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곳이다. 대학 캠퍼스 안의 수십 개 화장실 중 한 개가 모두가 이용 가능한 화장실이 되었을 뿐이다. 대단한 변경도 아니고, 일반적인 화장실의 공용 공간을 없애서 내부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혼자 화장실을 이용하는 형태일 뿐이다. 쉽게 말해 ‘커다란 1인 화장실‘ 안에 세면대도, 기저귀 교환대도, 장애인을 위한 시설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걸마치 성 소수자만 사용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성별 구분에 따른 화장실 이용‘이 편리했던 사람들이 방해를 받는 것처럼 의심한다.
어떤 방해도 없다. 화장실 가고 싶을 때 거리낌 없이 화장실에 갈 수 있던 사람이라면, 평소와 다름없다. 원래보다 불편해진경우는 없고, 이래저래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원래의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덜어 낸 소수가 생겼을 뿐이다. 이 변화를 격려해서 확장시켜 나감이 마땅하지, 기울어진 기본값의 수정을 혼란으로만 여겨서야 되겠는가.

한때의 착각이면 괜찮다. 상식적인 세계는 틀린 생각을 고칠 기회를 개인에게 자연스레 제공한다. 우물 안 개구리 시절은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니 우물 밖을 경험하며 견문을 넓히면 될일이다. 문제는 우물의 깊이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데 있다. "어릴 땐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이젠 아니다."라는 흔한 성찰에는 성장하면서 자신과 다른 계층을 자주 접할 수 있다는, 즉 사회의 계층 간 교류 및 이동이 활발하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아니라면? 편견은 끊임없이 확신이 되어 누구를 공격할 이유가 된다.

이처럼 한국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물을 더 깊이 파야한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 이르면 내부의 담벼락이 너무 높아외부 세계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엘리트는 많은것을 결정하고 다수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인데, 그 엘리트의 세상 보는 눈이 편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의사는사례일 뿐이고, 핵심은 ‘같은 생각을 오랫동안 지닌 집단‘이 견고해질 때의 위험성이다. 이들이 휘두르는 창은, 공정한 창이 아니다. 게다가 본인들은 매우 공정하다고 여기기에 누가 창에 찔린들 관심이 없다. 이게 엘리트만 해당하는가. 통하는 게 많아끼리끼리 결집하며, 독선으로 무장한 집단은 무수하다.
그런데 방패가 튼튼하다면 부당한 창이 사람을 찌르지 못할 거다. 방패는 편협하고 독단적인 생각이 사회를 관통하며 자유자재로 날뛰는 것을 막아 준다. 인문학이 중요하고 사회 비판이 필요한 이유다. 

그렇기에 맥락을 뒤집어 지금과는 다른 사회를 상상해 본다. 사람들이 지금처럼 전투적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면 어떨까?
가령 소득 격차가 줄어드는 것에서 출발해 보자. 취업 경쟁 완화, 입시 교육의 부담 경감, 전인교육 확산 등 변화는 연쇄적으로 이어질 것이다. 입시가 중요하고 취업이 시급해 늘 추상적으로만 인권을 배워 왔고 그 결과가 걱정이라면, 무엇을 손봐야하는지는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면 과격하고 무례한 언행이 설 곳은 점차 사라지고, 언론도 자신들의 자극적인 뉴스를부끄러워하지 않을까? 이런 배경이 뒷받침되어야 인터넷 세상도 달라질 텐데, 그것보다 인류가 화성에 가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이러나 저러나 암담하다.

스포츠계의 괴기스러운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제 대회 성적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흥분하는 사회가 원인이었음을간과해선 안 된다. 이 과잉된 감정에서 엉터리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연장되었으며,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최숙현 선수는 전전긍긍하며 끝내 기댈 곳을 찾지 못했다.

고용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3년간(2018~2020년) 건설 현장 산재 사망사고에서 하청업체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55.8%였다. 주목할 것은 공사 규모 120억원 이상의 건설 현장에서는 이비율이 89.6%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길을 가다 쉽게 볼 수 있는대단지 아파트 건설 현장이나 조선소처럼 규모가 큰 산업 현장에서 죽는 사람은 대부분 하청업체 소속이라는 말이다. 이유는안전시설을 갖추지 않았거나 지침을 준수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으로 안전시설을 갖추면 적자이고, 지침을 다 지키다가는 공사 기간이 늘어나 역시나 적자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이들은 떨어지고, 깔리고, 끼여서 죽는다. 50~60년 전이라면 아파트 짓다가 간혹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2022년이라면 아니다. 

