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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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세계화, 금융자본주의, 자유주의, 정보화 사회 등 여러 가지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런 사회가 인간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시간적 여유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반면 물질만능주의, 배금주의, 개인주의, 빈부격차 등으로도 이름 지을 수 있는 현대는 인간의 박탈과 소외라는 문제를 가져왔고, 이로 인해 많은 사회적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호모 페이션스(고민하는 인간)’을 주장하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변화가 엄청나게 빠르고, 이 변화에 맞추어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에게 ‘고민하라’고 하다니. 무엇인가 어울리지 않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잠시만 진정하고 저자의 주장을 들어보자.




저자는 재일교포 2세로서 일본인과 한국인의 경계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일찍 고민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면서 그때 그에게 위안을 준 사람이 바로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라고 말하고 있다.

소세키와 베버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산 사람들이다. 그 100년 전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그들의 고민과 자신의 고민을 공감하고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이 책에서 그들의 글과 말은 꾸준히 인용된다.

그들과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시대적 환경과 현재 시대적 환경이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근대 산업이 폭발적으로 발달하고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이전 봉건 사회의 틀과 가치가 상실되어 가던 100여 년 전과 급격한 세계화와 초고속정보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혼란해 하는 현재가 중첩되어 보인다는 것이다. 이른바 시대 흐름의 여울목이라는 측면에서 공통적이라는 뜻이다. 강물이 여울목에 이르면 물살이 거세고 빠르며 소용돌이가 일어나기도 하여 배가 심하게 흔들리고 심하면 전복되기도 한다. 현재가 마치 그런 급격하고 혼란한 시대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의 고민은 ‘나는 누구인가’에서 출발한다. ‘자아’에 대한 탐색은 디아스포라이며 전후 세대인 저자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고민일 수밖에 없겠지만, 물질문명과 황금만능주의 사회 속에 매몰되어 가는 우리들에게도 심각한 고민거리일 것이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현대는 ‘자아 상실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자아에 대한 발견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것과 같다. 반면 자아를 상실하면 자신의 존재 가치 역시 사라지며, 타인에 대한 존재 가치까지 인식할 수 없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자살이 늘고, 이른바 ‘묻지 마 살인’이 횡행하는 원인의 큰 부분이 바로 자아의 상실에 있을 것이다. 즉, 자아에 대한 고민은 ‘생존의 당위성’을 구하는 절체절명의 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자아’는 ‘자기중심적’인 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오히려 타자를 인정할 때 자아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즉,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 가능한 것이며, 진정한 자아는 자신을 가두고 있는 성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만든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아’는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저자는 ‘진지함’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속도를 강조하고 표면적이기를 강요하는 현대에 있어서 ‘진지함’은 하나의 제어 도구로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할 때 봄에 해당하는 시절이 바로 ‘청춘’이다. ‘청춘’이라고 하면 젊음, 생기발랄, 활기 등이 연상되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이면을 보면 현실이 불안정하고 미래가 불확실한 불안의 시절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고민의 시기도 한데, 이것이야 말로 ‘청춘’을 더 아름답게 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이르러서는 다시 ‘자아’에 대한 탐색과 연결된다.

