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 김상봉 철학이야기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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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에 대한 베르그송의 논의나 프로이트의 논의를 겹쳐서 읽은 사람들은 울음의 그림자를 보았을 것이다. 기쁨의 환희를 경험한 사람은 슬픔의 그림자에 당황하기도 했을 것이다. 근자의 라캉류의 파괴적 동형성론에 몰입하는 사람들에게 비극과 희극은 구별하기 어려운 아니 구별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한반도에서 비극이란 처량한 신세한탄이거나 무력한 자들의 팔자타령이 별다른 것이 아니라는 세간의 평가를 듣게 마련이다. 존재의 비르투와 운명의 포르투나의 관련성에 대한 마키아밸이의 논쟁점은 여전히 미궁 속을 헤메고 있는 것이다. 아렌트의 새로운 관계맺음이나 들뢰즈의 비르투 전략 등은 여전히 애매하고 혼성적인 어떤 것으로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져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자의 비극에 대한 꼼꼼한 이해는 좋은 디딤돌이 되어줄 것으로 보인다. 고통의 존재론의 아픔과 그것을 넘어설 자유의 열정이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이 땅의 기운을 통해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글쓰기 전략에서 저자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글쓰기에서 멀어져 편지글의 형식을 통해 독자와의 친밀한 소통을 시도했다. 그 성공여부를 떠나(대중적으로는 성공!) 시도를 아름답고 탁월한 것이다.

서구에 대한 평면적 비판에 대한 우려섞인 이전 글들에 비해 서구의 비극에 대한 탄탄한 이해를 드러내보이고 있다. 역-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에 경도된 저자가 서구의 헬레니즘 전통에 대한 내재적 소통을 통해 타자들과의 보다 너른 교통을 이뤄내길 바란다. 물론 저자와 우리들의 교통이 더욱 중요할 것이지만서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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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타자 현대의 지성 108
서동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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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에 대한 문학적 탐익은 과히 복마전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김현을 필두로 했던 푸코에 대한 열품이 이제는 들뢰즈 편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하이데거에 대한 내재적 소화가 부족한 상황에서 들뢰즈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그러한 열정을 꼼꼼하게 파고드는 글이다.

물론 저자는 들뢰즈에 교조적으로 강박되어 있지는 않다. 위선에 치를 떨며 위악의 전략을 펴는 들뢰즈의 한계가 타자성에 대한 망각이 아닌가 하는 상식을 이론을 통해 펼쳐놓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레비나스의 타자론으로 절충시킨다.

레비나스와 들뢰즈의 절충은 아무런 내재적 연관성을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이 인다. 하지만 주체적인 소화를 위한 이론적 시도는 충분히 긍정적인 것이다. 더구나 저자는 문학인 답게 대중적인 글쓰기를 할 줄 아는 이론가이며, 글을 제대로 소화할 줄 아는 몇 되지 않는 이론가이다.

레비나스의 결정적인 문제들 그리고 들뢰즈의 한계들을 구체화하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이들을 겹쳐놓았으나 그가 보여주지 않은 지층들을 떠올리며 읽는다면 이 글은 아주 매력적인 여행 안내서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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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질성의 포용 - 정치이론연구 나남신서 542
황태연 / 나남출판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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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성에 대한 무수한 논의가 유행이다. 타자성은 유행을 넘어 하나의 트렌드로 정착한 상황인 듯 보인다. 개나 소나 타자에 대한 수사를 잊어먹는 바보들은 없는 듯하다. 그 유행을 프랑스제 취임새에서 구했듯 일본의 가라타니에서 구했든 아니면 독일제에서 구했든 간에 타자성은 탈근대 논의의 흥기와 함께 상식 아닌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타자와의 구체적 관계에 대한 논의는 별 것 없는 상황이다. 유아론적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타자의 지평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당위론적 지적은 많지만 타자와 자아의 관계가 어떻게 구성되고 그 관계맺음의 윤리성과 복잡성을 가르는 논의는 미력하기 그지없다. 타자는 있으되 추상화된 타자성이 자타관계의 구체성을 막아서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이 점에서 칸트 도덕론의 황당한 옹호자로 오해되는 하버마스의 최근 결정판에 주목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실성과 타장성의 자매판인 이 글은 유쾌한 논쟁의 결실로 가득하다. 포용민주주의 기획을 향한 하버마스의 분투는 아름다운 성좌를 만들어 놓았다.

체계민주화 전략의 부재, 투쟁적 행위론의 오갈듬, 행위의 자기목적성 지평에 대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지평을 향한 하버마스의 고투는 섬세하게 살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 하버마스를 어린아이 손 목 비트는 양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푸코나 들뢰즈 류에 대한 과도한 탐닉에 비해 하버마스에 대한 내재적 소화는 여전히 부족해보인다. 아마도 보수적 학계가 하버마스를 소화불량의 상태로 인도해서인지 아니면 너무 얌전해 보이는 외양 때문인지, 하버마스는 그 떠도는 영향력에 비하면 정작 이론의 내재적 소화는 여전히 걸음마 단계인 듯 보인다.