5층짜리 건물을 해체할 땐 위에서부터 부수고, 치우고,
부수고, 치우고 해야 한다. 하지만 시간을 아끼기 위해 1층의 기둥을 부숴 건물이 중심을 잃고 저절로 무너지도록 한다. 업계용어로 ‘꺾기‘라고 하는데 4~5일 걸릴 일이 하루 만에 처리된다.
광주의 건물도 그 방법으로 철거되다가 예상하지 않은 방향으로 무너졌을 뿐이다. 예측이 아예 불가능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정교하게 현장을 살펴볼 전문가를 고용할 여력이 없다. 임금이 낮고 현장은 위험하니, 숙련된 노동자들이 외면하는 것은 당연하다. 안전 불감증이라고들 하는데, ‘불감‘하다고 느낄 사람도없고 느낀들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만 그나마 현장이 굴러간다.
사고는 인재지만, 그 인재가 사회와 무관한 경우는 없다.

김훈 작가는 위험의 외주화를 이렇게 표현한다.

이윤은 나에게 불이익은 너에게, 안전은 나에게 죽음은 너에게, 건강은 나에게 골병은 너에게. 죽음, 위험, 골병은 따로 모아서 남에게. 이것은 생산력 강화가 아니고 경영합리화가 아니고 일자리창출이 아니다. 이것은 약육강식이다. ‘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2021)는 노동 양극화를선명하게 다룬다.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하청업체 직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작업 전에 함께 모여 손을 모아 ‘안전제일‘을 외치는 순간을 말하고 싶다. 외치기는 외치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고 자세는 흐느적거린다. 안전이 중요한 건 알지만, 실제는 전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는 걸 본인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듯보인다. 그러니 그 구호는 무엇보다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면서기본에 충실하자는 게 아니라, 오늘도 운 좋게 살아남자는 불확실한 기도에 불과하다. 

현실은 어떠할까? 영화처럼 야비한 질문을 직접적으로 던지는 경우는 드물겠지만 직장에서 그토록 강요하는 이윤은 누군가가 목숨을 건 대가로, 담보로 발생한다. 노동자들의 안전을보장하고 제대로 된 대우를 하자고 하면 누구든 동의한다. 그러나 "성과급을 줄이고 하청업체 몫을 늘리는 데 찬성하시나요?"
라는 질문에는, 노동자들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올 것이 쉽게 예측된다. 위험의 외주화는, 누군가에게는 위험이지만 누군가에는 엄청난 이득이다. 이처럼 산업구조의 변화는 함께 을이었던 노동자들을 병, 정, 무로 더 세분화시키며연대를 무용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세상은 이 반대에 관대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시절 산업재해 현장을 찾아가 ‘이건 개인 실수‘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이 발언이 당선에 별 영향을 주지도 않았다. 일부 정치권과 언론들은 중대재해처벌법이 ‘없어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고 ‘있으면‘ 이러쿵저러쿵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말만 반복한다. 하지만 그 문제가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덜 죽을 수 있는 이득과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인지 의문이다. 이런 인식이 사람과 보너스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만 넘쳐 나는 곳에서 억울한죽음은 참으로 서글프다.

가난이 죄책감이 되지 않기를

성북 네 모녀의 무연고 장례식장에 붙은 포스트잇에 적힌 글귀였다(천민아 기자,
성북 네 모녀, 무연고 장례…마지막은 외롭지 않았다. <뉴시스》, 2019. 12, 10.). 가난을 구원의 대상으로 여기는 선별적 복지 패러다임은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자신의 비루함을 증명하길 개인에게 강요한다. 생존을 위해 매번 스스로의 존엄성을 파괴해야 한다면 그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사회의 존재 이유를 상식을 지킬 토대를 개인에게 제공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홍익인간 정신이 널리 퍼지기 위해서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더불어 국가에 대한 믿음이필요하다. 국가가 모두에게 부귀영화를 보장해 주는 건 아니지만 ‘누구라도‘ 깊은 수렁에 빠지지 않게 지켜 줄 것이라는 견고한 믿음 말이다. 이게 없다면 사람들은 ‘각자도생‘이라는 위험하고 차가운 철학으로 살 수밖에 없다.
펴새 모스 서시

