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 그리고 이순신
이은식 지음 / 타오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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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이순신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존망지추에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다. 지금은 영웅을 넘어 성웅으로까지 일컬어진다. 그런데 그 그늘에서 억울하게 숨죽이고 있는 또 한 사람의 영웅이 있다. 바로 원균이다.

이 책은 그 동안 역사 속에서 부당한 누명과 대우를 받고 있는 원균에 대해 재조명하여 그 오해를 풀고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우리가 읽고 배우는 역사는 온전히 역사적인 사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역사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어떤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던가, 의도적이지 않더라고 본래 갖고 있던 편견이 개입되거나, 잘못 알려진 것을 그대로 싣는 등 여러 가지 오류가 삽입되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 기술을 아무런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오류가 진실로 고착화되어 그대로 전승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억울한 혼백이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는 데 있어 한 사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책을 참고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그 사건을 바라보고 가능한 최대한 객관적 사실을 알아내는 것이 현명한 공부법이라고 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 역사에서 원균은 비열하며 이순신을 헐뜯고 모함해서 통제사 자리를 탈취하고, 주색에 빠져서 결국 조선의 수군을 궤멸시키고 자신도 죽게 된 무능한 장수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알고 있었던 이 내용이 사실일까?

저자는 완전히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 원인이 바로 이순신과 종친인 택당 이식이 주창하여 재기술한 <수정선조실록>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순신의 영웅성을 극대화하여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원균을 더 어둡게 그렸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일본군의 숫자와 위세에 겁먹은 원균이 자신 휘하의 수군 1만 명을 해산하고 100여 척의 전선에 구멍을 뚫어 침몰시키고 이리 저리 도망 다니며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 당시 조선의 실정에 비춰볼 때 경상우수영 휘하에 1만명의 수군과 100여 척의 전선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 저자의 이 주장은 매우 타당한 것 같다.

또 이이화의 <이야기 한국사> 시리즈에서 이 부분을 보면 원균이 남해의 군기창에 불을 질렀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사실은 왜군이 그것을 차지할까 염려하여 이순신이 자신의 부하를 시켜 불을 질렀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원균과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연합하여 일본 수군과 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원균은 전투에 임하지 않고 일본군 시체의 수급을 잘라내는 데만 정신을 쏟고 있다고 기술하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원균은 용장으로서 전투의 가장 맨 앞에서 돌진하면서 싸웠다고 한다.

원균이 오명을 쓸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가 바로 패전 장수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통제사에서 파직되고 그 뒤를 원균이 잇는다. 얼마 후 원균은 조선 수군을 총동원하여 일본 수군과 일전을 벌이는데, 여기에서 패전하여 한마디로 조선수군은 궤멸당하고 자신 역시 전사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칠천량 해전’이다.

하지만 원균이 병법을 모르는 무식하고 무능한 장수이기 때문에 패전했다고 하는 것 역시 사실은 아니다. 원균이 올린 장계를 보면 그가 병법을 모르는 장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균은 수군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위험 요인이 너무 많고 성공 확률이 희박하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육군과 연합하여 작전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당시 도원수인 권율은 그것을 듣지 않고 원균에게 곤장을 치면서까지 출전을 강요하는 바람에 원균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병법에서 가장 기피하는 ‘천시, 지리, 인사’가 모두 불리한 상황에서 출전할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패전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즉, 원균의 죄는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순신의 과오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개전 초기에 원균의 지원 요청이 계속되었지만 참전하지 않은 것이나, 남해현령 소속의 군기창에 불을 지른 것이나, 3개 수군이 연합하여 치른 전투에서 이순신이 독자적으로 장계를 올려 그 전공을 독차지 한 것이나, 원균이 12세인 자신의 서자를 포상하기 위해 거짓으로 장계를 꾸몄다고 주장한 것이나, 부산포에서 일본군 진지에 불을 지른 것이 자신의 부하가 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 등등.




