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비석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최근 서울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의 암석 성분을 분석한 연구 결과 북한산의 돌이 아닌 경주에 분포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음이 밝혀졌다. 신라의 화강암으로 만든 비석을 새롭게 개척한 영토에 세움으로써 영토 확장의 상징적 의미를 더한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이 공들여 만든 비석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에게 점차 잊혔다.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가 세운 비석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다. 비석의 존재가 다시세상에 알려진 것은 19세기 활동한 실학자들에 의해서였다. 특히 추사 김정희는 비석에 새긴 문구를 연구한 끝에 비석을 세운 주인공이 진흥왕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김정희는 비석의 옆면에 자신이 비석을 보고 연구하였다는 기록을 남겨 놓기도 하였다.
비석에 신라의 역사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실학자의 역사 연구가 더해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비석에는 또 하나의 역사가 새겨졌다. 비석 곳곳에 6·25전쟁 중에 발생한 총탄의 흔적이 무수히 남겨진 것이다.

우리가 대동여지도」에 관해 잘못 알고 있는 사실도 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려고 백두산을 7번이나 올랐다느니, 세 차례나 전국 방방곡곡을 답사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인 1925년에 민족의식을 높이려고 신문에 처음 실렸는데, 계속 살이 붙어 하나의 신화가 되어 버렸다. 흥선대원군이 김정호와 그의 어린 딸을 죽이고 목판을 불태웠다는 가공의 이야기도 덧붙여져 조선이 인재도 몰라보는 무능한 나라여서 망했다는 이미지도 만들어졌다. 많은 사람이 국토 정보를 이용할수 있도록 김정호가 평생에 걸쳐 헌신한 것은 맞지만, 당시 조선에는 굳이 백두산에오르고 전국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될 만큼 수준 높은 지도가 많이 있었다. 김정호는축적되어 있던 지도 정보와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기존의 지도와 지리서를 비교하여이를 집대성하였다.

「청구도」를 다시 업그레이드한 것이 「대동여지도」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남북을 22층으로 자르고, 다시 각 층을 19면으로 나눠 병풍처럼 접을 수 있는 첩(帖)의 형태였다. 첩을 펼치고 위아래로 연결하면 동서남북으로 이어 보기가 가능했다. 게다가필요한 지역만 접어서 다닐 수가 있어서 지니기도 편했다. 한마디로 정확성, 편의성, 휴대성을 모두 갖춘 만능 지도였다.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의 장점인 과학기술을 배워 그들을 이기려고 하였다. 신헌 등은 「해국도지를 보고 신무기를 개발하였는데, 수뢰포도그중에 하나였다. 또 김기두라는 기술자가 쇠로 된 철선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김기두는 대동강에서 격침한 제너럴 셔먼호의 부품으로 「해국도지를 참고해 가며 서양식 증기선을 만들었다고 한다. 석탄은 구할 수가 없어서 숯을 연료로 증기를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무거운 철선을 움직이기에는 힘이 약해 한강에서 1분에 열 발자국 정도밖에 나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서양 기술을 도입하는 것은 무리였다. 모순이 심화된 봉건 사회를 그대로 둔 채, 서양의 기술만 배워 왕조 체제를 지키려고 한 생각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결국 일본에 폭력적으로 개항을 당한 뒤, 이후 청에서 기술을배워 온 유학생들이 기기창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신식 무기 제작이 가능하였다.

광성보 전투의 끔찍함은 그림에서 그대로 전해진다. 그런데 여기에는 약간의 연출이 들어갔다. 사진사는 촬영 전에 ‘야만인‘과의 전투 흔적이 실감나게 보이도록 시신들을 인위적으로 배치하였다. 맹수를 사냥하고 이를 기념해 포즈를 취할 때와 비슷한 연출이었다. 세상을 문명과 야만으로 나누고 자기와 다르다면 인간도 동물처럼 취급하는 발상, 과연 누가 야만인 것일까? 처참한 시신을 보고 전쟁의 참혹함이 아니라 야만을 물리친 미국의 위대함을 느낀다면 ‘문명국‘이라 할 수 있을까?

해국도지 청의 위원이 지은 세계 지리서이다.