취약 계층으로 인정받은 사람만을 돕는 선별적 복지 시스템에서는 자격 심사에서 살아남은 자만이 계속 삶을 유지할 수있다. 생존을 위해 더 처절해지고 비굴해져야 하니, 자존감이 추락한다. 이런 과정이 싫어서 신청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신청주의 복지 제도는 필연적으로 부정수급자가 존재하고 또 이를 찾아내라는 민원이 빗발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복지 대상자를 선별하고 검증하는 데 드는 비용이 더 낭비 아니냐는 지적이 등장한다.

보편적 복지란 일상의 ‘공공성‘을 강화하지 않고서는 빈곤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얼음에 빠진사람을 구하는 노력만큼, 얼음판 두께를 탄탄하게 만드는 접근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사람을 찾아내는 것보다, 최저임금을 현실적으로 인상하고 사업주가 이를 잘 준수할 환경을 만드는 일이 ‘무너지는‘ 사람을줄일 수 있다는 논리다

2021년 서울시의회는 ‘시민의 삶을 바꾼 최고의 조례‘를 투표한 바가 있는데, 무상급식 조례가 1위로 선정되었다(정식 이름은 ‘친환경 학교 급식 등 지원에 관한 조례‘로 2010년 12월 제정되었다)

사람들은 무상급식 논쟁을 통해 지금까지 당연하다고만 여겼던 선별적 복지의 문제점을 이해했고, 보편적 복지가 왜 시대적  과제가 되었는지를 깨달았다. 제도 하나가 던진 질문이이토록 철학적이었으니, 본인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와 상관없이 삶을 바꾼 경험으로 기억되지 않았겠는가.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를 읊어 본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누구나 ‘자유롭게 살 권리‘와 누구도 ‘존엄한 권리를 침해받지 않을 정의‘가 상호 보완적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시장경제가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운영될 때 가능하다. 장사는 누구나 해도되지만, 장사를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 아니다. 근로시간, 최저임금 등 지켜야 할 것이 많다. 당연히 아무거나 팔 수 없다. 그자유가 누군가의 존엄성을 파괴한다면 국가는 시장의 자유를규제한다. 그게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인들, 기업의 명운이 걸린것인들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다.

한국에서 ‘규제‘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 덫인 양 부정적으로해석된다. 기업인은 대통령을 만나, 상품을 승인받기까지 제출해야 할 서류도 많고 기준도 까다로워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면 언론은 이 고민을 빨리 해결하는 일이 옳은 것처럼 포장하고, 공무원의 원칙적 행동을 늦장 태도라고 비판한다. 그사이 수십억 원이 증발한다고 겁을 준다. 물론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못한 쓸데없는 기준을 가려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규제를 무작정 ‘낭비‘라고 보는 게 과연 공동체에 이득이 될까?
마지막으로 국가에 대한 신뢰가 깨질 때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짚어 보자. 국가를 믿고 상품을 구매할 수 없으면불안하고 혼란하다. 

공개되어야 할 사생활이란 없다. 개인의 이야기는 개인 밖으로 나가는 순간 어떻게든 오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비상시국에는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비상일수록 제한된 정보만으로 믿고 싶은 대로 믿어 버리는 사람들은 많아진다. 코로나는, 헌법이보장하고 있는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가 대한민국에서 엉성하게 활용되고 있음을 드러냈다. 법은 잘못한 게 없다. 사람들의조급함이 누군가의 권리를 무시했을 뿐이다.

