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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아이들 1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9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평점 :
그림 속에 온 세상을 담으려 했던 어느 화가처럼 『한밤의 아이들』의 주인공이며, 화자인 '살림 시나이'도 이야기 속에 온갖 것을 모조리 담으려다 이야기가 산만하고 정신이 시끄러워지긴 했으나, 요지경상자 속 마냥 신기해졌음은 사실이다. 읽고 있다 보면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아찔한 기분이다. 이런 문장을 좋아한 적이 없었는데도 살만 루슈디의 소설은 취향을 뛰어넘어 만인을 사로잡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부커 오브 부커스'를 왜 받았는지 충분히 납득이 갔다.
살림 시나이는 그의 조상이나 지인들의 이야기를 그들이 자신에게 남긴 유산이라고 말한다.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사람은 이야기 없이는 살기 어렵다. 끝없이 쏟아지는 이야기 상자에 묻히고, 스스로 그것을 만들기도 한다. 작가가 아닌 사람들은 이야기를 짓거나 말할 때 기승전결을 갖추고 아름다운 문체를 곁들이는 등의 갖은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쉽게 생산하고 소비하는데, 물론 작가는 다르다.
그들의 노고를 떠올려 본다. 정신적인 노동도 많이 기울였겠지만 육체적으로도 상당히 힘이 들었을 것이다. 장시간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눈은 혹사 당하고 뻐근해지는 손가락, 손목과 등, 허리, 목…. 나는 작가가 아니라서 실제로는 어떨지 잘 모르겠다. 그냥 상상만 한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상상은 끝없이 이어진다. 안 그래도 복잡하고 수다스러운 살만 루슈디의 소설을 읽으면서 잡생각과 상상에 쉽게 빠지는 나는 책을 한 장 넘기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거나, 영상으로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살만 루슈디의 소설은 필수다. 글을 읽는 동안 독자의 머릿속은 살만 루슈디의 글로 꽉 차다가 폭발하는 지경에 이른다. 살림 시나이의 나라인 인도를 우화의 나라라고 하는데, 나는 처음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수많은 힌두교의 신들이 다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가령, 뱀신이 끔찍한 독(말)을 내뿜는 영화관 지배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듯이. 한 명, 한 명의 인도인은 다 어떤 특정한 신을 떠오르게 만든다. 종교가 없는 사람의 숫자도 만만치 않게 많은 한국에서 인도라는 나라는 신기하게 다가온다. 사실 모든 인도인이 힌두교도는 아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고, 믿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시도 때도 없이 내란과 전쟁이 벌어진다. 그 또한 나에게는 색다른 부분이다. 믿는 종교가 문제가 되어 큰 싸움으로 번진다는 점이.
살림 시나이는 어린 시절에 전 인도인의 목소리를 수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그 말을 가족들 앞에서 꺼냈을 때 무슬림(이슬람교를 믿는 사람) 집안에서 대천사를 들먹였다는 이유로 집안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천사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고백했으니 아버지는 그가 거짓말을 하는 동시에 천사를 욕보였다고 오해했음이 분명하다. 하여간 다른 사람의 말을 수신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내면을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인도가 영국에게서 독립한 그 날(8월 15일), 자정에서 한 시 사이에 인도에서 태어난 이른바 '한밤의 아이들'은 특별한 재능을 부여 받았는데,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태어난 아이일수록 능력은 특별했고 한 시에 가까운 시간에 태어난 아이일수록 능력은 보잘것없었다. 살림 시나이와 그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시바는 자정에 태어났다. 이 이야기도 정말 매력적이지 않은가. 내가 만약 신에게서 특별한 능력을 받는다면 뭐가 좋을까, 고민하게 된다.
물론 그런 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내림을 받는 것이지만. 내가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자 문장은 선택 받은 한밤의 아이들이 살림의 머릿속에서 토론을 벌일 때였다. 1001명의 아이 중에서 시간여행자인 수미트라는 아이답지 않은 비관론자였다. 소설 속에서 내가 좋다고 느낀 문장을 옮겨 적는다.
"내 말 잘 들어!─이거 다 쓸데없는 짓이니까─우린 뭘 시작하기도 전에 끝장나고 말 거야!" 하고 말했을 때도 우리 모두는 그를 무시해버렸다. 어린이 특유의 낙관주의 때문에─한 때 우리 외할아버지 아담 아지즈가 걸렸던 병과 똑같지만 훨씬 더 강력한 형태의 낙관주의병 때문에─우리는 한사코 어두운 측면을 보지 않으려 했고, 그래서 '한밤의 아이들'의 존재이유는 모조리 전멸하기 위해서라고, 우리 모두가 멸망하기 전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아이는 우리 가운데 단 한 명도 없었다. (본문 479-480쪽)
이 문장은 읽는 사람에 따라서 해석이 다를 수 있고, 또 내 생각은 맞지 않을 수 있지만 일단은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말하는 '훨씬 더 강력한 형태의 낙관주의병'은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대낮처럼 밝고도 확고한 삶만을 바라보는 셈이다. 반면에 '어두운 측면'은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사라진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자리 잡은 상태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명백한 사실 때문에 삶의 의미가 생긴다.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확실함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잘 하고(죽으면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르니까), 무한하지 않은 인생에서 시간 내에 꿈을 펼치기 위해 움직인다.(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꿈은 계속 뒤로 미루기만 하는 게 가능하므로) 죽음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죽음이 있어서 인간은 살아야만 한다. 죽음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간은 모두 열심히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는 점은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