하지만 이순신을 위해 변론하자면, 개전 초기 참전하지 않은 것은 이순신이 용기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위수 지역을 함부로 벗어날 수 없는 당시 제도적 상황을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비록 연합했다고 하지만 전력의 7, 8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전라좌수영이 원균과 같은 군공을 세웠다고 한다면 억울할 수도 있기 때문에 독자적인 장계를 올렸다고도 볼 수 있고, 부산포 사건이나 원균의 서자 사건은 이순신이 곁에서 하는 말을 듣고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결과로서 그의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겠다. 또 남해의 군기창에 불을 지른 것은 완전히 잘못한 행동이라고 본다. 다만 왜군이 얼마나 진군했을지 모르고, 경상도의 수군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왜군이 남해를 점령해서 그것이 왜군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앞으로의 전투가 심히 불리해질 것이라는 판단에서 그렇게 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저자는 이식의 의도가 삽입된 <수정선조실록>은 믿을 수 없고, 그 전의 <선조실록>을 참고 해서 원균과 이순신을 판단하는 것이 더 옳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리하여 여전히 역사 속에서 무능하고 비열한 패전 장수로 남아 있는 원균이 복권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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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교 - 권력에 밀린 한국인의 근본신앙
최준식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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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고유의 종교로서 중국에 도교가 있고, 일본에 신도가 있다면 우리에겐 무엇인 있을까? 바로 ‘무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도교나 일본의 신도가 그 나라의 민중 종교로써 충분히 기능하고 있는 반면 우리의 무교는 거의 잊혀져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잊혀져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 말일까?

이 책 안에는 놀랍게도 현재 무당의 수가 대략 20~30만 명 정도라고 쓰여 있다. 대비하여 신도의 수가 가장 많다는 기독교의 목사가 10만 명이 못된다고 하니, 참으로 엄청난 수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우리나라의 제일의 종교는 무교라고 아니할 수 없다.




저자는 ‘무교’는 어엿한 하나의 종교이며, ‘무당’은 신도가 신령과 만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한다는 측면에서 어엿한 사제이며, ‘굿’은 엄정한 체계를 갖춘 엄연한 종교의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 안에는 무당이 되는 과정, 굿의 종류와 내용,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령들에 관한 얘기들이 매우 재밌고 흥미롭게 쓰여 있다.




저자는 ‘한국은 무교의 나라’라고 과감히 주장한다. 극성스런 기독교도가 들으면 가만히 듣고만 있지는 않을 주장이다.

외부에서 들어온 종교는 반드시 그 지역의 토속 신앙과 습합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오리지날’을 유지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인도의 불교와 중국의 불교와 한국의 불교와 일본의 불교가 부처를 신앙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내용을 달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 나라의 토속 신앙과 외래 종교가 섞인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외래 종교 역시 우리 토속신앙인 무교와 혼합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각 종교의 이름이라는 외피를 벗겨보면 내용물은 오히려 ‘무교적’이라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나라의 모든 국민은 거의가 무교의 신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도 된다.

무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이고 특징적인 것은 ‘주술적인 기복신앙’이라는 점인데, 우리나라의 불교나 기독교를 보면 현세 기복적 특징을 전혀 벗어나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역시 무교적이다.

우리나라이 기독교는 ‘유독 열광적인 기도와 방언이 중시되는 부흥회 같은 집회를 좋아하는데’(p.140), 여기에서 무교의 굿과 같은 열성과 무아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이 책에서는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기독교인이라면 거의가 한다는 새벽기도가 사실은 옛날부터 어머니들이 새벽에 정안수를 떠놓고 손바닥을 비비면서 무사안녕을 기원하던 풍속에서 연유한 것인데, 이 또한 무교적인 것은 아닌가?




우리는 보통 무교를 ‘무속’이라고 하여 불교나 그리스도교에 비교하여 원시적이고 저급하며 미신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긴다. 종교라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도 어색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다. 초월성에 대한 믿음을 기본으로 하는 종교는 그 종류와 관계없이 본질은 같다는 것이다. 다만 사랑이나 자비 등 인간 윤리의 보편성을 교리로 하는 종교는 나라와 민족을 넘어 전파할 수 있고, 여기에 교리를 일관되게 체계화하고, 다시 권력과 결탁할 때 이른바 ‘고등종교’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종교가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떤 옷을 입어도 그 사람은 그 사람인 것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더 이상 우리를 속이지 말고 무교를 우리의 근본 신앙으로 인정해 우리 문화 발전에 유용하게 쓰자는 것’(p.6)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책 말미에 ‘한국인들은 잃어버린 종교적인 정체성을 찾아 표리가 일치하는 정신적 성숙을 달성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이런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 가타부타하기는 어렵고,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한 하나의 모색(摸索)으로써 돌아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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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번영 - 현대 금융경제학이 빚어낸 희망과 절망
이찬근 지음 / 부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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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에서 일어난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로 세계 경제가 아직까지도 휘청거리고 있고, 우리의 생활 경제도 여전히 어렵게 돌아가고 있다.