6·25 전쟁을 분기점 삼아 사회의 변화를 설명하는 무게감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 한국은 외환 위기이후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더 나빠졌다. 외환 위기는 급속한 경제성장의 결과였는데 (재벌이 관과 밀착해 은행 돈으로문어발식 확장에 몰두하다 유동성 위기가 오자 한계상황에 이르러 줄줄이파산했다), 이를 극복하는 속성 치료법은 기존의 성장 일변도의그릇된 패러다임을 수정하는 게 아니라 더 강화시키는 방식이었다. 불에 기름을 부은 셈이었다. 노동자들을 자유롭게 해고해야 기업이 살아남는다, 그러니 비정규직이 많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당당해졌다.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다는 걸 인정하자는 거였다. 양극화는 선명해졌다. 개천 출신의 용은 판타지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잘못되면 끝장이라는 절박함과 나부터 살고 보자는 강박이 한국인을 지배했다. 이게 잘못된 거라고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과거보다 패배감을 빨리 접하게 되었다. 여기에 비례하여 체념하 는 시기가 빨라졌다. 같은 자본주의지만, 그 자본주의의무서움을 느끼는 사람이 훨씬 많아진 셈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공동체는 집단 그 이상의 의미로 확장되지 못하고 연대 의식은파괴된다. 양극화의 민낯이 드러난 이상, 안정적인 직업을 보장하는 바늘구멍을 통과하려는 자들은 넘쳐 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누구는 오랫동안 경쟁해야 하고, 누구는 일찌감치 경쟁을 포기하게 된다. 전자는 후자에 대한 편견을 굳힌다. 앞으로 "젊을때 공부 안 하더니"와 같은 혐오의 표현은 "저 인간은 초등학생일 때 공부 포기했지"라면서 더 섬세해질 것이다. 이는 노력도하지 않은 인간을 왜 사회가 책임지냐는 빈정거림이 되어 제대로 된 사회 안전망이 설계되고 안착되는 걸 방해한다. 공동체는 ‘어쩌라고?‘라는  냉소 앞에서  갈기 갈기 찢어질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흔적도 없이.
외환 위기 이후, 각자도생의 법칙이 만병통치약이 된 이유는 사회가 ‘살아남은 자‘에게만 주목했기 때문이다. 바늘구멍이좁아지면 구멍을 넓히는 게 지당하지만, 사람들 사이에는 ‘구멍을 통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만 무성했다. 위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변화에 얼마나 유연할 수 있는가를 강조하면서 마치 모두가 생존 비법대로 행동하면 살아남을 것처럼 떠들었다. ‘살아남는 법만 부유하는 사회에서는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없다. 그래서 공동체의 토대가 푸석해져도 이를 공론화하지 못한다. 지금은 다른가?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누구든지, 무엇이든 다운로드한다.
끔찍한 영상과 사진으로 ‘헤비 업로더‘가 되어 돈을 긁어모으는구조를 한국 사회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저 ‘일부 어둠의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여기던 것이 이토록 광범위하게일상을 파고든 일종의 ‘산업‘이 되어 버릴 줄 어떤 전문가도 예상하지 않았다.
지금은 ‘한 번쯤‘으로 끝나는 게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더빨리 접하고, 더 오래 머무른다. 수요가 형성되니 공급은 자극적으로 변한다. 돈을 쓰겠다는 이들 앞에서 돈을 벌겠다는 이가이것저것 고려할 틈은 없다. 고객을 뺏기지 않으려고 끊임없이신제품을 개발하는 시장의 논리와 비슷하다. 연기자들의 합의된 성관계인 예전 포르노는 상품성이 없으니 ‘리얼리티‘가 이를대체한다. 연인 사이의 은밀한 동영상이 유출되고, 몰래 찍은 영상들이 공유된다. 사람들은 연기자가 아닌 피해자를 감상한다.

이런 무대 위를 부유하는 ‘태아도생명이다‘라는 말은 임신·출산의 당사자만이 겪는 복잡한 경험과 혼란한 심리 상태를 생명윤리 문제로 쉽사리 응축시켜 버리는 다분히 사변적인 주장일 뿐이다. 사변적이라는 건 경험에 의하지 않고 오직 생각에만 의존한다는 것인데, 왜 이런 표현을 했는지는 단박에 설명할 수 있다.

