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컬렉션 (그책)
헤르만 헤세 지음, 배수아 옮김 / 그책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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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중학생 때 추천 도서로 지정이 되어서 읽어보고 그 후론 읽어볼 일이 없었다. "데미안"은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유명하고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다 보니 작품들이 대부분 유명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의 작품은 자아 실현이라는 공통의 주제가 있는 듯하다. 뻔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도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다.


  이 책을 짧게 정의하자면 나르치스라는 이름을 가진 수련수사와(나중에는 더 높은 자리에 오른다.) 골드문트라는 이름을 가진 생도(그는 다른 직업을 가진다.) 사이의 깊은 우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거기에 철학과 예술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가 더해진 소설이라고. 이렇게 짧게 줄인 말로는 영 따분한 소설로만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소설은 골드문트가 수도원을 벗어나 방랑 생활을 시작하면서 짐작조차 할 수 없던 새로운 일들이 연이어 벌어진다. 


  인물 설명을 잠깐 해보자면 나르치스는 철학자 유형이고 골드문트는 예술가 유형이다. 나르치스는 아버지로 대변되며 골드문트는 어머니로 대변된다. 나르치스를 아버지로 보는 이유는 그가 정신, 관념에 헌신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학교이고 학문이며 정신이다. 골드문트를 어머니로 보는 이유는 그가 감각에 헌신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감각, 예술, 육욕이며 삶 그 자체다. 


  우리가 아버지(정신)를 따르려면 학교에서 학문을 배우고 규칙을 배우면 된다. 그런데 어머니(삶)를 배우려면 학교에서만 배우는 걸로 부족하다. 골드문트는 마리아브론수도원에서 어떤 일을 계기로 탈출하여 방랑 생활을 시작하고 그의 방랑은 곧 어머니에 대한 배움의 길로 이어진다. 그런데 정신은 죽지 않고 죽 이어지지만 삶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곧 어머니는 우리를 낳기도 하면서 죽이기도 하는 분이다. 


  소설에서 말하는 어머니라는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보다 더 넓고 다양하게 해석하면 좋다. 나는 어머니가 우주 자체를 나타내는 단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어머니는 생명을 마냥 사랑하기만 하시지는 않는다. 중요한 점은 생명에게 죽음을 내리기도 하신다는 것이다. 흙에서 나온 우리는 반드시 흙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골드문트는 방랑 생활을 하던 도중 독일 전역을 휩쓴 페스트로 인해서 어머니의 이중성을 보게 된다. 


  페스트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지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독자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이 남았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다. 나르치스는 아버지께 평생을 헌신하며 학자와 신자로서의 삶을 묵묵히 걸어나가고 골드문트는 어머니를 사랑하며 예술에 대한 혼을 불태운다. 골드문트는 사랑하는 나르치스 덕분에 참 많은 것들을 배우고 깨우친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골드문트는 원하지 않으면서 억지로 수도원에 남아 수도사의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 안의 사랑과 자유 의지를 마음껏 펼치며 자신을 불태우면서 살아갔고 그런 이유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늙어버렸다. 생도 시절의 그는 잘생긴 외모와 특유의 사랑스러움 덕분에 많은 이들에게 호감을 얻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젊은 시절에 대단한 미남들이었다. 그 점이 수도사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몰라도 여자들의 사랑을 갈구하면서 떠돌이 생활을 한 골드문트에게는 상당한 이점이 되었다. 


  하지만 늙고 병이 들면서 여자들은 오지 않고 그의 곁에는 결국 나르치스만 남았다. 그래도 골드문트는 여자들을 탓하지 않는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고 죽는 과정이 온통 변화의 연속이듯이 사랑 또한 그럴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을까. 그래도 그는 행복한 남자였다. 오랫동안 이어온 우정은 끝까지 그의 곁에 머물렀으며 우정 또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자들끼리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모습을 보면 닭살이 돋을 것 같다. 그런데 소설이라 그런가 감동 그 자체였다. 