그러나 이 땅의 현실을 돌아보면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오로지 취직을 위해 거의 모든 시간을 바치고, 배우는 것은 돈 버는 방법, 인간관계를 잘 맺는 방법이나 배우면서 청춘을 허비한다. 진지한 고민을 하는 젊은이를 보면 오히려 젊은이답지 않다는 핀잔을 준다. 현실의 산더미 속에 파묻혀 질식하는 중이면서도 그 답답함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청춘을 가리켜 ‘탈색된 청춘’(p.90)이라고 하고 있다. ‘청춘’은 고민할 수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고, 그 향기를 발하는 것이다. 저자는 나이를 먹어도 청춘의 향기를 잃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현대를 ‘자유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를 통찰해보면 인간은 자유를 찾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였다고 해도 틀림이 없을 듯하다. 과거에는 태어나면서부터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윤리, 도덕, 종교 등 이데올로기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어서 그 도그마가 가르쳐준 대로 살면 그뿐이었고, 죽음조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죽음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자유는 표류와 방황의 다른 이름이 될 수도 있다. 일정한 좌표와 기준이 없고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며,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표류와 방황의 종말은 자신의 파괴, 즉 자살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또 다시 ‘자아’를 말할 수밖에 없다. 살아가게 하는 힘은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내면에 깃드는 충족감, 즉 자아 또는 마음의 문제로 귀결’(p.150)될 수밖에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현대에 들어서 인간의 평균 수명은 괄목할만하게 늘었다. 또 소득과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출산 비율이 급격하게 줄었다. 이 결과 노인 인구가 그야말로 과도하게 늘어나고 있으며, 이것은 새로운 사회 문제로까지 인식되게 되었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노인은 이미 사회의 생산성 기여에서 탈락된 존재이므로 사회인이 아니고 사회적 규범에서 밀려난 열외의 사람이라고 하였다. 과거 노인 인구가 희소할 때는 노인들은 지혜와 권위의 상징으로서 존중받았지만, 지나치게 늘어난 현대에는 그 가치가 이미 사라졌다. 하지만 이것뿐일까?

모든 생명체가 그렇겠지만 사람 역시 본능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그 두려움이 점점 커진다. 그러다가 어느 한계점에 이르면 그 죽음이 다가오는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더 이상 죽음을 예전처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하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p.162)이 생기게 되는데, 저자는 이 힘을 가진 사람이 바로 ‘노인’이라고 말한다.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두려움이 없어지고, 뻔뻔해지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긴다. 노인이 되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늙으면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일본 열도와 한반도를 종단하고 싶다고 한다. 더불어 ‘이제는 고령자가 문화를 만들어야 하는 시대’(p.165)라고 역설한다.




이 책에서는 이 외에도 돈, 지식, 종교, 일, 사랑 등 누구에게나 곁에 있는 문제들을 고민하고 있다. 




이제 결론짓자면, 이 책의 요지는 ‘자아의 발견’과 ‘타인과의 관계 회복’ 이 두 가지에 대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붙여 말하면, '확고한 자아를 바탕으로 타자를 상호 인정하는 관계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으며, 이 과제를 푸는 열쇠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인간적인’ 고민을 ‘인간적으로’ 고민하는 것은 살아 있는 증거이기 때문이지요.”(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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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심리학
마이클 맥컬러프 지음, 김정희 옮김 / 살림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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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보아도, 역사를 보아도 수많은 악행과 전쟁이 ‘복수심’에 의해서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복수심을 제어할 수만 있다면 이러한 비극적 사건과 전쟁을 줄일 수 있다는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다.

 

우선 복수심의 본질에 대해서 명확하게 규정해야만 그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과연 인간에게 있어서 복수심은 무엇일까? 저자는 집단 생활을 통해서 생존하고 번영해온 인간의 특성에서 복수심의 근원을 찾고 있다. 다시 말하면 진화론적으로 볼 때 복수심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복수 성향은 그것이 누군가의 공격으로부터 인류의 조상을 보호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고, 대규모 협력으로 얻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었기 때문이 아닐까?”(p.103)라고 하여 복수가 인류 생존에 유익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단체 생활에서 복수의 수단으로 협력을 이끌어내는 예를 다른 영장류나 물고기에서 볼 수 있음을 예로 들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복수의 화신인가? 저자는 절대로 아니라고 말한다. 본성의 다른 면에는 바로 ‘용서’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용서 역시 진화론적으로 설명되는 인간 본성의 중요한 특성이다.

이 책 안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진화 게임’에서 가장 우수한 전략이 바로 ‘팃포탯 전략’이다. 이것은 상대가 협력하면 따라서 협력하고, 변절하면 역시 변절하고, 다시 협력으로 돌아오면 용서하는 매우 단순한 전략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 역시 이 전략을 쓰게 되면 한 번 변절한 것이 영원히 반복되는 악순환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 상태는 더 이상 진화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가장 안정된 전략을 찾아보니 3분의 2 비율로 무조건 용서하는 전략이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어떤 생물보다 번성하고 있는 인간의 진화사를 볼 때, 그 본성 내면에 복수와 용서라는 상반된 것이 있지만, 용서 측면이 월등하게 강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신경학상으로 온전하게 태어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특정 환경 조건하에서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p.145)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특정 환경 조건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복수심을 없애고 용서와 화해를 통해 평화를 만들어나가는 요점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그 환경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 역사적으로 국가에 권력이 집중되면서 복수에 따른 살인 사건이 줄어든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강력한 사법 체계가 사적인 복수 행위를 억제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증명한다. 따라서 치안을 잘 유지하고, 공정하고 신뢰할 만한 사법 체계가 잡혀 있는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용서가 더 많을 것이다.

