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드러난 ‘높으신 분들의 연합‘은 이런 상상력 자체가 쓸모없음을, 아예 다른 세계가 있음을 증명했다. 어찌어찌 특목고에, 명문대에 진학하는 것만으로 경쟁은 끝나지않는다. 그건 시작일 뿐이고, 격차는 그 안에서 다시 ‘사람의 급에 따라 천지 차이로 벌어진다.
가난한 가정에서도 자녀 교육만큼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웬만한 중산층도 자녀를 학원에 보낼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제법 끙끙거린다. 하지만 정말로 성공하는 사람들은 돈만 있지않다. 높은 지위에서 맺을 수 있는 인간관계를 총동원하여 좋은결과를 도출한다. 사회적으로 맺은 인연을 마치 돈처럼 사용하는 셈인데, 밤낮없이 부모는 돈 벌고 자녀는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는 가정에서는 결코 구할 수 없는 일종의 ‘사회적자본‘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라는 사실은 세상 이치지만,
너무 높게 날고 있는 모습을 눈으로 마주하는 것은 정말 괴로운일이다.
이런 사회적 문제는 쉽게 조정되지도 않는다. 고교 블라인드제가 효과가 없는 이유다. 출신 학교의 후광효과를 방지하고자 수시전형에서 학교 이름을 가리곤 있지만, 서울대 수시 최초 합격자 수 상위 30위 안에 일반고는 한 곳도 없다. 학교 이름을 감춘들, 그 학교에 들어갈 만한 이들이 지닌 화려한 생애과정이 숨겨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각종 공모전이니 표창 경력 등을 기재하지 않도록 하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런 걸 받는 이들은 굳이 서류로 증명하지 않더라도 말하는 게 이미 다르다. 몇 가지 질문에 답하는 것만 봐도 높은 수준이 확연히 드러난다. 사람들은 이 차이에 대해, 객관적인 능력의 차이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한다. 능력의 차이를 야기한 계층이나 부모의사회적·경제적 지위는 없는 셈 친다. 블라인드 테스트가 오히려차별을 정당화해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불평등은 어떤 단계를지나쳐 버리면 무슨 수를 쓴들 그 간극이 좁혀지기는커녕 더 벌어질 뿐이다.
조국 사태 당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가 몇차례 있었다. 언론은 대학생들이 공정에 분노했다면서 보도하기 바빴지만, 이들 대학을 제외한 다른 학교 학생들은 별로 동참하지 않았다. 그 청년들의 눈에는 이른바 명문대라고 하는 곳에 다니는 학생 역시 ‘그들만의 리그‘를 충실하게 살아온 이들로비춰졌기 때문일 거다. 사실이 무엇인들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없다. 좋은 환경에서 자랐기에 공부도 잘할 수 있었을 명문대생들이, 평소 다른 청년들에게 박탈감을 느끼게 했을 그들이 갑자기 정의를 외치며 자신들의 소외감과 억울함을 호소하니 어찌공감할 수 있겠는가. 명문대 학생들의 스펙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리더십 캠프, 해외 봉사 활동 등의 기회는 결코 누구에게나열려 있지 않다.