  '내가 살면서 너 때문에 힘든 점도 많았지만 너한테서 배운 것도 많았고 너로 인해서 고단한 삶에서 힘을 얻을 수 있었어'라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에 모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감동 받았다. 분명 나르치스의 말에는 그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었다. 수도원에서 골드문트가 남긴 예술 작품을 보면서 대쪽 같았던 나르치스도 벗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에 빠져서 살아갈 걸 생각하니 짠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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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와 혁명 - 2025년 제4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예소연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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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이상문학상 작품집보다는 김유정문학상 작품집이나 이효석문학상 작품집이 내게 맞다. 그러면서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찾아 읽은 이유가 뭐냐면 골고루 읽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에. 이번 년도 대상을 수상한 예소연 소설가의 작품인 '그 개와 혁명'은 참신하고 강렬하고 유머도 있었지만 내 취향의 글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짧게 떨어지는 문장들은 집중해서 읽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이 작품, 결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김경욱 소설가의 심사평도 감동적이었다. 혁명은 거룩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으며 그것이 '그 개'와 같이 뛰어놀 때, 작고 다정한 온기가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는…. 예전부터 혁명이란 단어가 거창하게 들려서 잘 쓰지도 않고 나는 잘 모르겠다고(실제로 잘 모르겠다)만 말했다. 부당한 일이나 인물에 맞서서 억압 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려는 일인가 싶기도 하고. 어쨌든 이 소설을 읽고 혁명을 위대함으로만 치장하지는 말아야겠단 생각을 하게 됐다.


  김기태, 문지혁 소설가의 작품은 취향에도 맞고 메시지도 좋아서 집중해 읽었다. 공책에 메모도 남겼다. 김기태 소설가의 '일렉트릭 픽션'에는 한국전력공사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한국전력공사는 전기를 생산하는 곳이 아니라 전기를 필요한 장소에 보내고 팔기도 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발전소는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집의 한쪽 창문에서 밖을 멀리 내다보면 여러 대의 풍력발전기가 작동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몸체는 우아하고 세 개의 날개가 돌아가면서 전기를 생산하는데 가까이서 보면 거인이다. 안산, 시흥에 살 때 가까이서 볼 일이 꽤 있었다. 풍력발전기 안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그걸 타고 올라가 수리도 할 수 있다고 들었다. 각각의 풍력발전기가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전기를 생산해내는 게 꼭 사람과 비슷하단 생각도 든다. 이건 소설 내용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각자의 몸에 전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방전이 되도록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봐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다. 공동 주택에서 '익명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소설 속에 나오는 글인데 계속 기억에 남을 듯하다.)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지내야 한다. 


  취미 생활을 집안에서 하려면 되도록 정적이어야 하고 동적이고 소음을 유발하는 취미 생활은 악행이요, 민폐에 불과하니, 힘든 세상에서 마치 단비가 되어줄 삶의 소소한 즐거움은 슬프게도 금지 사항이 되고 만다. 나도 공동 주택에 살 때 많이 생각해봤던 문제라 깊이 공감하면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문지혁 소설가의 '허리케인 나이트'는 여러가지 면에서 좋았다. 


  잘 다듬어진 문장에 인물의 내면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점도 그렇고, 결말도 신선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넘쳐서 하는 행동도 여유가 넘치는 한 남자와 가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넘친다고 할 수는 없는 한 남자가 있다. 후자의 남자가 전자의 남자, 그러니까 자기 친구를 은근히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도 남과 다를 바 없다고, 너에게도 시궁창은 있을 거라고 여기며 은근히 까려고 하는 장면이 나올 때 글을 읽는 내가 왜 이렇게 몸이 꼬이는지 모르겠다. 


  내친 김에 작가 인터뷰 내용도 세심하게 읽었다. 문지혁 소설가는 물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물이 계급에 있어 중요한 듯하다고. 든든한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은 땀이나 눈물을 덜 흘려도 될 것 같고, 경제력이 부실한 사람들은 더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할 것 같다고. 정말 그렇지 않은가. 예전에 7월 한 달 내내 폭우가 쏟아졌을 때 반지하에 살던 사람들이 물 때문에 피해를 입었던 일이 떠오른다. 


  서장원 소설가의 '리틀 프라이드'는 아름다운 외모와 성(性)에 대한 이야기였다. 소설 속 흥미로웠던 문장을 옮겨 적는다. 사람들은 트랜스젠더이자 평균 신장에 한참 못 미치는 왜소한 남성이 '위대한 개츠비'가 되거나 '캡틴 아메리카'를 연기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본문 205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떠오른 것이 하나 있다. 