 

복수와 마찬가지로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하는 행위이다. 사람은 누구나 용서 본능이 내재되어 있지만 가해자가 진실로 피해자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용서 행위가 그저 발동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가해자의 진실한 사과가 있어야 하며, 그 전제로 가해자가 자신의 과오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개인 간의 분쟁 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분쟁에서도 이 점은 동일하다.

사과와 더불어 가해자는 자기 비하의 몸짓, 표정을 보여야 한다. 이때 피해자는 용서 본능이 발동하면서 상대에게 복수할 때 느끼는 쾌감을 이 과정에서 느끼고 복수심은 사라지게 된다.

마지막은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마땅한 보상을 약속해야 한다. 그 보상의 크기는 꼭 피해자가 받은 피해만큼이 아니어도 피해자는 용서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보상의 크기보다는 자체가 용서 본능을 일으키는 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관계수복적 사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관계수복적 사법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범죄를 다루고, 그들 각자의 가족, 친구들이 범죄의 영향과 가해자가 준 피해를 치유할 수 있는 단계에 대해 토론하는 특별한 수단’이다.”

언젠가 어느 텔레비전 프로에서 살인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의 생활을 비춰준 것을 본 적이 있다. 대부분의 가족들은 정상적으로 사회 생활을 하지 못하고, 술에 빠져 있거나 신경정신과 약을 복용하였고, 심지어는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그 살인자가 지금도 감옥에 살아있냐면서 절규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들 피해자 가족들은 모두 가슴에 복수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만일 관계수복적 사법체계가 실행되어서 그 울분을 가해자나 그 가족에게 토해내고 가해자는 용서를 빌고, 피해자 가족들은 용서하는 과정을 가졌더라면 그렇게까지 피폐해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에 복수심을 품고 살면 항상 불안감을 가지고 있고 긴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심장질환이나 혈압 상승이 있을 수밖에 없다. 반면 용서를 하면 그와 같은 질환을 방지할 수 있게 된다. 이 하나의 사실만 보더라도 관계수복적 사법이 필요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중동을 세계의 화약고라고 부른다. 지금 이 시간에도 테러로 인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아랍국들의 갈등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다.

사람은 자기와 관계를 맺어온 사람, 낯이 익은 사람에 대해 더 용서하는 경향이 있다. 이 본성을 이용해서 ‘평화의 씨앗’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한다. 즉 적국의 아이들 가운데 우수한 아이들을 선발하여 함께 캠프에 참여해서 친구를 맺게 하면 훗날 그들이 사회지도층이 되었을 때 상대 적국에 대해서 용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아직은 그 결실이 뚜렷하지 않지만 훗날에는 분명히 그 결실을 맺을 것이다. 얼마 후에는 중동에서 용서화 화해가 넘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다시 말하게 되지만, 복수와 용서는 인간 본성의 두 면이며, 이들 본성이 생기게 된 이유는 인간은 집단 생활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사회를 떠나서 살 수는 없다. 현대가 아무리 개인주의 시대라고 해도 사회 관계 속에서 개인주의인 것이지 개인 독단은 주의는 아닌 것이다. 내가 생존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공동체에게 공헌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은 바로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용서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왜 이렇게 말하는가 하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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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내부의 적 간신 - 중국 간신 19인이 우리 사회에 보내는 역사의 경고
김영수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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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간신 19명을 선정해서 그들의 악행의 내용과 그 결과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재밌고 흥미롭게 쓰고 있다. 역사 속의 간신을 통해서 현실의 간신을 비춰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저자는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을 그저 중국 역사 가운데 하나로 여겨 재미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위정자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모골이 송연하고 등골이 오싹하는 느낌을 받을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간신이 권력을 회득하는 과정에 공통점이 있다. 먼저 수단과 방법을 다해 최고 권력자, 즉 봉건시대에서의 군주에게 접근한다. 그 다음 그 권력자의 의중을 파악해 비위를 잘 맞춰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이렇게 해서 권력자의 신망과 총애를 얻고, 이를 바탕으로 권력을 획득한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휘하에 모으고, 덕망이나 명망, 능력있는 자들을 음모와 술수를 이용해서 살해하거나 축출하고, 대신 자신의 똘마니를 요직에 앉혀 바야흐로 국정을 자신의 손아귀에 올려놓는다. 이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바로 최고 권력자의 이목을 막아 국정에 관여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간신들의 공통점은 일반적으로 머리와 능력이 비상하고 기막힌 위장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발호하기 전에는 그 기미를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 일반적으로 능력있고 현명하며, 명망이 있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그들의 능력을 무시하거나 얕잡아 보아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이 점은 간신의 역사를 통찰할 때 매우 중요한 점이다. 결코 그들을 무시하거나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된다. 간신들은 기회가 왔을 때 제거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발본색원(拔本塞源)해서 철저하게 없애야 한다.

