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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아이들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9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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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속에 온 세상을 담으려 했던 어느 화가처럼 『한밤의 아이들』의 주인공이며, 화자인 '살림 시나이'도 이야기 속에 온갖 것을 모조리 담으려다 이야기가 산만하고 정신이 시끄러워지긴 했으나, 요지경상자 속 마냥 신기해졌음은 사실이다. 읽고 있다 보면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아찔한 기분이다. 이런 문장을 좋아한 적이 없었는데도 살만 루슈디의 소설은 취향을 뛰어넘어 만인을 사로잡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부커 오브 부커스'를 왜 받았는지 충분히 납득이 갔다. 


  살림 시나이는 그의 조상이나 지인들의 이야기를 그들이 자신에게 남긴 유산이라고 말한다.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사람은 이야기 없이는 살기 어렵다. 끝없이 쏟아지는 이야기 상자에 묻히고, 스스로 그것을 만들기도 한다. 작가가 아닌 사람들은 이야기를 짓거나 말할 때 기승전결을 갖추고 아름다운 문체를 곁들이는 등의 갖은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쉽게 생산하고 소비하는데, 물론 작가는 다르다. 


  그들의 노고를 떠올려 본다. 정신적인 노동도 많이 기울였겠지만 육체적으로도 상당히 힘이 들었을 것이다. 장시간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눈은 혹사 당하고 뻐근해지는 손가락, 손목과 등, 허리, 목…. 나는 작가가 아니라서 실제로는 어떨지 잘 모르겠다. 그냥 상상만 한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상상은 끝없이 이어진다. 안 그래도 복잡하고 수다스러운 살만 루슈디의 소설을 읽으면서 잡생각과 상상에 쉽게 빠지는 나는 책을 한 장 넘기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거나, 영상으로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살만 루슈디의 소설은 필수다. 글을 읽는 동안 독자의 머릿속은 살만 루슈디의 글로 꽉 차다가 폭발하는 지경에 이른다. 살림 시나이의 나라인 인도를 우화의 나라라고 하는데, 나는 처음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수많은 힌두교의 신들이 다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가령, 뱀신이 끔찍한 독(말)을 내뿜는 영화관 지배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듯이. 한 명, 한 명의 인도인은 다 어떤 특정한 신을 떠오르게 만든다. 종교가 없는 사람의 숫자도 만만치 않게 많은 한국에서 인도라는 나라는 신기하게 다가온다. 사실 모든 인도인이 힌두교도는 아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고, 믿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시도 때도 없이 내란과 전쟁이 벌어진다. 그 또한 나에게는 색다른 부분이다. 믿는 종교가 문제가 되어 큰 싸움으로 번진다는 점이. 


  살림 시나이는 어린 시절에 전 인도인의 목소리를 수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그 말을 가족들 앞에서 꺼냈을 때 무슬림(이슬람교를 믿는 사람) 집안에서 대천사를 들먹였다는 이유로 집안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천사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고백했으니 아버지는 그가 거짓말을 하는 동시에 천사를 욕보였다고 오해했음이 분명하다. 하여간 다른 사람의 말을 수신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내면을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인도가 영국에게서 독립한 그 날(8월 15일), 자정에서 한 시 사이에 인도에서 태어난 이른바 '한밤의 아이들'은 특별한 재능을 부여 받았는데,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태어난 아이일수록 능력은 특별했고 한 시에 가까운 시간에 태어난 아이일수록 능력은 보잘것없었다. 살림 시나이와 그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시바는 자정에 태어났다. 이 이야기도 정말 매력적이지 않은가. 내가 만약 신에게서 특별한 능력을 받는다면 뭐가 좋을까, 고민하게 된다. 


  물론 그런 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내림을 받는 것이지만. 내가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자 문장은 선택 받은 한밤의 아이들이 살림의 머릿속에서 토론을 벌일 때였다. 1001명의 아이 중에서 시간여행자인 수미트라는 아이답지 않은 비관론자였다. 소설 속에서 내가 좋다고 느낀 문장을 옮겨 적는다. 