  디즈니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인 '인어공주, 백설공주'를 실사화하면서 여배우를 캐스팅했는데 두 작품 다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생김새도 예쁘다는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을 뽑았다. 배우가 세간에 공개되고 사람들은 영화와 두 배우를 비난했다. 그런데 비난하는 사람들의 파가 갈렸다. 한쪽에서는 흑인 여성도 안 되고, 특히 못생긴 여성은 더욱 어울리지 않는다는 입장.


  다른 한 쪽에서는 흑인이건 백인이건 그런 점은 중요치 않으나 못생긴 외모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일단 인어공주, 백설공주는 우리 머릿속에는 둘 다 백인 여성으로 인식 되었는데 특히 백설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눈처럼 흰 피부를 가진 여성임이 거의 확실하다. 인어공주는 까무잡잡한 피부여도 상관없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못생긴 여성이 인어공주, 백설공주를 연기함은 어떤가. 


  그건 이상하다. 왕자가 개성 있는 외모를 좋아했다는 설명이 미리 깔렸다면 대중은 그럭저럭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설명도 없이 대뜸 못생긴 여성이 왕자와 로맨스를 함은 대중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니 못마땅하다. 여자든, 남자든, 잘생기고 예쁜 외모를 좋아함은 죄가 아니지 않은가. 죄는 외모나 인격을 함부로 깎아내림이 죄다. 


  위대한 개츠비나 캡틴 아메리카도 미리 그들의 외모에 대한 설명이 깔렸다면 대중은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 설명도 없이 작고 왜소한 남성이 위대한 사랑을 하고, 영웅이 됨은 못마땅하다. 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영화가 특별한 수작이라면 배우들도 얼마든지 빛이 날 수 있겠지만. 그런데 트랜스젠더가 위대한 개츠비가 되고 캡틴 아메리카가 되는 건?


  왜 꼭 그런 질문을 해야 할까. 그들을 그런 역에 캐스팅 할 게 아니라 그들 자체로 잘 어울리고 빛날 수 있는 역할을 주면 좋을 일을 가지고. 사람은 다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게 다르다. 다음으로 정기현 소설가의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은 읽는 동안 왜 그렇게 집중이 안 됐는지 잘 모르겠다. 글 속에서 수없이 질문을 던지는 화자 때문에 집중을 못한 부분도 있는데 희한하게 내용이 기억에 잘 남지 않았다. 최민우 소설가의 '구아나'는 집중해서 읽었다. 


  딱 요즘 시대 젊은이들의 이야기여서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요즘 젊은 세대는 소셜 네트워크나 유튜브에서 상당한 즐거움을 얻고 중독이 되다시피 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유튜브는 비교적 긴 동영상도 얼마든지 인기가 많을 수 있지만 쇼츠는 금방 보고 넘길 수 있어서 유튜브에 접속하면 매우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쉽게 보고 빠르게 판단을 내리게 되니 영상의 진위 여부도 제대로 따지지 않고 믿게 되는 경우도 많다. 


  사람들은 점점 소셜 네트워크나 유튜브를 보면서 세상을 받아들이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저울질해가며 판단하는데 익숙해졌다. 자극적인 영상이나 남을 비난하는 영상을 보면서 흥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선한 영향을 주는 영상을 보면서 위로를 받기도 한다. 제대로 된 지식을 재미있게 배우는 일도 가능하다. 아무래도 문제는 사람들이 자꾸만 자신이 원하는 행복보다 온라인에서 다른 사람들이 더 좋다고 추천하는 것들을 실천하고 인증하는 데서 오는 행복에 목을 매는 점이다. 


  입소문을 타지 못하는 것들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여기게 되며, 추천을 받지 못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로 여겨진다. 내가 좋다고 느껴도 만인이 시선을 주지 않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된다.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빈 세상이 떠오른다. 아니면 차 있더라도 뭔가 불만족스러운 감정들로 채워진 세상이 떠오른다. 휴대폰 화면, 모니터 화면 속 세상에 있는 좋은 것들을 따라잡느라 정작 자기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일은 너무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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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박완서 아카이브 에디션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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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에 또, 광년이란, 듣기에는 시간의 단위 같지만 실은 거리의 단위거든, 빛은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도는데 그 빛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자그마치 1년이나 가는 엄청난 거리, 알겠어?"

  "그것 쯤은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럼 왜 물었어?"

  "그런 거리를 실감할 수 있느냐 말예요? 짐작이라도 할 수 있어요? 게다가 몇 천, 몇 만 심지어 몇 억 광년 따위를 짐작이라도 할 수 있나 말예요?"