하버마스의 이론적 첫걸음을 위해 그리고 가장 포괄적인 접근을 위해 효과적인 저작이다. 롤즈나 칸트, 슈미트, 루소, 로크 등과 정면 대결을 벌이는 하버마스라는 검투사의 즐거운 놀이를 관람하는 쏠쏠한 재미를 느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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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세기 이후 오퍼스 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 이후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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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권력을 야누스적인 이중성으로 단정짓는 논의. 예를 들어 폭력과 권력은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는 항간의 소문은 이론지평에서나 정치계, 언론계의 상식이다. 현실주의적 세상보기에서 권력은 폭력에 다름 아니고 폭력은 권력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타자를 하나의 수단으로 보는 유아론적 존재론에서 권력은 타자를 지배하는 폭력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 홉스에서 니체, 베버, 소렐, 사르트르 등은 모두 권력과 폭력의 구분에 실패하면서 자기보존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폭력과 권력을 구분하지 못한 이론적 결손은 존재의 윤리성을 구성할 비상구를 닫아거는 어리석은 행동이지만 아무런 부끄럼없이 자행되곤 하였다.

이와 달리 아렌트는 권력과 폭력을 간명하게 구분해낸다. 강점과 권위, 권력, 폭력 등을 구분하는 그의 솜씨는 여간 탁월한 것이 아니다. 권위나 자유에 대한 그의 해명의 문제를 섬세하게 논하는 것보다 폭력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폭력과 권력을 구분하는 것이지 않을까?

권력의 상징폭력성을 따지는 것에 부족한 한계를 드러내는 아렌트이지만 광기와 야만의 폭력과 권력의 차이를 혼돈하는 이들에게는 탁월한 노작임에 분명하다. 인간의 조건이 아렌트 이해의 이론적 첫걸음이라면 폭력의 세기는 정치적 글쓰기의 매력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글이다.

욕망과 권력을 마구 뒤섞는 논의나 자기긍정의 상호주관적 지평을 열지 못하고 자기보존의 강박에 휩싸인 전쟁기계론(들뢰즈)이나 민주주의보다 등 따시고 배부른게 최고라는 유사 자유주의의 비극 앞에서 권력 행위의 윤리성과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이들에게 꼭 넘어야 하는 고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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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와 하이데거
DANA R.VILLA 지음, 서유경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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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정치적 행위의 새로운 지평에 대한 탐구는 아직은 낯선 것이다. 집단행위의 열정은 우매한 군중의 비합리성으로 치부되거나 혁명적 실천으로 추앙될 때 정작 정치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황량하기 그지없다.

기든스의 대화민주의의나 하버마스의 협의민주의의 전략 혹은 근자의 최장집의 자유-민주주의(공화주의와 자유주의의 절출형) 전략은 근자에 유행하는 참여민주주의의 새로운 버전들이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정치적 실천의 전략들이 발딛고 선 지평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자기제한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체계내적 민주주의 전략의 내재화를 시도하는 이들에게 정치적 행위의 구체성과 복잡성을 탐구하는 것은 매력적이지만 치명적인 덫에 가로놓여 있다. 제도화의 딜레마에 대응하는 것은 물론 정치적 윤리의 구체성을 새롭게 구성해야 하는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더구나 복잡한 것은 보울즈와 진트스 혹은 코헨 아니면 우즈 등의 국가와 경제 체계의 내부의 민주화 전략은 물론 정치적 행위의 모순적 역동성을 가능케하는 조건과 행위전략이 이중적으로 제안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렌트 해석의 두 줄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에 대한 재해석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이다. 하버마스나 Benhabib는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으로 아렌트를 바라보고 들뢰즈류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경도되어 있는 상황이다.

빌라는 이런 아렌트 르네상스의 복잡성을 섬세하게 가르면서 무목적성의 지평에서 아렌트 행위의 모순성을 풀어놓고 있다. 아렌트의 공론장을 차이와 다수성을 긍정하는 싸움터형(agonistic)으로 모순적으로 긍정하는 빌라의 이론전략은 아렌트 내부의 복잡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협의지향성과 정통성 연관성의 한계에 갇혀 있는 것을 비판하면서 하이데거적인 무목적성 지평에서 세계소외에 맞서는 다수성의 가치를 긍정한다. 현대에서 불가능한 애도형 공공영역(ers publica)에 대한 추억을 상기시키는 시대착오를 보여주지만 새로운 정치실천에 대한 규제적 유토피아를 논쟁 지평에 견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좋은 지도책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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