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중독 - 미국이 군사주의를 차버리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
조엘 안드레아스 지음, 평화네트워크 엮음 / 창해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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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인의 자기보존의 강박은 괴상한 괴물들을 정당화하곤 했다. 위기와 공포를 파는 전쟁행상들은 신을 통해서든, 민주주의나 자유의 가치를 통해서든 자신을 선으로 치장한다. 자유와 평화라는 명분으로 미국은 타자를 살해하고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소위 신이 부여한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십자군적 사명을 가지고서. '우리는 세계를 지배할 인종이다. …우리는 세계의 문명화를 담당하라는 사명을 신으로부터 위탁받은 특별한 인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역할을 방기하지 않을 것이다. … 신은 우리를 선택하셨다. … 야만스럽고 망령든 사람들을 통치하기 위해, 신은 우리를 통치의 달인으로 만드셨다.'(앨버트 비버리지,1900)

전쟁강박은 안전을 위해 타자를 (실제로 혹은 사회적으로) 죽이는 상황을 정당화하는 야만으로 드러나고 있다.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말처럼 '어떤 전쟁이든 대환영이다. 우리에게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경제적, 정치적 필요에 의해 자의적인 적(敵)이 설정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이 감행된다. 저자는 전쟁중독이라는 치명적 덫에 휘말린 미국의 역사와 현실을 간명한 삽화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저자는 묻는다. ㉠전쟁으로 부자가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과연 누구인가? 미 정부의 아름다운 수사처럼 억압받고 고통받는 제3세계의 인민들이 전쟁의 수혜자들인가? 저자는 헨리 키신저를 떠올리며 미국의 지배권력의 속내를 까발린다. “석유는 아랍인의 손에 맡겨두기엔 너무나 중요한 물건이야” 미국 군수산업체와 석유회사, 건설회사, 은행 예를 들어 GE, 록히드 마틴, 제너럴 다이내믹스, 보잉, 벡텍, 시티은행 등은 전쟁의 수요한 수혜자들이다.

또한 전쟁‘민주주의’를 파는 공화당의 부시정권도 전쟁의 수혜자들이다. 공화국을 공포의 소용돌이에 몰아넣고 세계시민들을 전쟁의 참화로 내모는 제국의 정치인. 그 야만의 정치가 전쟁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그 상스러운 문명적 야만에 대해 저자는 미국 공화국 안의 피해와 미국 공화국 밖의 피해를 밝혀보인다.

미국 공화국 내의 사회, 정치적 황폐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비판한다. 재정적자의 기하급수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안전 네트워크는 부실하기 그지없다.(44) 전쟁이 사회적 복지와 정치적 권리, 경제적 효율성을 담아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전쟁산업이 활황을 누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묻는다. ㉡전쟁은 불가피한 것인가? 미국이 벌이는 전쟁이 과연 정의로운가? 그러한 예방전쟁이 시민의 안전을 보장해주는가? 그러한 제국의 평화를 위한 ㉢전쟁의 피해자는 누구인가? 국방비로 인해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가? 전쟁의 구체적 피해자인 제3세계 세계시민들에게 과연 보편적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는가? 전쟁의 현실주의적 불가피성을 지적하며 정치윤리의 힘과 가능성을 비웃는 이들에게 그들이 숨기고자 하는 이해관계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좋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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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모루아의 사랑하는 기술
앙드레 모루아 지음, 정소성 옮김 / 나무생각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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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의 승리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디자인 포장과 편집은 맛깔스럽게 꾸며졌다. 물론 사진들은 오래된 춘화를 보는 듯 구태의연하지만 제목과 편집하나만으로도 손이 가는 책이다.

더구나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 조응하는 책이 아닐까하는 착각도 불러 일으킨다. 사랑하는 기술 다시 말해 존재의 행위 기술로서 사랑을 접근하는 아주 재미난 탐험을 제안하는 듯 보인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을 육체마저도 하나의 형이상학적 열정으로 신비화하고 하는가? 구체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사랑의 기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부재한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보자면 앙드레 모루아의 사랑의 기술은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반민주주의를 가르치는 학교교재 마냥 제목만 뻔드르르 하고 내실은 아무것도 없는 책이다.