공정한 불평등이라는 착각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자신이 직접 3루타를 친 것처럼 생각한다."
능력주의가 공정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현이다.
집안의 경제력이 능력으로 이어진다는 연구 결과는 차고 넘친다. 부모의 자산이 클수록 자녀는 보다 경쟁력 있는 학교에 다닌다. 자녀를 공부시키려면 대치동이나 목동에 살아야 한다고들 하는데, 그 동네 아파트값은 확인할 때마다 숨이 막힐 정도다. 부모의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자녀들은 품질이 뛰어나고 결과도 좋은 사교육을 받는다. 자식 잘 되게 하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비슷하지만, 한 달 사교육비 30만원과 300만 원이 같을리 없다. 이뿐이겠는가? 부모의 화려한 인적 네트워크는 자녀의생애과정을 훨씬 풍요롭게 한다. 방학을알차게 보내는 수준 자체가 다르다. 심지어 안정적인 생활에서 오는 부모의 건전한 생활 습관은 그 자체가 자녀들에게 훌륭한 모범 사례가 된다. 잘먹고, 잘 쉬고, 게다가 힘들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두께가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전문직이기 때문에 가능한 부모의 특별한 언어능력조차 자녀의인생을 좌우한다. 항상 궁금증을 가지는 태도, 그리고 이를 예의있게 질문하는 습관은 교사의 관심을 끌게 하니 말이다. 정리하면,뱁새와 황새는 많이 다르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자신의 성공을 운이라고 생각하라"는 말처럼, 3루까지 가 있는 건 우연이라 치더라도 3루에서 홈으로 들어가 득점을 올리는 것도 만만치 않다는 거다. 3루에 안착만 했다고 경쟁이 끝나는 게 아니다. 1루도 가지 못한사람에겐 부러운 고민이겠으나, 3루 주자는 나름의 긴장을 한다. 3루에 있다고 모든 주자가 홈으로 무사히 들어오지는 않는다. 타자가 힘없는 내야 땅볼이나 멀리 뻗지 않는 외야 플라이를 치면 3루 주자는 생사를 걸고 달려야 한다. 슬라이딩을 해야하고 포수와 충돌하는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 상황이 9회말 투아웃에 벌어진다면 주자가 팀의 승패를 좌우한다. 자신이 대주자로 투입되어 실제 시합에 참여한 건 몇 분에 지나지않을지 모르겠지만, 그날의 주인공은 마지막 결승 득점을 올린그 선수다. 게다가 부상이라도 입었다면 온갖 스포트라이트를받을 수밖에 없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할 거다. "이 한 번을 위해서 지금까지 흘렸던 엄청난 땀이 있었습니다. 매일 훈련, 또훈련했죠. 기회가 왔고 제가 잡았습니다!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가능했습니다. 역시 땀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능력주의의 모순은 여기서 등장한다. 3루까지 어떻게 갔는지는 잊게 하고, 3루에서 홈까지 들어온 능력만이 주목받는다.
멋진 슬라이딩을 하느라 더러워진 유니폼이 노력의 증거가 되면서, 전체 판에 흐르고 있는 불평등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린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부단하게 ‘공정한 불평등‘은 사회를 더이롭게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들의 눈에 입시 비리 뉴스에나오는 내용들은 3루 주자가 반칙을 해서 홈으로 들어온 ‘나쁜불평등‘이지만, ‘법만 어기지 않았다면‘ 능력에 따라 결과를 얻고 보상을 차등적으로 받는 것은 그 자체가 누군가에게 동기부여가 되기에 ‘좋은‘ 불평등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동기부여하는 시스템이 이미 불평등한데, 좋은 불평등이니 나쁜 불평등이니 하는 구분이 그렇게나 쉬울까 모르겠다. 물론 개천에서살다가 용이 된 사례를 내밀며 ‘아직 세상은 정직하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모든 통계는 개천이 그 자체로 불리함을 증명한다. 3루까지 남들보다 안정적으로 간 사람이 잘못된 것도아니고, 그 3루부터의 여정이 쉬웠다는 것도 아니다. 노력 끝에홈으로 들어온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게 3루에서 시작했기에더 ‘유리했다는‘ 사실을 감출 순 없다. 3루까지 가다가 아웃당한아무개와 출전도 못해 유니폼이 깨끗한 누구를 보고 ‘노력 부족‘
이라고 비난할 이유가 될 수 없다.
‘한국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강연을 다니다 보면 "자본주의라는 체제 자체를 없애는 것이 훨씬 빠른 해결책 아닌가요?"라고 묻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때마다 주변인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냐
면서 쳐다본다.약간 과격한 주장이긴 하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등장이 고작 몇백 년 전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판을 원래 그런 것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고정관념인 것도 사실이다.