낙태를 ‘웃으면서‘ 하는 사람은 없다. 태아가 잠재적 생명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낙태 찬성론자‘는 단언컨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 가치관이 당사자로 하여금 원치 않는 임신을 지속했을 때 닥쳐올 상황의 무게감을 고민하는 걸 멈추게 하지 않는다. 임신과 출산은,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할 사람의 문제다. 자신의 신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즉 임신유지와 임신 중지 가운데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한 인간의 생애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여기엔 경제적 요인은 물론 개인의 사회적 위치, 미래에 대한 계획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복합적이니 더더욱 단순하게 생각하기 어렵다.
추사 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내뱉는 말 가운데 고정관념을 전제한 표현이 많다. 고정관념이 강할수록 표현은 매우 즉각적이며, 때로는 공격적으로 표출된다. 공공장소에서 아이의 소란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엄마는 뭐 하는거야!" 라며 화를 내는 경우를 보자. 이게 가능하려면 세 가지고정관념이 견고해야 한다.
우선, 아이에게 반드시 ‘부‘나 ‘모‘가 있을 거라는 건 모두가 정상가족이라 불리는 가족형태 속에서 살고 있다고 여겨서다. 최근 ‘학부모‘라는 표현을 ‘보호자‘로 바꾸자고 하는건 이런 기본값에 대한 성찰이다.
두 번째 고정관념은 십중팔구 ‘엄마부터‘ 떠올리는 시선이다. 육아의 일반적인 모습이 특정 성별에게 치우쳐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인식일 거다.
마지막은 그 엄마를 찾는 격앙됨에 있다. 정말로 엄마를 찾아 주
려는 안쓰러운 마음이 아니라, ‘도대체 엄마란 사람이!‘라는 위압스러운 태도가 드러나는 게 다반사다. 엄마가 자기 역할 못했으니 욕먹어도 싸다는 식인데, 이 편견 안에서엄마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은 티끌만큼도 인정받지 못한다.
이런 정상가족 신화와 기-승-전-엄마 책임론이 팽배한 세상에서 
‘낙태‘는 개인 신체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철학적 논의로 넘어가지 못한다. 고정관념을 도덕으로 포장하는 사회제도를 비판하는 단계로 이어지지 않는 것도 물론이다.
여성을 사람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성별과 그에 어울리는 역할을 잘 수행하는지에 따라 판단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출생률이 낮다는 이야기가 거듭되다 보면 항상 "요즘 여성들이 이기적이어서 출산을 피한다"는 식의 망언이 등장하는 것을 보라.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박근혜 후보, 그리고 202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윤석열 후보의 배우자는 "출산 경험도없는데" 하는 식의 말을 들어야 했다. 원시적인 상상력이 여전히 한국 사회를 떠돌고 있다.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는 어떻게 변했을까? 초등학생이 ‘생존 수영‘을 배우는 모습을 보니 우리가 안전 문제에 예민해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수영을 못해서 그 난리가 난 게 아니다.
안전보다 효율을 우선시하면서 공적 가치를 의미 없게 여기는가치관이 사라지지 않는 한 ‘변했다‘고 하기엔 너무 이르다. 세월호 참사는 돈만을 향해 맹렬히 진격하는 마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나
절벽으로 떨어진 것과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이라는 배를 향한 자화자찬은 많았지만, 사람들은 허술한 배 위에서 파도가 칠 때마다 불안했다. 그런데 진짜로 ‘이윤과 효율‘에 미쳐 있던 배가 침몰했다.
우리의 추모에는 이 잘못된 시스템에 대한 경고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먹먹하게 누군가의 죽음을바라볼 것이고, 또 그 죽음을 조롱하는 이들을 보며 역시나 먹먹해질 것이다. 지나간 일을 왜 그렇게 붙들고 있냐는 그 생각,
추모가 밥 먹여 주냐는 그 생각, 이왕이면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나는 그 생각이야말로 엉터리 시스템이 가장 원하는 결과라는걸 잊어선 안 된다.

이 정도면 언론 시스템이라는 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참사 당일, 구조에 투입된 잠수부는 단 16명이었다. 그런데공중파의 뉴스 헤드라인은 "육해공 총동원, 하늘·바다서 입체적구조 작업" (KBS 뉴스 9), "구조 작업 총출동, 함척 23척 · 병력 1천여 명 동원"(MBC 뉴스데스크), "혼신의 구조, 헬기에 함정에 어선까지" (SBS 8시 뉴스)였다.47 특종에 눈먼 취재진은 팽목항에서 생존자들을 괴롭혔다. 구조된 학생에게 "친구가 사망한 것 알고있나요?"라고 질문한 기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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