  "내 말 잘 들어!─이거 다 쓸데없는 짓이니까우린 뭘 시작하기도 전에 끝장나고 말 거야!" 하고 말했을 때도 우리 모두는 그를 무시해버렸다. 어린이 특유의 낙관주의 때문에한 때 우리 외할아버지 아담 아지즈가 걸렸던 병과 똑같지만 훨씬 더 강력한 형태의 낙관주의병 때문에─우리는 한사코 어두운 측면을 보지 않으려 했고, 그래서 '한밤의 아이들'의 존재이유는 모조리 전멸하기 위해서라고, 우리 모두가 멸망하기 전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아이는 우리 가운데 단 한 명도 없었다. (본문 479-480쪽)


  

  이 문장은 읽는 사람에 따라서 해석이 다를 수 있고, 또 내 생각은 맞지 않을 수 있지만 일단은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말하는 '훨씬 더 강력한 형태의 낙관주의병'은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대낮처럼 밝고도 확고한 삶만을 바라보는 셈이다. 반면에 '어두운 측면'은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사라진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자리 잡은 상태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명백한 사실 때문에 삶의 의미가 생긴다.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확실함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잘 하고(죽으면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르니까), 무한하지 않은 인생에서 시간 내에 꿈을 펼치기 위해 움직인다.(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꿈은 계속 뒤로 미루기만 하는 게 가능하므로) 죽음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죽음이 있어서 인간은 살아야만 한다. 죽음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간은 모두 열심히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는 점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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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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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이 소설을 각색하여 만들었다는 점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 체로 소설을 읽었다. 어디까지 읽다 보면 이 소설은 반전이 기막히구나, 싶다가 어디까지 읽으면 이 소설은 페미니즘 소설이구나, 싶다가 어디까지 읽으면 이 소설은 시적인 장면으로 가득하구나, 싶다가 어디까지 읽으면 이 소설은 가면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890쪽 분량의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다르게 읽히고 다른 점이 보이는 특별한 소설이었다. 


  책을 상당 부분 읽고 난 뒤에 유튜브에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에 대한 영상을 찾아 봤다. 드라마도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그건 안 봤다. 영화의 결말은 정말 멋졌고, 이런 놀라운 결말을 미리 봤으니 소설을 읽어도 색다르게 놀라울 점은 없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다. 소설과 원작이 완벽하게 같은 결말을 가질 거라고 생각했다니, 정말 바보 같았다. 소설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고 영화도 소설과는 딴판이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결말이 멋졌다는 것. 


  소설의 제목인 "Fingersmith"는 소매치기란 뜻인데 이 소설이 시적인 장면이나 단어로 가득하다는 점을 깨닫고 그런 상태로 글을 읽어나가면 제목에 얼마나 많은 뜻이 담겨있는지 머리가 띵하도록 깨닫게 되리라.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신사와 숙녀란 단어가 이 소설에서 얼마나 경멸이 섞인 단어로 쓰였는지도. 나중에는 해당 단어만 봐도 넌덜머리가 날지 모른다. 


  신사와 숙녀의 가면을 자신이 썼든 남이 씌워주었든 그것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민낯은 더럽거나 아니면 지독하게 슬프다. 상류 사회에서 신사의 가면을 쓰고 살았던 릴리 삼촌은 잉크 때문에 항상 혀가 새까만 사람이었다. 이 이미지 또한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다. 그는 책 속 세상에만 갇혀 사는 헛똑똑이였고(실제로 똑똑하지 않은데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실생활에서 깨우치고 배우려 하지 않는 자였다. 


  그리고 정말 알아야 할 걸 알지 못하는 눈 먼 자였고, 생물학적으로는 그렇게 늙지 않았음에도 정신적으로는 이미 늙어버려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한 자였다. 릴리 삼촌이 지배하고 있었던 브라이어 저택은 그의 추악한 꿈에서 결코 깨어날 수 없는 잠든 공간이었다. 영화의 결말이 멋졌다고 말한 이유는 그렇게 잠들어 있기만 할 것 같던 공간이 아름다운 현실로 깨어났기 때문이다. 


