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섭의 시네마 싸이콜로지
심영섭 지음 / 다른우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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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화장실에서 오래동안 소식이 없으면 그 사람의 건강을 의심한다. 청년기의 남자라면 성적 의심을 받응 것이고 여성이라면 소화계통의 문제로 인한 변비를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퍼세식 화장실에서 서양식으로 변하면서 화장실은 단순히 입에 넣어 남은 쓰레기를 처리하는 평면적인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화장실은 입에 넣어 남은 분비물을 덜어내는 해우소이자 새로운 정신적 욕망을 채우는 이중적 공간이 되었다. '사랑의 그릇은 채움으로써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비움으로서 채우는 것'이라는 에로스의 말처럼 화장실은 육체적 긴장을 덜어내고 정신적 충만함을 성찰하는 멋진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여전히 화장실은 비루한 존재의 불필요한 공간으로 치부되기 일수이지만 말이다.

저자는 화장실에 앉아서 프로이트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8) 그런데 아쉽게도 저자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저자의 논쟁들과 매력적인 글향기를 좋아해온 나로서는 참 안타까운 경험이다. 저자는 화장실의 열정과 흥취를 잘 모르는 듯 하다.

영화분석은 표면을 겉돌고, 존재에 대한 분석은 별다른 깊이나 폭을 드러내지 못한다. 다만 재미난 삽화가 너무 가벼운 글들의 무게중심을 잡아주고 있을 뿐이다. 쉽고 편하게 다가오는 영화와 정신분석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가 보자. 영화평도 정신분석도 하지못한채 어중간한 휴지가 되어버렸다. 비데가 없는 집이라면 밑 닦이기도 종이가 너무 질기다. 난 저자와 삼각연애를 해보고 싶었는데 애당초 저자는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아! 나의 과대망상은 저자의 다른 모습을 기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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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인가 현대의 지성 84
강정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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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실증주의의 환상이 지배하는 한반도.

민주주의를 배우면서 복종과 순종의 미덕만을 체화하는 이들에게 법이란 근대적 자율성의 근거가 아니다. 우리에게 법이란 강자의 허울이고, 강자를 정당화하기 위한 강제와 억압일 뿐이다. 서로 동등한 자들간의 자율적 자기지배를 위한 제도적 틀거리가 아니라 권력과 힘 그리고 자본을 가진 자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보호, 유지, 확대하기 위한 제도덕 덫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렸다.

법 권위주의와 테러체제에 길들여진 한반도의 역사에서 법은 단순히 지켜져야 하는 것이었지 왜 지켜져야 하는지 물을 수 없었다. 더구나 모든 이에게 지켜져야 한다는 강제가 동일하게 적용된 것도 아니다. 힘없고 돈없고 빽없는 이들에게 법은 노예법으로 강제되었지만 권력과 돈을 소유한 자들에게는 편법과 탈법, 불법이 허용되었다.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국가발전과 생존이라는 명목으로 불법은 정당화되었다. 지배자는 법을 어겨도 정당한 명분이 있는 것으로, 피지배자들에게는 억울하더라도 불법적 지배를 견뎌내고, 만약 저항하면 법의 이름으로 제도적 폭력이 행사되었다.

이런 모순적 법의 이중성에서 교과서는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되뇌곤 한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고전 인용에 대해 강정인은 과연 소크라테스의 그런 허접한 말을 했을 것인지, 비슷한 말을 했다면 어떤 근거였는지를 꼼꼼히 따져본다. 진부한 상식을 뒤집는 재미는 물론 공화주의적 참여의 근본적 참여의 문제로 세심하게 다루고 있는 좋은 책이다.

한국 보수주의와 극우를 구분하는 이론적 작업의 초석을 깐 저자의 노력은 반가운 것이다. 법실증주의의 함정은 물론 극우의 담론과 현실의 괴리를 정통 보수주의의 지평을 통해 성찰한다는 점에서 좋은 문제거리를 던져주고 있는 책이다.

만약 하버마스식의 구분인 법의 정당성과 정통성(주류 법학에서는 합법성과 정당성으로 구분하는)의 논의를 충분히 소화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꼭 거쳐야 하는 통과제의의 하나일 것이다. 자유주의적 법학의 탁월한 가치 중 하나는 자기지배의 가능성을 논하는데 있다. 법 정통성 논의는 그리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에서 그 원형적 모델을 수혈받을 수 있기도 하다. 시민불복종의 헌정적 가치를 논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오해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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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 - 학술총서 52
C.B.맥퍼슨 지음 / 인간사랑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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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는 마치 문학고전과 유사한 운명을 겪고 있다. 누구나 리바이어던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읽지 않는다. 다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기실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전쟁공포와 국가절대화의 경향에 대해 누구나 리바이어던의 괴물을 상투적으로 뇌까리지만 홉스에 대한 내재적 독해도 없는 상황에서 홉스에 대한 논박은 참으로 당혹스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

홉스와 로크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의 대표주자인 로크는 내재적으로 독해되어 왔으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로크의 시민정부이론조차도 꼼꼼히 읽혀지지 않는다.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강조한다는 로크의 기본 논의조차도 살펴지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적 소유권 이론의 관점에서 로크와 홉스를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당혹스러운 경험일 것이다.

