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 그리고 이순신
이은식 지음 / 타오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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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이순신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존망지추에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다. 지금은 영웅을 넘어 성웅으로까지 일컬어진다. 그런데 그 그늘에서 억울하게 숨죽이고 있는 또 한 사람의 영웅이 있다. 바로 원균이다.

이 책은 그 동안 역사 속에서 부당한 누명과 대우를 받고 있는 원균에 대해 재조명하여 그 오해를 풀고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우리가 읽고 배우는 역사는 온전히 역사적인 사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역사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어떤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던가, 의도적이지 않더라고 본래 갖고 있던 편견이 개입되거나, 잘못 알려진 것을 그대로 싣는 등 여러 가지 오류가 삽입되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 기술을 아무런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오류가 진실로 고착화되어 그대로 전승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억울한 혼백이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는 데 있어 한 사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책을 참고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그 사건을 바라보고 가능한 최대한 객관적 사실을 알아내는 것이 현명한 공부법이라고 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 역사에서 원균은 비열하며 이순신을 헐뜯고 모함해서 통제사 자리를 탈취하고, 주색에 빠져서 결국 조선의 수군을 궤멸시키고 자신도 죽게 된 무능한 장수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알고 있었던 이 내용이 사실일까?

저자는 완전히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 원인이 바로 이순신과 종친인 택당 이식이 주창하여 재기술한 <수정선조실록>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순신의 영웅성을 극대화하여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원균을 더 어둡게 그렸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일본군의 숫자와 위세에 겁먹은 원균이 자신 휘하의 수군 1만 명을 해산하고 100여 척의 전선에 구멍을 뚫어 침몰시키고 이리 저리 도망 다니며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 당시 조선의 실정에 비춰볼 때 경상우수영 휘하에 1만명의 수군과 100여 척의 전선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 저자의 이 주장은 매우 타당한 것 같다.

또 이이화의 <이야기 한국사> 시리즈에서 이 부분을 보면 원균이 남해의 군기창에 불을 질렀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사실은 왜군이 그것을 차지할까 염려하여 이순신이 자신의 부하를 시켜 불을 질렀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원균과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연합하여 일본 수군과 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원균은 전투에 임하지 않고 일본군 시체의 수급을 잘라내는 데만 정신을 쏟고 있다고 기술하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원균은 용장으로서 전투의 가장 맨 앞에서 돌진하면서 싸웠다고 한다.

원균이 오명을 쓸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가 바로 패전 장수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통제사에서 파직되고 그 뒤를 원균이 잇는다. 얼마 후 원균은 조선 수군을 총동원하여 일본 수군과 일전을 벌이는데, 여기에서 패전하여 한마디로 조선수군은 궤멸당하고 자신 역시 전사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칠천량 해전’이다.

하지만 원균이 병법을 모르는 무식하고 무능한 장수이기 때문에 패전했다고 하는 것 역시 사실은 아니다. 원균이 올린 장계를 보면 그가 병법을 모르는 장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균은 수군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위험 요인이 너무 많고 성공 확률이 희박하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육군과 연합하여 작전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당시 도원수인 권율은 그것을 듣지 않고 원균에게 곤장을 치면서까지 출전을 강요하는 바람에 원균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병법에서 가장 기피하는 ‘천시, 지리, 인사’가 모두 불리한 상황에서 출전할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패전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즉, 원균의 죄는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순신의 과오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개전 초기에 원균의 지원 요청이 계속되었지만 참전하지 않은 것이나, 남해현령 소속의 군기창에 불을 지른 것이나, 3개 수군이 연합하여 치른 전투에서 이순신이 독자적으로 장계를 올려 그 전공을 독차지 한 것이나, 원균이 12세인 자신의 서자를 포상하기 위해 거짓으로 장계를 꾸몄다고 주장한 것이나, 부산포에서 일본군 진지에 불을 지른 것이 자신의 부하가 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 등등.




하지만 이순신을 위해 변론하자면, 개전 초기 참전하지 않은 것은 이순신이 용기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위수 지역을 함부로 벗어날 수 없는 당시 제도적 상황을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비록 연합했다고 하지만 전력의 7, 8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전라좌수영이 원균과 같은 군공을 세웠다고 한다면 억울할 수도 있기 때문에 독자적인 장계를 올렸다고도 볼 수 있고, 부산포 사건이나 원균의 서자 사건은 이순신이 곁에서 하는 말을 듣고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결과로서 그의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겠다. 또 남해의 군기창에 불을 지른 것은 완전히 잘못한 행동이라고 본다. 다만 왜군이 얼마나 진군했을지 모르고, 경상도의 수군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왜군이 남해를 점령해서 그것이 왜군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앞으로의 전투가 심히 불리해질 것이라는 판단에서 그렇게 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저자는 이식의 의도가 삽입된 <수정선조실록>은 믿을 수 없고, 그 전의 <선조실록>을 참고 해서 원균과 이순신을 판단하는 것이 더 옳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리하여 여전히 역사 속에서 무능하고 비열한 패전 장수로 남아 있는 원균이 복권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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