또한 간신들은 대체로 일시적인 실패와 좌절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재기를 시도한다. 일단 재기에 성공하여 권력을 획득하면 자신의 재기에 도움을 준 사람들은 더 이상 필요가 없고 오히려 자신이 행동하는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하나 하나 제거해 버린다. 이들에게 은혜나 의리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고, 심지어는 가족도 그 희생물 속에 들어가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향락과 사치를 누리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다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혹 가능하다할지라도 타인의 이목을 생각해서 차마 다 하지 못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봉건시대의 군주들도 이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간신들은 바로 이 허점을 노리고 파고들어 군주가 향락과 사치에 빠져들게 만든다. 군주가 사치와 향락, 주색에 빠져들면 골치가 아픈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간신이 횡행하는 데는 공통적으로 반드시 어리석은 군주가 뒤에 있었다. 즉 어리석은 군주는 간신이 생겨나는 토양이고 자라게 하는 자양분인 것이다.




간신들은 공사의 구분이 없다. 자신의 이익이라면 나라와 민족, 인민의 생활을 돌아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사회의 기풍과 국가의 기강이 무너져 국가와 사회 시스템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이어서 국력이 쇠락하고 민생이 파탄하며 심하게는 국가가 멸망하게 된다.




비록 역사 속에서 간신들의 횡포를 보지만, 현실에서 간신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지금도 많은 간신들이 활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두 자각해야 할 시점이다. 지금 우리 사회도 온갖 간신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정치판의 간신 정간(政奸)은 기본이고, 이들에 빌붙어 알랑거리는 언론계의 언간(言奸), 배운 것을 왜곡하여 학문적 양심은 물론 자신의 영혼마저 저당 잡히길 서슴지 않는 학간(學奸), 권력마저 돈으로 살수 있다며 열심히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는 상간(商奸), 심지어 무인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기본기마저 망각한 채 더러운 권력의 쓰레기 더미를 향해 킁킁거리며 달려가는 무간(武奸), 종교라는 권위에 빌붙어 세상을 밝히기는커녕 악취만 풍기고 다니는 가증스러운 목간(牧奸), 여기에 대중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던 딴따라가 하루아침에 권력자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아양을 떠는 뭐라 이름 붙이기조차 민망한 간신들까지.”(p.111)