현재의 이 위기가 어떻게 해서 유발된 것인지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의 견해가 대체로 일치하는 것 같지만, 앞으로 경제 체제가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생각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어떤 학자는 월가를 주축으로 한 금융자본주의가 무너질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하고, 심하게는 자본주의 자체가 무너지고 새로운 경제 체제가 세워질 것이라고도 말한다. 과연 그럴까?




이 책 <불안한 번영>은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저자의 기본적인 주장은 20세기 이후 경제사적 흐름 상 비록 위기에 처해있기는 하지만 금융자본주의 자체가 사라지거나 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

현 세계는 빠른 운송과 즉각적인 통신의 발달로 인해 그 경제를 빠르게 통합하고 있다. 이른바 ‘글로벌 경제 체제’인데, 우리에게는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저자는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면 글로벌 경제 체제에 편입된 나라는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는 가난을 면치 못했다고 진단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현 세계는 ‘탈산업화 시대’를 걷고 있다. 200여개의 나라의 경제 수준의 층위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이 단어로 묶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세계 경제를 이끌고 있는 선진국은 ‘탈산업화 시대’인 것만은 사실이다.

산업시대에는 사회를 자본가와 노동자로 이분화 하여 좌와 우로 나누는 이데올로기적 사고가 중심이었지만, 탈산업화 시대에는 이데올로기적 사고를 탈피해야만 한다고 저자는 이 책에서 일관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탈산업화 시대에는 국가와 민족의 개념도 희박해지고, 집단이라는 개념도 무너지는 때이다. 오로지 그 개인의 능력에 따라 보상이 주어지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주주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기업은 오로지 이윤을 목적으로 운영될 것이기 때문에 산업 현장에서 정규직이 비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노동조합은 약화되고 무너질 것이다. 만일 노동자들이 단합하여 자본과 대치하면, 그 자본은 순식간에 그 나라를 탈출하여 더 쉽게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나라로 갈 것이고, 기업은 그런 나라로 이전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제체제에서는 경쟁력 없는 산업은 당연히 도태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빈부격차가 극도로 심화될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또한 정치 역시 이러한 경제사적 흐름에 따라 그 역할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앞으로 가장 강력한 자원은 바로 ‘인재’라고 말한다. 우수한 인재야 말로 가장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세계화에서 우리나라가 승자로 남을 수 있으려면 국가의 역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강한 개인’의 인재를 육성할 수 있는 ‘교육 체제’를 정비하는 것이다. 저자는 ‘교육은 우리에게 21세기 최대의 국가 전략이자 경제 문제이자 복지 문제이고, 동시에 정치 문제이자 인권 문제’라고 말한다. (p.322) 저자가 말하는 글로벌 인재는 ‘추상적, 개념적 사고 능력, 실험 및 검증 능력, 협동과 의사소통 능력’을 갖고 있고, ‘과학기술 관련 전문지식 외에도 폭넓은 인문학적 식견과 국제적인 안목을 갖추고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또 국가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으로는 ‘클러스터’를 구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국토 크기나 인구수를 비춰보면 단일 복합 클러스터 체제가 적당하고 한다. 그리고 그 클러스터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에 수도권에 대한 과도한 규제는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현 세계 경제 위기를 촉발한 서브프라임에서부터 20세기 금융자본의 발전 과정을 매우 상세히 적어놓고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있는 독자들의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줄 것이다.

또한 앞으로 글로벌 경제체제가 더 강화될 것으로 예견되는 세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고민과 방법을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매우 공감하면서도 착잡한 느낌을 숨길 수 없었다. 지금도 돌아보면 ‘노동의 유연화’라는 이름으로 생존권을 박탈당하여 길거리를 떠도는 수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돈이 없어 점심을 굶는 사람이 있는 반면 흥청망청 써도 곧 화수분처럼 지갑이 두둑해지는 사람도 있다. 돈이 없어 병원에 갈 수 없는 사람도 여전히 있다. 저자의 주장처럼 이러한 현상이 글로벌 경제 체제, 금융자본의 시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고, 그저 바라보아야만 하는가. 저자는 심지어 앞으로 복지는 개인이 알아서 챙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이상 국가는 국민의 복지 문제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빈부격차가 커지는 것이 당연한 추세이고, 다시 국가는 복지 문제에서 손을 떼야 한다면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아무리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 교육제도를 정비한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글로벌 인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저자는 ‘스스로 완성도를 추구하는 개인주의를 고양함으로써 보다 성숙한 단계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여기에서 개인주의와 공동체 사이에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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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신 - 일본서기에서 신영성운동까지
이찬수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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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있어서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이다. 특히 조선이 일본에 의해 멸망하고, 살육 당하고 핍박받았던 역사적 기억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뇌리에 남아 있어서 일본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하나의 창 구실을 하고 있다. 이러한 기억과 사고가 일본을 더 자세히 바라보고 경계할 수 있는 구실을 하기도 하지만, 일본과 일본인의 본모습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역할도 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근대화는 단적으로 ‘서양화(西洋化)’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서양화는 우리가 곧바로 서양을 본받아 온 것이 아니라, 먼저 근대화를 이룬 일본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서양을 접하고 서양을 본받아 온 부분이 생각보다 많다고 본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단어들 즉,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종교 등 이런 말이 일본이 서양의 언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말이고, 우리는 지금 이 말들을 원래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양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