조선에는 1845년 베이징을 방문한 한 사신이 가지고 들어오면서 소개되었고, 중보판(1842년 40권으로 간행되었다가 1847년에 60권, 1852년에 100권으로 증보 간행) 역시 꾸준히 도입되었다. 조선에 소개된 ‘해국지』는 최한기, 박규수, 오경석 등 초기 개화파 인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최한기는 「해국도지』를 바탕으로 지구전요』라는 세계 지리서를 저술하였다. 병인양요 직후 박규수와 김윤식, 신헌 등은 전함 3척과 수중 지뢰(수뢰포)를 제작하였는데, 모두 「해국도지』에 적힌 제조 기술에 따른 것이었다.
한편, 「해국도지」에서 위원은 미국이 "강대국인 영국에 맞서 싸운 나라이며, "선거로 나라의 대표를 뽑는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해국도지를 통해 미국 사정을 파악한 박규수는 미국을 적대시하던 기존의 생각을 바꾸었다. 그리고 김옥균·박영효 등 젊은 개화파들에게 ‘해국지』를 읽게 하여 서양 문물을 익혀 나가도록 도왔다. 「해국지』는 우리나라에서 개화 세력이 형성되는 데 값진역할을 한 책이었다.

기기국 번사창(서울 종로구) 1884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무기 제조 공장인 기기창 건물 중 하나이다. 기기국은 무기 제조 관청이고, 여기에 속한 공장이 기기창이다. 기기창은 총 5개의 건물로 이루어졌으나 현재는 번사창만 남아 있다. ‘번사는 흙으로 만든 틀에 금속 용액을 부어 주조하는 것을 뜻한다.

1882년 조선은 청의 주선으로 서양 국가 중 최초로 미국과 국교(조미수호통상조약)2015 866를 맺었다. 미국은 서울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초대 공사로 푸트를 파견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청이 조선을 속국으로 묶어 두려는 상황에서 미국이 공사까지 파견하며 조선을 독립 국가로 대접하자, 고종은 청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에 답방 형식의 사신단인 보빙사를 파견하였다.
사신단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이들은 귀국해 육영 공원 등의 근대식 학교를 설립하고, 경복궁에 발전기를 설치하여 궁궐에 전구를 밝히는 등 조선의 근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는 김옥균의 죽음을 각자의 입장에서 이용하였다. 청은 자국 군함에 김옥균의 시체를 실어 보내 조선 정부의 점수를 얻었고, 조선은 그 시신을능지처참하여 반역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는 본보기로 삼았다. 일본은 김옥균 암살사건과 동학 농민 운동을 연계하여 청·일 전쟁의 구실로 활용하였다.

1845년 영국 함대는 남해를 지나다 거문도를 처음 본 후 이를 포트해밀턴(PortHamilton)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1885년 영국은 동아시아 남쪽으로 진출하는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구실로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였다. 이를 ‘거문도 사건‘이라 부른다. 영국군은 거문도를 포트해밀턴이라 부르며 섬 안에 포대를 만들고 영국 국기를 게양하였다. 영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의 주권을 짓밟는 명백히폭력적인 행동이었다.
거문도는 당시 ‘화려한 배들이 모여드는 곳‘, ‘동양 최고의 요충지‘라 불리던 곳이었다. 일본의 나가사키와 중국의 상하이를 오가는 항로에서 험한 바람과 파도를 피하는기항지로 거문도만 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1854년에 러시아 군함이 거문도에 정박하여 주민들과 교류한 일이 있었고, 다른 나라들도 거문도에 관심을 두고있었다. 더구나 영국 입장에서는 러시아의 극동 함대가 대한 해협을 통과할 때 이를공격하는 전진기지로도 안성맞춤이었다.

이후에도 거문도는 무수한 외국인과 접촉하면서 조선 어느 지역보다 빨리 근대 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등대가 설치되었고, 우리나라최초로 테니스장도 생겼다. 영어나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주민들도 생겨났다. 적어도거문도 주민들에겐 서양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다.
현재 거문도에는 거문도 사건 당시 병으로 세상을 떠난 영국인들의 묘지가 남아 있다.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나쁘지 않았던 거문도 주민들은 영국인 묘지를 외면하지 않고 관리해 왔다. 이를 알게 된 영국 대사관은 거문도 주민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거문도의 중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제국주의 침략이 일어난 거문도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한국과 영국 사이에 우호의 상징이 되었다.

독립 협회는 1896년 7월 창립 후 국민들에게 독립문 건설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조선의 독립은 정부만의 경사가 아니라 인민의 경사이니 함께 돈을 내자는 것이었다. 왕실이 왕태자(후에 순종) 명의로 1,000원이라는 거액을 기부했고, 국민의 모금으로12월 말에는 4,700여 원의 기금이 모였다. 독립문은 대한 제국을 선포한 직후인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되었다. 독립문의 앞쪽에는 한글로 ‘독립문‘과 태극기, 그리고 대한 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을 새겨 독립의 의지와 함께 새로 태어난 대한 제국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었다. 반면 중국 사신이 들어오던 방향인 독립문의 뒤쪽에는 보란 듯이 중국인들이 읽을 수 있는 한자로 ‘獨立門(독립문)‘ 글자를 새겼다.