  모드가 브라이어 저택에서 숙녀의 가면을 쓰고 지낼 적에 그녀는 나이를 먹지 못하게 단속 당하는 어린 아이에 가까운 처지였다. 여기서 나이를 먹는다는 건 생물학적으로 늙어간다는 의미보다 자아 실현을 위해 왕성한 노력을 하고 있고, 마음만 먹으면 독립도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모드는 릴리 삼촌 때문에, 조용하고 말 잘 듣는 소녀를 원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어른이 될 수 없었다. 


  자아 실현이니, 독립이니 하는 일을 꿈꾸기가 어려웠다는 말이다. 전족을 하지 않은 비대한 발이나, 코르셋을 입지 않아 가늘지 못한 허리는 어느 시대의 어느 나라에서는 여성에게 있어서 수치였다. 자라거나 커지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건 여성들의 신체에만 그치지 않았다. 정신적으로도 막아야만 한다고 여겼던 점들이 있었다. 이렇게 쓰다 보니 이 소설이 페미니즘을 유독 강조했다고 드러내는 듯한데, 그건 아니다. 가면 뒤에 숨겨져 있었는데 마주해야 할 진실과 진짜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더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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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기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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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에세이는 대한민국에서 극우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절대 읽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읽었다면 어떤 행동을 보일지 몇 가지 예상이 가는 반응은 있다.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평소에 냉소적인 성격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라도 공감할 수 있는데 다만 부당한 일에 대해서 이 정도로 가슴 아파할 수 있는 게 희한하다고 느낄지 모른다. 


  2024년 12월에 일어났던 불법 계엄은 부당함은 물론이고 국민의 생명, 존엄성 까지도 위협하는 사태였기 때문에 냉소적인 이라 하더라도 조금만 따지고 보면 충분히 섬뜩하게 느끼고 가슴 아파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황정은 작가만큼 그렇게 아파했었나 돌이켜보면 솔직하게 나는 그 정도까지는 하지 못했었다.


2. 


  회사 동료에게 이번 계엄의 위법성을 설명하다가 이유를 모르게 언짢아졌다고 했다.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말할수록 말하고자 하는 것이 가벼워지고 하찮아지는 것 같았냐고 묻자 어떻게 알았느냐고 반문한다. 나도 겪곤 하니까. 그 무서운 일을. 내게 너무나 중요한 그것이 당신에겐 중요하지 않다는 걸 목격하는 일, 사람의 무언가를 야금야금 무너뜨리는 그 일을. (본문 42-43쪽)


  노트에 따로 옮겨 적은 이 문장에 한 번 더 밑줄을 긋자면 '내게 너무나 중요한 그것이 당신에겐 중요하지 않다는 걸 목격하는 일'에 긋겠다. 계엄의 위법성에 대해서 회사 동료에게 자세하게 설명한 황정은 작가의 지인(친구 분일지도)은 자신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아 슬프거나 답답했겠다. 그런데 이런 일은 많은 사람들이 쉽사리 겪곤 한다. 


  자신의 아픔이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해서 슬프고 억울한 경우. 스스로 목숨을 버린 사람들 중에도 그런 일을 많이 겪다가 더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겠다 싶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목소리를 자신 있게 외치는 일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헤아려 보는 일도 중요한데 다 알면서도 쉽지 않다. 때로는 그 일을 문학 작품을 접하면서 할 때가 있다. 


  타인의 생각과 시선을 내 들끓는 생각과 감정 안으로 들이지 않으면 내가 지나치게 확장된다. 가장 깊이 몰입할 때 내가 사라지고 새벽에 책을 읽을 때 그게 가장 잘되고 오로지 그것만이 목적이고 그래서 좋다. (본문 159-160쪽)


  황정은 소설가도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지나치게 확장되려는 나를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채우려고 노력하나 보다. 나의 노력은 나를 그다지 묽게 만들지 못할 때가 많지만 황정은 작가는 분명 다를 것이다. 아주 묽게 만드는 일이 가능하고 자주 그러도록 노력하지 않을까. 


3. 