우리는 고대로부터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일방적으로 선진문물을 전수했으며, 그들은 ‘왜놈’이라는 야만인들로 우리보다 하위의 종족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우리는 일본의 영향을 그보다 더 많이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현재 세계 경제사적 측면에서 볼 때 동북아에서 차지하는 일본의 역량을 볼 때 우리나라와 더 긴밀히 협력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정확한 진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일정한 날에 특정한 사찰이나 교회에서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예배하는 종교 행위가 매우 낯설다고 한다. 일본인에게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냐고 물으면 대체고 거의 없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의 일상생활을 살펴보면 매우 종교적인데, 이것을 ‘비종교적 종교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가 태어나면 신사에 가서 축원하고, 결혼식은 교회식으로 치루며, 죽으면 화장하여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절의 공동묘지에 묻힌다는 것이다. 또 집집마다 조상의 위패를 모셔놓고 아침, 저녁으로 조상에게 절을 올리는 것을 보면 유교적 전통이 우리나라보다도 오히려 더 잘 지켜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인의 종교성의 특징이라면 ‘현세 지향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초월’이나 ‘사후세계’와 같은 정신세계를 추구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제일의 종교는 바로 ‘신도’라고 할 수 있는데, 신사를 찾아가 기도하는 것도 거의가 현실 세계에서의 건강 기원과 소원 성취라고 한다.

‘신불습합’이라고 할 만큼 불교와 신도는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일본의 불교는 주로 ‘법화경’을 신봉하고 추구하는데, 일본식 불교하고 할 수 있는 ‘일련교(日蓮敎)’에서는 ‘나무묘호렌게교(南無妙法蓮花經)’만을 외우면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 현재 일본에서는 신종교 운동이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이 책에서 소개되어 있는 것들을 보면 거의 일련교에서 뻗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의 현실 지향적인 결과 거의 기독교가 없다고 한다. 1% 미만이라고 하니 우리나라와 참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동양에서는 일본이 가장 먼저 서구화, 근대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전통을 중요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오히려 서구 문화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여긴다고 하다. 즉, 전통적인 ‘전근대’는 익숙하고 질서적인 것이며, 서구에서 온 ‘근대’는 낯설고 무질서한 것으로 파악하여, 비록 서구와 근대가 갖고 있는 물질적 우수함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지만, 오히려 더 지켜야 하는 것은 자신들의 전통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이것을 ‘화혼양재(和魂洋才)’라고 한다. 이러한 사고를 단순히 근대 이전 중국에서 일어났던 ‘동도서기(東道西器)’ 운동과 같은 구호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은 너무나도 뚜렷하게 근대화를 가장 선도적으로 이루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이러한 사고는 오로지 서구화와 근대화가 절대선인 양 추구하였던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일본인의 정신적 특징으로 또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평범성’이다. 일본인은 사회 전체적인 조화를 매우 중시하여, 튀는 행동을 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한마디로 ‘질서’를 매우 중시하는 것인데, 이러한 정신적 특징 때문에 어떤 사회적 과업을 일사불란하고 능률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정신적 특징은 과거에 그랬다시피 지도자가 잘못된 생각을 하여 잘못된 길로 인도하더라도 일본국민은 그것을 따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길 것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서로 교류와 협력을 그만 둘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들을 더 잘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과 대등한 관계에서 교류, 협력이 가능하고, 만일에 있을 그들의 야욕을 먼저 파악해서 분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분량은 비록 많지 않지만 일본의 종교성과 정신세계를 군더더기 없이 충분히 잘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가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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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의 종말 - 인간은 똑똑한 기계를 원하지 않는다
마티아스 호르크스 지음, 배명자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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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식사는 알약 한 개로 해결하고, 달나라에 신혼여행을 가고, 화성에는 식민지가 건설되어 있다. 7.80년대에 초등학교에 다니던 사람들은 미술 시간에 이런 것을 소재로 해서 그림을 그린 기억이 있을 것이다. 21세기가 되면 우리는 어떻게 살게 될까 하는 것이 주제이다.