조선의 마지막 선비라 불리는 황현은 양무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초야의 선비 눈에도 보이는 것이 왜 고종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까?
그 군함이 도착하자 어떤 사람은 시급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반환을 요청하였으나 누차일본인의 질책을 받아 부득이 받은 것이다. 그러나 군함은 고물인 데다가 누수까지 되어 빨리항해할 수 없었으므로 일본인을 고용하여 수선 작업을 벌이는 바람에 전후에 걸쳐 거액의 비용이 소모되었다
황현, 『매천야록』

헐버트는 조선에서 처음 한글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배운 지 4일 만에 한글로 된 책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글을 가리켜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라고 평가하였고, 「조선 글자」라는 논문까지 영문으로 발표하였다. 또한글로 된 세계 지리서인 『사민필지(직접 저술하였다. "양반과 평민 모두知)를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의 사민필지는 육영 공원과 배재학당에서 세계지리 교과서로 사용되었고, 나중에 한역본과 국한문혼용본으로 재출판되어 일반인들이 세계의 역사와 지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주시경과 함께 한글 연구도계속하여 『독립신문』에 본격적으로 띄어쓰기와 점찍기(쉼표, 마침표)를 도입하는 등 한글 문법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고구마 기지시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민씨 세력의 중심인물이었던 민영익은 칼을 여러곳에 맞아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당시 조선의 외교 · 재정 고문이었던 뵐렌도르프는민영익을 자기 집으로 옮기고 미국인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알렌에게 치료를 요청하였다. 알렌의 처치 덕분에 민영익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일로 알렌은 고종과 왕비(명성황후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자 알렌은 자신의 사명인 선교를 위해 병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고종에게 병원 설립을 건의하였다. 고종 역시 근대식 시설들을 설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한방 치료를 하던 기존의 혜민서를 없애고 제중원을 세웠다(처음 이름은 ‘광혜원‘이었는데, 2주 만에 제중원으로 바꾸었다), 흉가나 다름없던 홍영식의 집은 이렇게 서양식 병원으로 재탄생하였다. 이 자리는 지금 헌법 재판소(서울 종로구)가 있는 곳이다.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 중에 미국에 가면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는 말을 믿고사진 결혼을 했지만, 실제로는 열악한 농장 노동에 시달린 예도 있었다. 왼쪽 사진 속천연희 역시 진주에서 중·고등 과정을 다닌 엘리트 여성이었는데, 일본의 통치에서벗어나 학교에서 배운 정치적 자유를 얻기 위해 사진 신부를 택하였다. 하지만 막상남편은 자신보다 27세나 많은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생계를 책임지며 자식을 교육하였고, 독립운동도 후원하였다. 다른 여성들도 각종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이들은 안중근의 재판 비용을 모으거나,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대하는 전보 발송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였다. 또한 3·1 운동, 간도 참변 피해자를 위한 모금 활동도 전개하였다. 낯선 땅에서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었지만, 이들은 식민지 조국을 잊지 않았다.

매켄지는 자신의 저서 『자유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 서문 마지막에 "나는 자유와 정의를 기원한다(I plead for Freedom and Justice)."라고 썼다. 매켄지가 한국을 도운 것은 결코 동정심이나 정치적 계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의병전쟁과 3·1운동에서 자유를향한 한국인들의 갈망과 불의로 가득한 일제의 폭압을 보았다. 자유인으로서 그는 폭압에 맞서 싸우는 또 다른 자유인들을 돕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2014년 대한민국 정부는 매켄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러한 학생 조직 결성 경험은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당시 큰 힘을 발휘하였다. 독서회 회원들은 학교 간 연락을 맡으며 학생 시위를 이끌어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특히 장재성은 투쟁 방향을 지휘하고 다른 지역과 긴밀히 연락해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전국으로 확산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 일로 그는징역 4년 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출소 후 광주학생항일 운동 참가자들과 비밀 조직을모색하다 검거되어 또 한 번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장재성은 일제 강점기에 사회주의자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해방 후에는 좌파 활동에 참여하였다. 공산주의 체제와 대립하던 미군정은 그의 활동을 용납하지 않았고, 결국 1948년 7년 형을 받고 다시 투옥되었다. 그리고 투옥 중에 6·25 전쟁이 일어나자 북한에 동조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정부에 의해 처형당하였다. 조국의독립운동에 힘썼지만, 이후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선정에서도 제외되었다. 그에 대한제대로 된 평가는 언제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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