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훌륭한 선택이 될 수 있어." 내가 말했다. "나는 네 기분을 맞춰줄 수 있어, 진짜야. 나보다 더 충성스러운 배필은 없을 거야.
내가 뭐든 할게."
그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내 가슴속에담긴 천 가지의 굴욕적인 발언과, 지금까지 비축한 열정의 모든 증거와, 앞으로의 비굴한 다짐을 쏟아내기 전에 그의 능력이 나를 감싸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쿠션을 정리했을 때처럼 손을 퉁겨 나를 내방으로 돌려보냈다.
- P74

모든 신이 똑같을 필요는 없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픈 건 아니었지만 따끔거리는 그 느낌이 가실 줄 몰랐다. 손가락을 뺨에 대고 눌렀다. 프로메테우스를 떠올린게 얼마 만이었을까? 그의 모습이 내 눈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갈기갈기 찢긴 등과 흔들림 없었던 표정, 모든 걸 아우르던 까만 눈 - P81

나는 그들과 달랐다.
다르다고? 낮고 우렁찬 삼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생각을 해야한다. 키르케, 그들이라면 어떻게 하지 않겠는지.
- P81

"그동안 뭘 하고 있었어? 이렇게 한참이 걸릴 줄이야. 어쩌면 누나는 파르마키스가 아닌가보다는 생각이 들려던 참이었다고."
내가 모르는 단어였다. 그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모르던 단어였다.
"파르마키스" 내가 말했다.
마녀라는 뜻이었다. - P91

"하지만 괴물은 항상 자기 자리가 있잖아. 그녀는 이제 그 이빨로 모든 영광을 낚아챌 수 있어. 그 덕분에 사랑을 받을 일은 없겠지만 구속당할 일도 없지. 그러니까 바보처럼 우울해하고 있다면 잊어버려. 내가 보기엔 누나가 그애의 신세를 개선했다고 말할 수도 있으니까."
- P95

 나는 천 년 동안 나와 가족 간의 거리를 채우려고 애를며 살아왔다. 거기에 비하면 내 집을 채우는 건 수월했다. 벽난로에백향목을 피우면 시커먼 연기가 동무가 되어주었다. 예전에는 어머니가 물에 빠져 죽어가는 갈매기 소리 같다며 못 부르게 했던 노래도불렀다. 정말로 외로워질 때에는, 남동생이나 예전의 글라우코스가그리워질 때에는 숲이 있었다. 도마뱀들은 나뭇가지를 따라 쓴살같이 움직였고, 새들은 날개를 번뜩였다. 꽃들은 나를 보면 만져달라고폴짝폴짝 뛰는 강아지처럼 앞으로 밀치락달치락하는 느낌이었다.
- P109

나는 끈질기게 밀어붙였다. 내 어린 시절을 통해 터득한 게 하나있다면 그건 인내심이었다. 조금씩 귀가 트이기 시작했다. 식물 속에서 즙이 흐르는 소리, 내 혈관을 타고 피가 흐르는 소리. 나의 의도를파악하는 법을 터득하고, 가지를 치고 더하고 능력이 모여 있는 곳을느끼고 알맞은 단어를 동원해 그걸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법을 터득했다. 마침내 모든 게 선명해지고 마법이 나를 위해, 나만을 위해 불순물 하나 없는 노래를 부르는 순간, 그 순간을 위해 살았다.
- P112

"생각해봐." 그가 말했다. 불행한 인간과 행복한 인간, 둘 중에 누가더 제물을 열심히 바치겠어?"
"당연히 행복한 인간이죠."
"틀렸어. 그가 말했다. "행복한 인간은 열심히 사느라 정신이 없거든. 아무한테도 신세를 진 게 없다고 생각하고, 하지만 그를 쓰러뜨리고 아내를 죽이고 아이를 불구로 만들면 저절로 소식이 들릴 거야. 온 가족을 한 달 동안 굶겨가며 새하얀 한 살배기 송아지를 제물로 바칠 거야. 여건만 허락한다면 백 마리도 사서 바칠걸."
- P126