  산다는 건 결국 더러워진다는 것이지만, 더러운 도랑물을 마시며 사는 것이지만,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물줄기, 다른 삶에서 내 삶으로 흘러드는 물을, 타인의 삶에서 흘러나온 피가 스며든 도랑의 물을 내 도랑의 물로 받아 마시며 사는 일이고, 그래서 내가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삶이란 끊임없이 더러워지는 일이지만. (본문 114쪽)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는 바로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꼭 오염이라고 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전보다 불순물이 걷힐 수도 있고 영양가 없는 물에 영양분이 들어갈 수도 있는데, 항상 더러워지기만 하는 걸까. 하지만 삶은 쉽게 더러워지는 과정이라는 그 말은 조금만 파고 들어도 공감할 수 있었다. '더럽다'는 말에 반감을 가지기만 할 게 아니라 섞인다는 뜻으로 시선을 돌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모든 오염이 다 나쁘다는 말은 아니라는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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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동서문화사 월드북 86
펄 벅 지음, 홍사중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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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북부 지역에 사는 가난한 농군인 '왕룽'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이다. 변발을 하고 생활을 하던 왕룽이 후에 남쪽 지역으로 갔을 때 그의 머리를 보고 돼지 꼬리와 같다며 놀린 사람들이 있었을 뿐 정확하게 어느 시대인지는 알기가 어렵다. 다만 왕룽이 젊었던 시절에도 남쪽에서는 혁명의 바람이 불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찌 되었든 소설의 1부인 <대지>에서는 중국의 농촌 풍경이 주요 배경이다.


  중학생 때 처음 이 소설을 접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읽은 책은 1부만 있던 책이었나 보다. 워낙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다시 읽게 되었다. 내 기억 속에서 『대지』는 한 농군이 그야말로 땅에만 붙어서 사는 이야기였는데 다시 읽고 나니 생각보다 사람과의 관계를 더 많이 다룬 소설이어서 놀랐다. 하긴 땅을 파서 농사만 짓고 사는 이야기였으면 펄 벅이 노벨문학상까지 받기는 어려웠겠다. 


  소설의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대지』는 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먼저 해야겠다. 다른 게 아니라 표지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헐리웃에서 펄 벅의 작품을 영화로 만든 적이 있는데 그 영화에서는 중국의 정서를 드러내기보다도 당시 미국인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로 색을 입혔다고 한다. 어쩐지 표지 사진에 있는 왕룽의 부인인 '오란'은 그렇게 추녀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다 헐리웃에서 나온 영화의 한 장면을 표지 사진으로 갖다 쓰게 되었을까. 


  왕룽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오란은 흙과 아주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아무래도 옛 사람들은 현 시대의 사람들보다도 더욱 흙과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도대체 흙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나라에서 예전에는 집 안의 곳곳마다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그게 다 흙이나 지푸라기로 집을 지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 죽고 나면 대지(자연, 흙)로 돌아가고 썩고 난 뒤에도 몸을 이루던 원자는 분해되지 않고 흩어져서 다른 물질이나 생명체의 일부가 된다는데, 흙과 지푸라기로 집을 지으면 자기 아닌 다른 존재가 깃들어 있을 수도 있다고 여길 만하다. 흙은 그야말로 모든 생명체의 원천이고 또 생명체를 살게 하는 곡식과 채소, 나무 등도 땅에 뿌리를 박고 산다. 땅이 있어야만 생명들은 살 수가 있다. 


  류츠신의 소설 『삼체』에서는 지구인이 삼체 문명에게 끔찍한 공격을 당한다. 그리고 자기가 살던 땅에 발을 붙이고 살기가 어려워지는 내용이 이어진다. 삼체 문명의 '지자'가 지구인에게 모든 인류가 전부 호주 땅으로 넘어가서 살 것을 명령하자 그때부터 인류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그때는 발 붙이고 살 땅은 있었기에 희망이 있었다. 인류에게 중요한 건 다른 무엇보다도 땅이었다. 


  왕룽의 장남은 집안이 부자가 된 이후로 남에게 보이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 집안의 모든 살림을 부자라는 칭호에 맞게 바꾸고 꾸며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왕룽은 그보다도 항상 땅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땅이야말로 생명의 원천이요, 아래(땅)를 보는 자세는 겸손함 그 자체다. 왕룽이 겸손한 자세를 평생 일관된 모습으로 유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도 가난했을 적에는 소박하고 겸손했으나 부의 맛을 보고 난 이후에는 허세도 들어가고 애욕에 눈이 멀기도 하고, 하여간에 땅이 아닌 다른 것들에 눈을 여러 번 돌리기도 했다. 그런 모습들이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처한 현실에 따라서 바뀌기 마련이고 그게 바로 삶에 대처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왕룽은 다른 누구보다도 평생 땅을 사랑했다. 