하지만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재 주위를 돌아보자. 당시 상상했던 것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핸드폰, MP3, 평면TV, 개인용 컴퓨터, 인터넷 등 당시에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있기는 하지만, 그 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20세기 100년 동안 과학기술은 그야말로 수직상승하는 발전을 이루었고, 우리의 삶은 상전벽해가 되었다. 사람들은 엄청난 발전을 이룬 과학기술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환상적인 삶을 현실화시켜줄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과연 그럴까?’하고 그런 미래상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테크놀로지의 환상을 제거하는 데 목적이 있다.”(p.94)고 단언하고 있다.




우선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예로 들어보자. 출근 시간에 자동차로 길이 꽉 막혀 오도가도 못 할 때 하늘로 날아갈 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가끔씩 이러저러한 ‘나는 자동차’를 개발했다고 토픽에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이 상용화될 수 있을까? 물론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구입하고 싶어도 쉽지 않겠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로 결코 상용화되지 못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인간은 수백만 년의 진화를 통해 지금에 이르렀다. 그 결과 인간은 땅 위에 두발로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는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2차원적인 공감각이 발달되었는데, 공중을 난다는 것은 3차원적인 감각이 필요하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성향과 맞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을 난다는 것은 동경이기도 하지만 막상 날아야 되면 매우 불편해 할 것이 틀림없다. 또 사람은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상황, 즉 제어불능에 매우 불안해한다. 바퀴가 땅 위를 구르는 자동차라면 그 속도가 어떠하든 지표에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 제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심하지만, 하늘을 날게 되면 응급상황에서 제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이런 이유로 하늘을 나는 자동차는 상용화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테크놀로지는 생명체의 진화와 매우 닮았다고 말한다. 생명체는 생성과 발전, 변화, 소멸을 반복하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지질학적으로 살펴보면 그 동안 수많은 생명체가 명멸했다. 테크놀로지 역시 생명체처럼 태어났다 발전하고, 변천하며, 소멸한다고 한다. 테크놀로지가 탄생하고 발전하는 경우는 변화가 심한 상황, 부족과 결핍이 된 상황, 안정을 요구하는 상황, 권력을 취하려는 욕망 등이 있을 때이며,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억제하는 요소로는 사회적 습관, 기득권을 취하고 있는 기술, 앞에서 기술한 제어불능에 대한 불안, 윤리적 문제 등이 있다.

여기에 테크놀로지의 발달을 저해하는 더 중요한 요인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는데, 바로 22세기의 세계적 환경이다. 테크놀로지는 기술 의지가 넘치는 사회 서식지가 필요한데, 미래에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22세기에는 인구가 다시 급격히 줄 것이다. 2150년 지구 총인구는 60억을 넘지 못할 것이라 예측되고 있고 이는 결코 터무니없는 예상이 아니다. 지금의 트렌드가 계속된다면 22세기에는 모든 기아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거의 모든 국가가 선진국 대열에 들 것이며, 에너지 문제가 해결되고, 식량과 물자도 넉넉해질 것이다. 전 세계는 유연한 사회주의가 발달할 것이다. 이렇게 평화롭고 생태적이며 고효율인 세계에서 테크놀로지는 진화를 멈출 테고 이런 균형 상태는 수천 년간 지속될 수도 있다.”(p.283)




우리에게 미래는 유토피아적인 환상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기계와 인류가 전쟁을 하고, 결국 인간은 기계에게 패배할 것이라는 불안감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그런 생각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똑똑한 기계’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을 능가하는 기계는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인류와 인류의 미래에 대해 매우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단순히 편리함을 추구하고, 동물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높은 정신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기술은 인간 존재의 일부이며, ‘테크놀로지는 인간을 소외시키지도 파괴하지도 않으며 인간성을 없애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인간 본질로 한 걸음 다가서게 할 것이다. 인간의 희망, 소망, 꿈, 그리고 나약함으로 말이다.’(p.288)

결국 저자는 테크놀로지의 종말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테크놀로지의 본질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미래의 과학기술에 대한 전망을 얘기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추구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설명을 더 많이 하고 있다. 결국 테크놀로지라는 것도 인간의 ‘몸의 확장’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전망하는 미래의 모습, 즉 환상적이면서 공포스러운 모습은 막상 주인공인 인간은 배제하고 테크놀로지에 의한 테크놀로지만을 논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넌센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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