남동생 한 명은 죽은 자를 살리고, 다른 한 명은 용을 길들이고,
언니는 스킬라를 변신시켰다. 이제 아무도 파시파에를 화제로 삼지않았다. 그런데 희미해져가던 그녀의 별이 단박에 다시 반짝거리기시작했다. 이제는 온 세상에서 인간을 잡아먹는 거대한 황소를 낳은크레테의 왕비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신들은 수수방관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기도가 그들에게바쳐질지 생각해보라.
- P175

나는 아이가 팔을 날개처럼 구부리고, 자기 동작과 사랑에 빠진어리고 튼튼한 다리를 움직이며 춤을 추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인간들은 이런 식으로 명성을 쌓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력과 끈기를 통해, 태양 아래에서 빛날 때까지 정원을 가꾸듯 기술을 연마해가며, 하지만 신들은 이코르와 넥타르의 산물이라 탁월함이 이미 손끝에서 터져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입증하며 명성을 쌓았다. 도시를 무너뜨리고 전쟁을 일으키고 역병과 괴물을 낳고, 우리의 제단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그 모든 연기와 향기. 남는 건 재 가루뿐이었다.
- P176

아리아드네의 가벼운 발이 무대를 가로질렀다가 다시 가로질렀다.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선물처럼 모든 스텝이 완벽했고, 아이는미소를 지으며 그 선물을 받았다. 아이의 어깨를 잡아주고 싶었다.
뭘 하든 너무 행복해하면 안 된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그러면 머리 위에 불벼락이 쏟아질 거라고,
- P176

아들을 앞세웠을 뿐 다이달로스도 금세 떠났다. 팔다리가 기운을잃고 회색으로 변했고 그의 모든 능력이 연기로 바뀌었다. 내게 그를가기할 권한이 없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고독한 삶을 살다보면 별들이 일 년에 하루 땅을 스치고 지나가 아주 간혹 누군가의 영혼이내 옆으로 기는 때가 있다. 그가 내게 그런 별자리와 같은 존재였다.
- P198

 프로메테우스도 애기했다시피그것이 그들의 운명이었고 그들 모두가 공유하는 사연이었다. 살아생전에는 아무리 활기 넘쳤어도, 아무리 눈이 부셨어도, 아무리 경이로운 업적을 남겼어도 결국은 먼지와 연기 신세였다. 반면에 아무리하찮고 쓸모 없더라도 신은 별빛이 꺼질 때까지 계속 환한 공기를 마실 것이다.
- P207

"마녀. 내가 말했다. "무한한 능력을 소유한, 자기 자신 말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답을 할 필요가 없는."
"그렇군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처럼요? 외로움의 냄새가 코를찌르는 애처로운 추방자요?" 그녀는 내 얼굴에 떠오른 충격을 알아차렸다. "왜요, 고양이와 돼지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까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셨어요? 저를 만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았는데 곁에 붙잡아두지 못해 안달이잖아요.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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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내가 맨 처음 터득한 교훈이었다. 매끄럽고 익숙한 표면을 해치면, 세상을 두 동강 낼 다른 무언가가 그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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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사람들은 약속하고 있었다. 이 숲을 나가도 레이첼의 식물들을 심겠다고, 숲 바깥 세계에서 가능성을 찾아보겠다.
고, 프림 빌리지를 만들겠다고, 그러니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지수는 그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면서, 손을 잡고 안으면서,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바라왔는지를 알았다. 지수야말로 프림 빌리지를 끝까지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 세계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 P343