  "무슨 소리야?"

  "뭐라고 지껄이라고 해놓구선……. 별 삼 형제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허망해져서 그래요." 

- 본문 118쪽 中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의 마음과 마음 사이가 마치 광년이라는 단위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마음의 병이 깊은 사람이라면 그런 상태가 ON인 채로 죽 지속되고 있지는 않을까. 소설 속 주인공인 '경아'는 사람들 속에서 광년이라는 단위만큼의 아득한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무섭고 두려운데 그런 두려움을 가시게 해주는 최고의 방법은 사랑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진정한 사랑이 존재할까. 옥희도 씨와의 사랑도 이룰 수 없고, 끔찍한 기억을 상기하는 고가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죽은 오빠들만 붙잡고 사는 어머니가 있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전쟁.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실행되어서는 안될 미친 짓이다. 사랑이 완전히 부재한 곳에서 전쟁은 벌어질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해서 부서지고, 분해된 가정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하필이면 아들들이 아니라 계집애만 살아남았다고 말하던 경아의 어머니를 떠올리면 아들들이 죽기 전에도 그녀가 경아를 진정으로 사랑한 적이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아들에게 주던 사랑이 남으면 그녀에게도 마저 주고 그랬던 건 아닐지. 그런 생각은 물론 하기 싫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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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복간할 결심 1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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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이제껏 읽은 추리 소설도 얼마 되지 않는다. 추리 소설은 어쩐지 인물의 심리, 내면 세계를 묘사하는데 힘을 기울이기보다 얽히고설킨 인물들의 관계와 벌어진 사건, 상황에 대한 치밀한 묘사에 힘을 기울인다는 편견(?)이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소설 속에서 아주 단순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인물들의 속내를 그야말로 속속들이 알 수 있다면 물불가리지 않고 빠져들어 읽는 편이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활자잔혹극』은 나의 편견을 깨뜨려준 추리 소설이었다. 치밀하긴 하지만 내가 말하는 치밀함은 인간 심리에 대한 부분이 더 컸으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함이나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은 이 소설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의외였다. 그런 게 거의 없는데도 빠져들어 읽을 수 있는 추리 소설이라니. '유니스 파치먼'이라는 살인 사건의 가해자가 지닌 특이한 삶의 이력은 이 소설을 빠져들어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유력한 힘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녀는 문맹(!)이다. 읽는 법과 쓰는 법을 거의 모른다. 그런 사람이 사람들과 어울려서 지내려면 읽고 쓰는 법 외에 다른 능력과 감각을 부지런히 익혀야 하는데 실제로 그녀는 그랬다. 하지만 여기서 어울려 지낸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나도 안다. 그녀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기보다 사람들을 이용해 먹기를 즐겼다. 끈덕지게 살아남으려는 삶의 의지가 하필이면 그런 식으로 드러난 점이 안타깝지만 그 누구에게서도 글을 배우지 못했고 배울 생각도 하지 못했던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녀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방어 능력이나 조심성, 경계심이 깊어졌다. 그녀가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다. 그녀는 운 좋게도 커버데일 가(家)에서 가정부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게 되지만 글을 읽고 쓸 줄 알며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깊었던 커버데일 사람들 때문에 여러 번 곤혹스러운 일을 당하게 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다른 사람의 배려가 한 사람을 오히려 곤혹스럽게 만들었다니. 


  그 이유는 단순했다. 커버데일 사람들은 글을 알고 유니스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자신을 쉽사리 우습게 여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도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 또 조심하면서 살았다. 커버데일 사람들은 그녀의 조심성과 말 수 없음을 오히려 측은하게 여겨 신경 써서 대해주려 했지만 그런 방식은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리는 짓과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좀 무신경한 사람이었더라면 유니스 파치먼을 벼랑 끝으로 내몰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니다, 애초에 그들과 유니스 파치먼은 만나서는 안 될 관계였다. 제일 좋은 가정은 유니스 파치먼이 어렸을 때부터 글을 배워 세상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긍정적인 소통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가정이 부질없다는 점을 알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글을 읽고 쓰는 일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람이 두 눈으로 무언가를 보면서 세상을 배울 수도 있고 두 귀로 들으면서 세상을 배울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글을 읽고 쓰게 되면서 발전을 이룬다. 그리고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면 자기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정보를 다량으로 습득할 수 있다. 다른 나라,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얻고서 그들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면 세상을 이해해보려는 시도가 어느 지점에서 막히게 된다. 저자는 유니스 파치먼이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으며 그것을 배워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며 윽박지르는 어조로 글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글이 가둬버린 세상의 밖의 것을 보고 느낄 줄 알았다는 글을 썼다. 그녀가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상태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납득이 가능하게 설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저지른 살인이 정당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안다. 


