막식에는 노태우 정부의 대북 정책을 총괄하던 박철언 청와대 보좌관이 비밀리에 파견되어 있었다. 이후 평양과서울에서 남북 종교계 인사들 간의 만남, ‘통일 음악회‘, ‘남북 통일 축구 대회‘가 정부의 허가로 열리는 등 사회 각 분야에서 통일의 분위기가 높아졌다. 급진전한 남북 관계는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으로 이어졌다. 1989년 민간 차원의 방북 후 채 10년이 안 된 1998년 11월, 1,418명의 금강산 관광객을 태운 금강호가 동해항을 출발하여 북한의 장전항에 도착하였다.
할머니들은 일본 총리의 한국 방문에 앞서 첫 ‘수요 시위(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 시위‘를 진행하였다. 이후 한 주도 거르지 않고 30년 이상 계속하고 있는 수요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수요 시위는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는 공간이며, 자라나는 세대가 할머니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일본의 진심 어린 사죄와 배상을함께 요구하는 역사 교육의 현장이다. 두 손을 꽉 쥔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 정부의 사과를 꼭 받아내겠다는 의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왜 ‘위안부‘에 작은따옴표(")를 쓸까? 이유는 일본군이 할머니들을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당시의 역사를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범죄 주체인일본군을 앞에 붙여 일본군‘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정주영의 소떼 방북과 활발해진 민간 기업의 남북 경제 협력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가능하였다. IMF의 외환 위기 속에서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남북 경제 협력 활성화 조치‘를 발표하였다. 이 조치에 따라 대기업 총수와 경제 단체장의 방북이전면 허용되었고, 대북 투자 규모 제한과 생산 설비 대북 반출 제한 등이 폐지되었다. 정주영의 소떼 방북으로 본격화된 남북 간의 교류는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과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으로 이어졌다. 이후 남측이 자본과 기술을, 북측이 토지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개성 공단이 열리며 남북 간의 경제 협력이 본격화되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핵과 미사일 실험, 이에 따른 대북 제재로 남북 경제 협력 사업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남북이 자유롭게 오갈 날을 위해 남북 양측이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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