"한 명이 아니었어요. 한 장소도 아니었죠. 온실에서 떠난 이들이 거의 같은 시대에 각자 도착한 곳에서 모스바나를 기르기시작했어요. 여기가 나오미와 아마라. 당신들이 도착한 지점이죠 그리고 여기는 중국 남부 지역이고요. 또 여기는 독일이고,
이렇게 점으로부터 퍼져 나간 선을 전부 그어보면.....… 거의 세세계의 전 대륙에 최초의 모스바나들이 심어졌다는 것을 알 수있어요. 그래서 모스바나들이 그렇게 단기간에 지구를 뒤덮을수 있었던 것이죠."
아영은 자신이 이 논문의 데이터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어펀 놀라움과 슬픔,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나오미도 만나게 되기를 바랐다. 아영은 나오미가 지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오미의 표정이 점차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오미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만이 아니었군요. 모두가 잊지 않았어요."
"맞아요. 당신들이 약속을 지켰고, 세계를 구한 거예요."
- P363

인간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반대로 알고 있는 셈이지요.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식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지만, 식물들은 동물이 없어도 얼마든지 종의 번영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요. 인간은 언제나 지구라는 생태에 잠시 초대된 손님에 불과했습니다. 그마저도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위태로운 지위였지요.
- P365

해지는 저녁, 하나둘 불을 밝히는 노란 창문과 우산처럼 드리운 식물들.
허공을 채우는 푸른빛의 먼지, 지구의 끝도 우주의 끝도 아닌,
단지 어느 숲속의 유리 온실, 그리고 그곳에서 밤이 깊도록유리벽 사이를 오갔을 어떤 온기 어린 이야기들을.
- P385

온실의 모순성을 좋아한다. 자연이자 인공인 온실, 구획되고통제된 자연, 멀리 갈 수 없는 식물들이 머나먼 지구 반대편의풍경을 재현하는 공간. 이 소설을 쓰며 우리가 이미 깊이 개입해버린, 되돌릴 수 없는,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곳 지구를 생각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마도 나는,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 P389

 그러니까, 이런 이상한 식물이 존재할 수 있을까. 원예학을 전공한 아빠가 나에게 해준 대답은 "식물은 뭐든 될 수 있다"라는 거였다. 지구 곳곳에 실존하는 기이한 식물들에 대한, 끝없이 이어지던 이야기는 덤이었다.
- P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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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다. 지수가 보이온 돔 바깥의 사람들은 허황된 신념에 몸과정신이 묶여 있었고, 종교를 믿거나 혹은 종교에 준하는 가치를신봉했는데, 오직 그것만이 이 끔찍한 세계를 견디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곳의 사람들은 어떤 신념 없이 그저 내일을믿었다. 그들은 이 마을의 끝을 상상하지 않았다. 한 달 뒤의 창고 보수 일정을, 다음해 작물 재배 계획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다. 레이첼의 온실이 마을에 희망의 감각을, 죽음과의 거리감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의 실체가 불안정한 거래에 불과할지라도 그랬다.
- P299

이 관계가 단순한 거래 관계에만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지수는 자신이 조금씩 사람들이 가진 어떤 활력에 물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수년 뒤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내일의 삶만을 생각하는, 그러나 그 내일이 반드시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데에서 오는매일의 활기에.
프림 빌리지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었다. 이곳은 그들을 받아들여준 유일한 세계였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허락된 세계를 더 확장하고 싶어했다. 지수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아이들이 지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지수는 어떤 믿음을 보았다. 아이들은 너무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이 작은 세계가 망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지구상의 모든 곳이 파멸로 치달아도 이 마을만큼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자신들이 어른이 되는 날까지 프림 빌리지는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imin) 어제가는 이 마을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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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알겠습니다. 우리가 결국 만나게된 이유도요. 저는 운명을 믿지는 않지만, 같은 것을 쫓는 사람들이 하나의 길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고 믿거든요. 우리는 그 기이한 푸른빛에 이끌렸고, 또 같은 사람을 통해 연결되어 있네요그 사람의 생사를 알게 되면 꼭 바로 알려주세요.‘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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