저자는 이 책 곳곳에서 간신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는 우리가 모두 투철한 역사의식과 명철한 현실인식을 가져야 하고, 비겁함과 나약함을 지양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바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저자의 주장이 얼마나 절실한지 알 수 있다. 현재 우리는 민주주의 시대를 살기 때문에 과거 봉건시대처럼 절대권력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형식적 민주주의를 다했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민주주의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단적인 예로 히틀러도 국민의 투표라는 민주주의 제도를 통해서 집권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간신이 생겨나고 횡행하는 바탕에는 어리석은 통치자가 있었다. 지금에 있어서는 그 어리석은 통치자의 자리에 바로 ‘어리석은 국민’이 앉아 있다. 국민이 어리석으면 반드시 간신이 나타나게 된다. 반대로 국민이 똑똑하면 햇볕 속에서 곰팡이가 자랄 수 없듯이 어둠의 자식인 간신은 생겨날 수 없다. 왜 우리 국민 모두가 투철한 역사의식과 명철한 현실인식, 덧붙여 엄격한 법질서와 수준높은 도덕의식이 필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말미에 ‘간신 지수 측정’이 부록으로 붙어 있다. 30개의 문항에 대답하는 항목에 따라 점수를 매겨 측정하는 방식인데, 정확성의 여부는 차치하고 이것을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간신의 소질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간신의 소질이란 단적으로 ‘협소한 국량(局量)’이라고 할 수 있다. 속된 말로 ‘속이 좁다’라고 하는 것이다. 국량이 큰 사람은 결코 간신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간신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국량을 키워야 한다. 어떻게 하면 국량을 키울 수 있을 것인가? 율곡 이이 선생은 <성학집요>에서 ‘앎이 넓어지고 깊어지면 저절로 국량이 커진다.’고 했다. 즉 지식을 넓고 깊게 하는 것이 간신이 되지 않는 방책인데, 지식을 넓고 깊게 하는 것으로는 ‘독서’만큼 좋은 것이 없다. 우리가 질좋고 다양한 책을 읽어야만 하는 소이(所以)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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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정리학 - 뒤죽박죽된 머릿속부터 청소하라!
도야마 시게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뜨인돌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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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거의 질식할 정도로 많은 정보 속에서 살고 있다. 이제는 정보 그 자체가 중요한 시대는 지나갔다고 할 수 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박람강기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그 때는 지식이 양적으로 많은 것이 중요했던 시대였다. 하지만 컴퓨터가 출현한 이후에는 단순히 지식을 기억하고 빨리 계산하는 것이 그리 중요시 되지 않았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고 계산이 빠르다할지라도 컴퓨터를 따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능가하는 인간의 독특한 지적 활동은 바로 창조력이다.(물론 미래에는 창조력까지 인간을 능가하는 기계가 출현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저자에 의하면 사람은 글라이더와 같은 사람과 비행기와 같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글라이더는 자신의 동력이 없기 때문에 외부의 동력에 의존해서 단순히 활강할 뿐이다. 아무리 그 나는 모습이 우아하고 아름답다고 할지라도 외부의 동력이 공급되지 않으면 더 이상 날 수가 없게 된다. 하지만 비행기는 자신의 동력이 있기 때문에 마음껏 날 수 있다. 즉 수동형 인간과 능동형 인간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오직 능동형 인간만이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




저자는 다시 창고형 두뇌와 창조형 두뇌를 나누어 이야기한다. 창고형 두뇌는 많은 지식을 머리속에 저장하는 데 그치지만, 창조형 두뇌는 불필요한 지식을 섭취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무엇인가 기발한 발상을 만들어 낸다. 지식을 그저 머리속에 쌓아두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 지식을 조합하고 분석해서 새로운 착상을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창조형 두뇌는 때로는 오히려 잡다한 지식을 잊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지식을 선별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속담에 ‘우물을 깊이 파려면 먼저 넓게 파야 한다’는 말이 있다. 어떤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보면 그 분야에 초지일관 매진했던 사람은 오히려 드물고 다른 분야를 두루 섭렵했던 사람이 더 많다. 저자는 이것에 대해 ‘지적 인브리딩을 피하라’고 말하고 있다. 순종에 비해 잡종이 더 강하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분야를 읽고 연구하고 사고하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전공 분야와 다른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또 저자가 말하는 ‘세런디피티’도 마찬가지다.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중에 기발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말하는데, 만일 그 사람이 오로지 자기 분야만 연구하고 있다면 ‘세런디피티’의 기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런디피티’처럼 기발한 창조성은 일부러 곰곰이 생각을 짜낸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념무상의 순간에 기발한 생각이 문득 찾아온다. 대표적인 무념무상의 순간이란 막 잠에서 깼을 때, 출퇴근하는 동안에,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 무심히 산책 중일 때 등이다.