물론 홉스의 절대주의적 (신봉건)국가를 근대국가의 원형으로 바라보는 점, 개인적 소유권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지않고 논의를 전개시키는 등의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근대적 개인의 가장 주요한 문제로 소유권 문제를 논의의 기초에 놓은 점. 그리고 노동과 국가에 대한 역사적 의표성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좋은 책이다. 포스트 논의의 황폐한 이론전략에 대비해서 소유와 노동, 국가에 대한 전면적인 재구성이 절실한 시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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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중독 - 미국이 군사주의를 차버리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
조엘 안드레아스 지음, 평화네트워크 엮음 / 창해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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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인의 자기보존의 강박은 괴상한 괴물들을 정당화하곤 했다. 위기와 공포를 파는 전쟁행상들은 신을 통해서든, 민주주의나 자유의 가치를 통해서든 자신을 선으로 치장한다. 자유와 평화라는 명분으로 미국은 타자를 살해하고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소위 신이 부여한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십자군적 사명을 가지고서. '우리는 세계를 지배할 인종이다. …우리는 세계의 문명화를 담당하라는 사명을 신으로부터 위탁받은 특별한 인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역할을 방기하지 않을 것이다. … 신은 우리를 선택하셨다. … 야만스럽고 망령든 사람들을 통치하기 위해, 신은 우리를 통치의 달인으로 만드셨다.'(앨버트 비버리지,1900)

전쟁강박은 안전을 위해 타자를 (실제로 혹은 사회적으로) 죽이는 상황을 정당화하는 야만으로 드러나고 있다.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말처럼 '어떤 전쟁이든 대환영이다. 우리에게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경제적, 정치적 필요에 의해 자의적인 적(敵)이 설정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이 감행된다. 저자는 전쟁중독이라는 치명적 덫에 휘말린 미국의 역사와 현실을 간명한 삽화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저자는 묻는다. ㉠전쟁으로 부자가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과연 누구인가? 미 정부의 아름다운 수사처럼 억압받고 고통받는 제3세계의 인민들이 전쟁의 수혜자들인가? 저자는 헨리 키신저를 떠올리며 미국의 지배권력의 속내를 까발린다. “석유는 아랍인의 손에 맡겨두기엔 너무나 중요한 물건이야” 미국 군수산업체와 석유회사, 건설회사, 은행 예를 들어 GE, 록히드 마틴, 제너럴 다이내믹스, 보잉, 벡텍, 시티은행 등은 전쟁의 수요한 수혜자들이다.

또한 전쟁‘민주주의’를 파는 공화당의 부시정권도 전쟁의 수혜자들이다. 공화국을 공포의 소용돌이에 몰아넣고 세계시민들을 전쟁의 참화로 내모는 제국의 정치인. 그 야만의 정치가 전쟁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그 상스러운 문명적 야만에 대해 저자는 미국 공화국 안의 피해와 미국 공화국 밖의 피해를 밝혀보인다.

미국 공화국 내의 사회, 정치적 황폐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비판한다. 재정적자의 기하급수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안전 네트워크는 부실하기 그지없다.(44) 전쟁이 사회적 복지와 정치적 권리, 경제적 효율성을 담아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전쟁산업이 활황을 누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묻는다. ㉡전쟁은 불가피한 것인가? 미국이 벌이는 전쟁이 과연 정의로운가? 그러한 예방전쟁이 시민의 안전을 보장해주는가? 그러한 제국의 평화를 위한 ㉢전쟁의 피해자는 누구인가? 국방비로 인해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가? 전쟁의 구체적 피해자인 제3세계 세계시민들에게 과연 보편적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는가? 전쟁의 현실주의적 불가피성을 지적하며 정치윤리의 힘과 가능성을 비웃는 이들에게 그들이 숨기고자 하는 이해관계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좋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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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모루아의 사랑하는 기술
앙드레 모루아 지음, 정소성 옮김 / 나무생각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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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의 승리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디자인 포장과 편집은 맛깔스럽게 꾸며졌다. 물론 사진들은 오래된 춘화를 보는 듯 구태의연하지만 제목과 편집하나만으로도 손이 가는 책이다.

더구나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 조응하는 책이 아닐까하는 착각도 불러 일으킨다. 사랑하는 기술 다시 말해 존재의 행위 기술로서 사랑을 접근하는 아주 재미난 탐험을 제안하는 듯 보인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을 육체마저도 하나의 형이상학적 열정으로 신비화하고 하는가? 구체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사랑의 기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부재한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보자면 앙드레 모루아의 사랑의 기술은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반민주주의를 가르치는 학교교재 마냥 제목만 뻔드르르 하고 내실은 아무것도 없는 책이다.

책 선전을 위해 뽑아놓은 사랑의 구절을 빼면 기실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는 책이다. 사랑의 경구와 책 내용은 따로 엇갈리며, 내용도 가부장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 골동품이다. 이런 책을 맛갈스레 포장해내는 상징권력이 놀라울 뿐이다. 그 상징권력의 폭력에 속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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