철학자들은 ‘변화하려는 세상의 성질‘을 변증법을 통해 설명했다. 변증법은 ‘정‘(正)이라는 원래 상태가 ‘반(反)이라는 다른 패러다임과 다투다 ‘합‘(合)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등장으로이어진다는 역사의 이치다. 과거엔 노예제도와 신분제도를 우주의 질서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 당시에도 세상은 꾸준히 꿈틀거렸다. 무엇을 타파해서 무엇이 등장했고, 또 그걸 타파해서 다른 사회가 등장한 건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니 "자본주의를 뜯어 버리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자."라는 고민을 무조건망상이라고 볼 순 없다.
내 의견을 굳이 말해야 한다면, 내 답은 거기까지 가지는 않는다. 권력에 무소불위의 힘을 주지 않고, 커다란 자본주의 체제안에서 사회주의적 속성을 현명하게 응용하면 지금보다 더 좋은 사회가 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이 답이 그게 가능해서인지, 아니면 그것 외에는 불가능하기에 떠올린 별수 없는도달지인지 묻는다면 솔직히 당당하지 못하다. 내 생각은, 그게유일한 방법 아닌가 하는 현실적인 체념의 연장선일지 모른다.
주눅 들어 있음에도 들키지 않으려는 내 강박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알면서도, 역시나 자본주의만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유일한 체제라고여기는 사람이 절대다수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늘이 허락한 만큼만, 주어진 팔자대로만 살아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평생 비슷한 집단의 사람들만 마주 보고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피라미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 한 단계 상승할 때마다 삶이 달라지리라는 기대를신분이나 지위 따위에 구애받지 않고 남녀노소 꿈꾸게 한 체제는 인류 역사상 자본주의가 처음이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건방진 포부는 그동안 금기였지만, 자본주의는 ‘희망‘을 개인에게 선사했다. ‘상상‘을 가능하게 했다. 사람들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겠다는 각오로 버틴다. 내일은 오늘과 다를것이란 기대로 고통을 참는다. 그결과 불평등을 진제한 자본주의는 ‘불평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각오를 다진 개인들 덕분에맹렬히 전진했다.
우리는 일곱 번 넘어져서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껐다. 우리의 ‘정의‘ 관념은 이런 적자생존의 법칙 위에서 빚어졌다. 사람들은 ‘정의‘를 모두가 동등하게 실질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누린다는 측면이 아니라, 노력의 크기에 따라 각자 도달하는 지점이 불가피하게 달라지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결과가 불평등해도 노력한 만큼이니 공정하다 여겼다.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형태를 갖춘 근대 공교육은 ‘공정한 불평등‘ 논리를 부단히 가르쳤다. 계급과 상관없이 누구나 학교를 다니니 기회는 평등해졌다고 포장했다. 그러니 시험 결과에 승복하라고 주술을 건다. "결과로 증명하라!"라는 말이 부유하는 세상에선, 결과를 의심하는 건 공정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조국 사태는 이 판이 깨진 게 아니다. 이 판의 정밀함, 견고함, 그리고무서운 폭력성이 고스란히 드러난 일이었다. 불평등은 자본주의사회의 부작용 정도가 아니라, 매우 정교한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매일 속고 있다.

세상이 나를 보고 ‘사회가 그깟 글 몇 자로 바뀐다고 생각했어?‘라면서 비웃는 것 같았다. 그만큼 사회구조적인 모순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기 때문일 거다. 그러니 구체적인 정책을 만들기 위해, 관습적인 나쁜 문화를 뿌리째 뽑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특단의 조치를 고민해야 하는 건 분명하다.

결국 ‘나쁜‘ 뉴스는, 나쁘기에 멀찍이 비켜서서 겉만 핥으며 잠시나마 씩씩거리는 용도에 지나지 않게 된다. 비일상적인불행이 익숙해져도, 익숙해진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꼴이다. 이와 비례하여 사회구조라는 거대한 덩어리는 원래의 속성이 더 강화되고 더 무시무시해지며, 그 위압감에 평범한 개인들은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철학만으로 살아가게 된다.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이 사회는 사람이 만든 거고 그걸 바꾸는 것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주하기 싫어도 마주해야 변화가 가능하다. 일단 화들짝 놀라고, 아직도 이런일이 있냐고 탄식하고, 피해자를 추모하고, 재발 방지를 모색하는 고민의 연속만이 사회를 움직인다. 교통사고 사망률이 이런관심으로 줄어들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이 좋아진 거와 상관없이, 여전히 세상이 엉망이라고 여겼기에 조금이나마 나쁜 수치가 줄었다. 염세적이고 비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건 아닐까 하는 괜한 성찰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사회의 슬픔은 조금이나마 줄어들 것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의 민낯에 익숙해지지 말자고 다짐한다. 안 그래도 사회가 엉망인데, 굳이 무거운 이야기로 사람들의마음을 스산하게 만들 필요가 있냐고 속삭이는 내 마음속 어딘가의 흐트러짐을 다잡는다. 지금 여기의 모습은, 우리의 결과다.
다시 우리가 원인이 되어야, 사회는 변한다.

익숙해지지 말자. 누구 말대로 좋은 사람이 돼야지.

왜 박정희 대통령을 악마처럼 묘사했냐‘며 편향되었다고 지적하는
식이다. 그러면서 그 시절을 모르는 청소년들이 "균형 잡힌역사관"을 가지는 걸 방해한다고 덧붙인다. 과연 그러한가?독재라는 명확한 나쁜 사실을 말할 때 독재 과정에서 발생한좋은 업적을 함께 따지는 게 공정한 태도인가? 온갖 부정선거를 일삼으며 헌법을 바꾸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정치인을, 장기 집권을 하겠다는 정치인과 그 주변 권력을 비판하는 것에도 균형이 필요할까? 독재는 했지만 경제는 발전시켰다. 독재는 독재고 경제는 경제 아니냐는 표현은 여전하다. 그런 기계적인 균형 감각이 정치인 박근혜의 성공과 몰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걸 누가 부인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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