저자가 말하는 독서법도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크다. 독서법에는 수렴형과 확산형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수렴형은 수동형 인간, 창고형 두뇌와 비슷하다. 책에서 제시하는 지식을 쌓아두기만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확산형은 능동형, 창조형으로서 책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자기 방식대로, 자기 관점에서 다양하게 사고해서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현대는 수렴형보다는 확산형 독서를 더 필요로 한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독서인으로서 참고로 해야 할 것이다.




이 외에서 글을 쓸 때 충분히 발효되고 숙성되는 시간이 필요하고, 저절로 글이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는 것과, 참고 자료를 정리하는 방법 등을 말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에서는 ‘창조적 인간’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서 '사고의 정리‘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면 대차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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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묵시록 - 탐욕의 종말: 아슈케나지 유대인의 비밀, 묵시록의 시대 1 - 경제편
임종태 지음 / 다른우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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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전 세계는 경제 불황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작금의 현상에 대해 ‘브랜턴우즈 체제’가 붕괴되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금융자본주의’의 실패로 경제체제가 재편되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아예 ‘자본주의’ 자체가 붕괴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현재 흐름과 귀결을 지금 시점에서 적확하게 집어내기는 쉽지 않지만, 대부분 경제 체제 자체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경제 불황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데, 이른바 ‘음모론’적 관점이 그것이다. 음모론 관점에서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현 경제 불황은 거대 유대 자본가들이 유대인의 세계 지배를 위해서 인위적으로 발생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체로 음모론에서는 거대 유대 자본가를 원흉으로 지목하는 것이 공통인데, 이 책에서는 이 외에 다른 주장을 싣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우리는 유대인에 대해 수천 년 전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살아오다가 로마에 의해 망한 후 세계 각지로 흩어져서 살다가 2차 대전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을 건국했다고 알고 있다.

대개 유대인을 단일한 민족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유대인은 크게 두 민족으로 나눌 수 있다. 본래 레반트에 살다가 흩어진 유대인을 정통의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을 가리켜 ‘셰파르디 유대인’이라고 한다. 이 외에 ‘아슈케나지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유대인이 있다. 이들은 10세기 경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하자르’라는 왕국을 세웠던 민족으로서 인접 국가와 외교적 문제로 유대교를 국교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후에 유대인으로 불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통 유대인은 아닌 것이다.




이 책에서는 전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유대인은 바로 ‘아슈케나지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면서 고대에 정통 유대인의 왕이었던 ‘여호수와’가 당시 가나안인으로 불리었던 아슈케나지 유대인을 학살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복수하기 위해 유대인으로 가장해서 궁극적으로 셰파르디 유대인을 멸절시키려고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는 아슈케나지의 조상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아들 중 하나인 ‘야벳’의 후손이며, -정통 유대인은 ‘셈’의 후손이다- 고대에 지중해를 통해 상업을 일으킨 ‘페니키아’도 그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기본 텍스트가 두 가지가 있다. 신약성서의 ‘묵시록’과 유대인의 세계 지배 계획을 담고 있다는 ‘시온의정서’가 그것이다.

역사적 사실의 여부나 사실 정도의 다과를 떠나서 이 책에서 세계의 이면사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고 유익하다. 예를 들어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1, 2차 세계대전의 발발 등이 아슈케나지 세계 경영 계획 하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사실 볼세비키 혁명이나 러일 전쟁에서 영국이 개입되어 있고 자본을 댔다는 것은 거의 공공연한 일이며, 1차 세계 대전 후 망가진 독일을 재건하는데 미국의 자본이 투입되었다는 것도 알려진 일이다. 다만 이것을 이 책에서는 아슈케나지 유대인이라는 하나의 끈으로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카톨릭적 시각에서 기술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독자에게는 약간 부담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이사벨라 여왕이 스페인에서 유대인을 몰아냈을 때 이들이 네덜란드로 이주했다는 것이 정설인데, 네덜란드에서 활약한 유대인을 모두 아슈케나지로 본 것은 조금 논리적 비약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거대 유대 자본의 세계 지배 음모를 분쇄할 수 있는 방법은 소규모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에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조금은 막연하다는 감을 지울 수 없지만, 중요한 점은 세계사의 흐름을 표면적으로, 단속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는 눈과 지혜를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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