책 선전을 위해 뽑아놓은 사랑의 구절을 빼면 기실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는 책이다. 사랑의 경구와 책 내용은 따로 엇갈리며, 내용도 가부장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 골동품이다. 이런 책을 맛갈스레 포장해내는 상징권력이 놀라울 뿐이다. 그 상징권력의 폭력에 속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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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 김상봉 철학이야기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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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에 대한 베르그송의 논의나 프로이트의 논의를 겹쳐서 읽은 사람들은 울음의 그림자를 보았을 것이다. 기쁨의 환희를 경험한 사람은 슬픔의 그림자에 당황하기도 했을 것이다. 근자의 라캉류의 파괴적 동형성론에 몰입하는 사람들에게 비극과 희극은 구별하기 어려운 아니 구별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한반도에서 비극이란 처량한 신세한탄이거나 무력한 자들의 팔자타령이 별다른 것이 아니라는 세간의 평가를 듣게 마련이다. 존재의 비르투와 운명의 포르투나의 관련성에 대한 마키아밸이의 논쟁점은 여전히 미궁 속을 헤메고 있는 것이다. 아렌트의 새로운 관계맺음이나 들뢰즈의 비르투 전략 등은 여전히 애매하고 혼성적인 어떤 것으로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져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자의 비극에 대한 꼼꼼한 이해는 좋은 디딤돌이 되어줄 것으로 보인다. 고통의 존재론의 아픔과 그것을 넘어설 자유의 열정이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이 땅의 기운을 통해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글쓰기 전략에서 저자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글쓰기에서 멀어져 편지글의 형식을 통해 독자와의 친밀한 소통을 시도했다. 그 성공여부를 떠나(대중적으로는 성공!) 시도를 아름답고 탁월한 것이다.

서구에 대한 평면적 비판에 대한 우려섞인 이전 글들에 비해 서구의 비극에 대한 탄탄한 이해를 드러내보이고 있다. 역-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에 경도된 저자가 서구의 헬레니즘 전통에 대한 내재적 소통을 통해 타자들과의 보다 너른 교통을 이뤄내길 바란다. 물론 저자와 우리들의 교통이 더욱 중요할 것이지만서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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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타자 현대의 지성 108
서동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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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에 대한 문학적 탐익은 과히 복마전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김현을 필두로 했던 푸코에 대한 열품이 이제는 들뢰즈 편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하이데거에 대한 내재적 소화가 부족한 상황에서 들뢰즈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그러한 열정을 꼼꼼하게 파고드는 글이다.

물론 저자는 들뢰즈에 교조적으로 강박되어 있지는 않다. 위선에 치를 떨며 위악의 전략을 펴는 들뢰즈의 한계가 타자성에 대한 망각이 아닌가 하는 상식을 이론을 통해 펼쳐놓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레비나스의 타자론으로 절충시킨다.

레비나스와 들뢰즈의 절충은 아무런 내재적 연관성을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이 인다. 하지만 주체적인 소화를 위한 이론적 시도는 충분히 긍정적인 것이다. 더구나 저자는 문학인 답게 대중적인 글쓰기를 할 줄 아는 이론가이며, 글을 제대로 소화할 줄 아는 몇 되지 않는 이론가이다.

레비나스의 결정적인 문제들 그리고 들뢰즈의 한계들을 구체화하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이들을 겹쳐놓았으나 그가 보여주지 않은 지층들을 떠올리며 읽는다면 이 글은 아주 매력적인 여행 안내서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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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질성의 포용 - 정치이론연구 나남신서 542
황태연 / 나남출판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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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성에 대한 무수한 논의가 유행이다. 타자성은 유행을 넘어 하나의 트렌드로 정착한 상황인 듯 보인다. 개나 소나 타자에 대한 수사를 잊어먹는 바보들은 없는 듯하다. 그 유행을 프랑스제 취임새에서 구했듯 일본의 가라타니에서 구했든 아니면 독일제에서 구했든 간에 타자성은 탈근대 논의의 흥기와 함께 상식 아닌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타자와의 구체적 관계에 대한 논의는 별 것 없는 상황이다. 유아론적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타자의 지평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당위론적 지적은 많지만 타자와 자아의 관계가 어떻게 구성되고 그 관계맺음의 윤리성과 복잡성을 가르는 논의는 미력하기 그지없다. 타자는 있으되 추상화된 타자성이 자타관계의 구체성을 막아서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이 점에서 칸트 도덕론의 황당한 옹호자로 오해되는 하버마스의 최근 결정판에 주목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실성과 타장성의 자매판인 이 글은 유쾌한 논쟁의 결실로 가득하다. 포용민주주의 기획을 향한 하버마스의 분투는 아름다운 성좌를 만들어 놓았다.

체계민주화 전략의 부재, 투쟁적 행위론의 오갈듬, 행위의 자기목적성 지평에 대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지평을 향한 하버마스의 고투는 섬세하게 살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 하버마스를 어린아이 손 목 비트는 양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푸코나 들뢰즈 류에 대한 과도한 탐닉에 비해 하버마스에 대한 내재적 소화는 여전히 부족해보인다. 아마도 보수적 학계가 하버마스를 소화불량의 상태로 인도해서인지 아니면 너무 얌전해 보이는 외양 때문인지, 하버마스는 그 떠도는 영향력에 비하면 정작 이론의 내재적 소화는 여전히 걸음마 단계인 듯 보인다.

하버마스의 이론적 첫걸음을 위해 그리고 가장 포괄적인 접근을 위해 효과적인 저작이다. 롤즈나 칸트, 슈미트, 루소, 로크 등과 정면 대결을 벌이는 하버마스라는 검투사의 즐거운 놀이를 관람하는 쏠쏠한 재미를 느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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