  살아온 삶이 극명하게 달랐던 사람들이 서로를 오해하고 착각했구나, 너무 큰 오해와 착각을 했구나, 그런 안타까움이 들 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글을 읽고 쓰는 일이 세상을 한정적으로 가둬버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배워야 안전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은 작가도 알고 독자도 알고 그 누구도 모르지 않으리라. 울타리 밖은 무법지대다. 그곳에서 사람에 대한 이해, 관심, 사랑을 배우지 못한 누군가는 몰랐기 때문에 쉽사리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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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 (반양장) 문학과지성사 이청준 전집 11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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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의 마지막 문장, 마침표까지 남김없이 읽고 나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읽는 동안에 많은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다. 이청준 소설가의 문장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바빴다. 책을 덮고 시간이 조금씩 흐를수록 나만의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읽기를 잘 했다고 속으로 말했다. 쉬운 소설, 쉬운 문장만 받아들여서는 남는 게 별로 없는데 이런 소설을 읽어야지 스스로 사고하고 질문을 하게 된다. 


  예전에 스스로 '천국이란 무엇인가?'하고 물은 적이 몇 번 있었다. 모든 게 풍족하고 아픔도 없어서 더 바랄 것이 없는 상태가 천국일까, 그러면 인간은 정말 행복할까, 지겹지 않을까, 아무런 이야기도 더 만들어지지 않는 그런 상태가 정말 천국일 수 있을까. 함부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천국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만족할 수 있다면 이따금 지루해도 뭐 어떤가 싶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의 천국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다시 다른 천국을 꿈꾸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싶었다. 아니면 천국을 버리고 계속 꿈을 꾸면서 살아갈 수 있는 곳을 찾는 사람이 있을 수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아픈 사람의 천국을 떠올려 본 적은 없었다. 아프지 않으니까(정신적인 문제는 둘째 치고 신체적으로는) 당연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청준 소설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는 동안에 조백헌 원장은 나환자(문둥병을 앓는 환자)들의 천국을 진심으로 꿈꾼, 말 그대로 좋은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소설을 다 읽기 전에는 그랬다. 만약 이 소설이 나환자들이 결국 천국을 얻고 감동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식의 결말을 맺었다면 나도 눈물을 흘렸을 테고 별다른 생각과 질문도 가질 수 없었을 테다. 


  하지만 이건 결국 소설이다. 드라마, 주말 연속극이 아니다. 물론 동화도 아니다. 소설은 작가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하고 책을 읽는 사람도 계속 질문하게 만든다. 이청준 소설가는 등장인물을 통해서 질문했다. 나환자들의 천국은 무엇일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알 수 있듯이 나환자들이 섬 안에서만 머물면서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게 결코 천국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환자가 아닌 인간으로서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 욕구가 해소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조백헌 원장의 상당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들의 천국』은 독자가 함부로 눈물을 낭비하게 하지 않는다. 바닷길에 돌을 날라다 둑을 만드는 공사를 하던 원생들이 기어코 돌둑이 바닷물 위로 솟아 오르는 모습을 보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핑 돌기는 했으나. 


  그 둑의 의미가 무엇인지 성급한 눈물로는 깊게 생각해 볼 여지가 생기지 않는다. 조백헌 원장과 원생들, 이상욱 과장, 황희백 장로, 그 외에 많은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둑을 쌓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다시 둑을 쌓아 올리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천국으로 가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지속적으로 해나간다. 나는 그 에너지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너무 힘들 때엔 천국조차도 꿈꾸기가 어렵고 굳어버린 감정과 사고를 가지게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아무래도 이 소설은 인간으로서 가지는 그 에너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건강한 사람이든, 아픈 사람이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삶의 불씨를 결코 꺼지게 만들지 않는 에너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자꾸만 소록도에서 바다를 건너 탈출을 하려고 한 원생들도 그들 나름의 에너지로 삶의 불씨를 지펴나갔다는 생각이 든다. 조백헌 이전의 원장들이 보기엔 답답하고 화나기 그지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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