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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 (반양장) ㅣ 문학과지성사 이청준 전집 11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9월
평점 :
소설의 마지막 문장, 마침표까지 남김없이 읽고 나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읽는 동안에 많은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다. 이청준 소설가의 문장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바빴다. 책을 덮고 시간이 조금씩 흐를수록 나만의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읽기를 잘 했다고 속으로 말했다. 쉬운 소설, 쉬운 문장만 받아들여서는 남는 게 별로 없는데 이런 소설을 읽어야지 스스로 사고하고 질문을 하게 된다.
예전에 스스로 '천국이란 무엇인가?'하고 물은 적이 몇 번 있었다. 모든 게 풍족하고 아픔도 없어서 더 바랄 것이 없는 상태가 천국일까, 그러면 인간은 정말 행복할까, 지겹지 않을까, 아무런 이야기도 더 만들어지지 않는 그런 상태가 정말 천국일 수 있을까. 함부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천국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만족할 수 있다면 이따금 지루해도 뭐 어떤가 싶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의 천국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다시 다른 천국을 꿈꾸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싶었다. 아니면 천국을 버리고 계속 꿈을 꾸면서 살아갈 수 있는 곳을 찾는 사람이 있을 수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아픈 사람의 천국을 떠올려 본 적은 없었다. 아프지 않으니까(정신적인 문제는 둘째 치고 신체적으로는) 당연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청준 소설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는 동안에 조백헌 원장은 나환자(문둥병을 앓는 환자)들의 천국을 진심으로 꿈꾼, 말 그대로 좋은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소설을 다 읽기 전에는 그랬다. 만약 이 소설이 나환자들이 결국 천국을 얻고 감동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식의 결말을 맺었다면 나도 눈물을 흘렸을 테고 별다른 생각과 질문도 가질 수 없었을 테다.
하지만 이건 결국 소설이다. 드라마, 주말 연속극이 아니다. 물론 동화도 아니다. 소설은 작가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하고 책을 읽는 사람도 계속 질문하게 만든다. 이청준 소설가는 등장인물을 통해서 질문했다. 나환자들의 천국은 무엇일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알 수 있듯이 나환자들이 섬 안에서만 머물면서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게 결코 천국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환자가 아닌 인간으로서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 욕구가 해소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조백헌 원장의 상당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들의 천국』은 독자가 함부로 눈물을 낭비하게 하지 않는다. 바닷길에 돌을 날라다 둑을 만드는 공사를 하던 원생들이 기어코 돌둑이 바닷물 위로 솟아 오르는 모습을 보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핑 돌기는 했으나.
그 둑의 의미가 무엇인지 성급한 눈물로는 깊게 생각해 볼 여지가 생기지 않는다. 조백헌 원장과 원생들, 이상욱 과장, 황희백 장로, 그 외에 많은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둑을 쌓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다시 둑을 쌓아 올리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천국으로 가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지속적으로 해나간다. 나는 그 에너지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너무 힘들 때엔 천국조차도 꿈꾸기가 어렵고 굳어버린 감정과 사고를 가지게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아무래도 이 소설은 인간으로서 가지는 그 에너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건강한 사람이든, 아픈 사람이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삶의 불씨를 결코 꺼지게 만들지 않는 에너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자꾸만 소록도에서 바다를 건너 탈출을 하려고 한 원생들도 그들 나름의 에너지로 삶의 불씨를 지펴나갔다는 생각이 든다. 조백헌 이전의 원장들이 보기엔 답답하고 화나기 그지 없는 행동이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