  그에게 자식과 손자들을 안겨준 것은 다 땅 덕분이었다. 왕룽이 젊은 시절, 그러니까 부자가 되기 전에는 흉년이 들면 사람이 굶어 죽어나가고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는 괴소문까지 돌았다. 땅에게서 아무것도 거두어 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사태였다. 그렇지만 그는 항상 땅을 믿었고 그리하여 돈이 없던 시절에도 땅을 조금씩 사들였다. 처자식과 아버지를 먹여 살리기 위해 남쪽 땅으로 가서 인력거를 끌 때에도 고향의 땅을 잊지 않았다. 


  책의 1부를 다 읽고 책장을 잠시 덮으면서 뒤에 남은 이야기가 아직도 많다는 게 기쁘기보다 걱정이 되었다. 왕룽과 칭서방, 그리고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이 땅에서 농사를 짓는 이야기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는데 뒤에는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이야기가 더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예감 때문에. 하지만 하는 수 없다. 펄 벅이 천 쪽이 넘어가는 소설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끝까지 읽어야만 알 수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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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로 하여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
편혜영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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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조리에 대해서 말하는 소설이다. 그리고 생명보다 돈이 우선하는 곳에서 돈벌이 수단으로 가치가 전락해버린 생명에 대해서 말하는 소설이다. 부조리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부조리에 대해서 쓴 소설가를 떠올릴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소설가는 프란츠 카프카인데 한국 소설가 중에서는 편혜영 소설가가 쉽게 떠오른다. 두 분 다 좋아하는 소설가다. 


2. 


  메디컬 드라마에는 히어로가 등장한다. 어떤 경우보다 환자의 생명이 우선이고, 결코 비리를 저지르지 않으며, 어둠의 세력(?)과 결탁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는 히어로, 히로인이니까. 『죽은 자로 하여금』에도 히어로가 등장한다. 그런데 보다 현실적인 히어로다. 부족한 부분이 많고 한순간 어둠에 물든 적도 있고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더 힘을 가진 자 앞에서 주눅 든 적도 수차례다. 


  히어로의 이름은 '무주'이고, 이인시(市)의 선도병원에서 근무하는 직원으로 학력이고 능력이고 보잘것없다. 그런데 그는 끝까지 권력에, 관행에 순응하기보다 자기 목소리 내기를 멈추지 않으려고 한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인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특히 선도병원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안다. 모를 수가 없다. 


3.


  이인시는 유령 도시다. 호황이던 조선소가 폐쇄한 뒤부터 도시는 활력을 잃었다. 거리를 배회하는 무직자가 늘고 인구는 날이 갈수록 감소한다. 문을 닫은 상가와 세입자가 들지 않는 다세대주택이 즐비하다. 선도병원도 장사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도시에 생기가 없고 희망이 없다. 정부도 죽어가는 도시를 제대로 들여다 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선도병원에서 먹고 살기 위해, 추락하지 않기 위해 타락을 선택한 이들이 여럿이다. 이직을 하고 싶어도 받아줄 곳이 있을지 의문이며, 들키지 않고 관행을 따르면 어쨌든 먹고 살 수는 있고, 작든 크든 보상이 따르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떠나지도 못한다. 


  이곳에서 근무하던 무주는 실체를 아니까 외부에 알리고 싶은 생각이 크겠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아마 그런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되더라도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걸로 예상이 간다. 모두들 자신의 고민을 떠안고 살기에도 버겁기 때문이다. 무주는 아마 그 사실이 제일 무서웠을 것이다. 억울한 일에 외부 사람들은 생각보다 관심이 적거나 없다는 사실.


4. 


  그래도 이 소설은 카프카의 소설보다는 밝은 편이다. 희미하더라도 무주라는 아주 작은 빛이 있는데, 그 빛을 꺼버리는 건 세상의 무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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