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하는 경아에게 고개를 저었다. 형편없는 사람들은 많다.
재인은 아빠 덕분에 연애를 막 시작한 나이부터 형편없음에 대한 예민한 안테나가 발동하여 용케 피한 셈이었지만, 아무리 경계심 있는 여자라 해도 폭력적인 남자에게 걸리드는 건 순시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형편없음은 다른 종류의 형편없음과언제나 일맥상통하므로 형편없음에 대한 예방주사는 일찍 맞을수록 좋으리라고 재인은 생각하곤 했다.
- P127

력이 되었던 것이다. 재인은 어렸을 때부터 이런 이야기를 좋아했다. 여자아이가 대부분의 이야기에서처럼 누군가에게 구해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 여자아이가 다른 여자아이를 구하는 이야기. - P132

"게다가 어쩌면 구해지는 쪽은 구조자 쪽인지도 몰라."
재인과 재훈은 재욱이 덧붙인 말을 도움을 준 사람 쪽의 심리적인 보상을 뜻하는 것으로 알아들었지만, 사실 직접적인 의미였다. 재욱과 산제이가 수도에 가 있는 동안 플랜트에서 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용접 중에 감전 사고가 일어나 사람들이다쳤는데 목숨을 건진 게 다행일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다.
사고가 일어난 구역은 휴가를 가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담당했을 구역이었다. 두 사람이 아이들을 구한 게 아니라 아이들의두 사람을 구한 걸지도 몰랐다. 어느 쪽 둘이었습니까. 재욱은가끔 궁금했다.
- P163

그간 일어난 일에 대한 제 나름의 납득도 다 달랐다. 재인은 먼 미래에서 경아의 후손이 일을 도모했을 거라고 믿었고, 재욱은 사막에서 잘보이는 별에 있는 다른 문명에서 온 신호라 여겼고, 재훈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바지락조개를 의심해서 해양과학 쪽으로 진학할까 고민 중이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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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게 생각이 나면 좋을 텐데, 그저 결혼이 그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잡아먹을 수 있다는 경고로 떠오른다는 게 슬렸다. 더 솔직히는 슬프기보다 두려윘다. - P21

동생들의 어깨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문신으로 새길 기세로 재인은 잔소리를 자주 했는데, 어쩌면 그 잔소리는 밖이 아니라 안을 향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재인도 살면서 한두 번 실수를 해봤다. 친한 친구와 술김에 키스를 해보았고, 어느 한쪽과 사귀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과 동시에 데이트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초반에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었던 건, 실수 쪽으로 계속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어떤 경계심이 늘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안에 아주 더러운 기질이 있어, 평생 발정기인, 다른 사람을 해치고도 뻔뻔스러울 수 있는, 혀를 덜렁덜렁빼문 괴물이 있어. 고삐를 잡아야 해, 사슬을 채워야 해, 재인은매번 다짐했다. 나쁜 형질의 이미지를 늘 그로테스크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재인은 과학자답지 않았다.
- P22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착각한 모양이라고 여겼다. 어울리지 않게 열심히 했더니 뇌가 전자레인지에 돌린 스트링치즈 같았다.
- P26

재인은 물론 재훈에 비해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서른한 살이면 배스킨라빈스의 모든 맛을 한 번씩은 다 먹어본나이였다. 단종되고 교체되는 맛까지 합치면 생각보다 더 풍부한 맛을 말이다. 꽃잎 모양 브로치를 달고 마법 소녀가 되어달라는 요청 같은 걸 받아들이기에는 확실히 늦어 있었다.
- P29

대전은 해태를 닮은 아가씨가 살기에 쾌적한 곳이었다. 밤에는 멀리서 보이는 엑스포 아파트도 멋있고 유명한 야구선수들이 산다는 스마트 시티 불빛에도 종종 감탄하곤 했다. 사실 연구단지와 기숙사 쪽은 인적도 드물고 쓸쓸했으나 룸메이트인경아와 마음이 잘 맞아 함께 잘 돌아다녔다. 경아는 아버지 직장을 따라 전국을 옮겨다니며 자랐다는데, 대전에서는 고등학고 시절을 보내서 재인에게 구석구석 좋은 곳을 많이 안내해주었다. 재인 혼자서라면 몰랐을 곳들을 말이다.
- P40

"너 그러다가 평생 개랑 살겠다?"
엄마는 경아를 예뻐하면서도, 경아 얘기가 나올 때마다 불안해했다. 본인은 결혼에 처참하게 실패해놓고 어째서 재인은 성공할 거라 믿는지 알 수 없었다. 경아에게는 원거리 연애 중인남자친구가 있다고 이야기해주자 더더욱 불안해했다.
"개는 콩알만 한 게 실속 있네. 너는 퍼석하기가 그지없어, 실속 없는 년."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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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다‘는것은 약함을 아는것. 약하다는것은 겁을 내는것 - P253

겁을내는것은 소중한 것을가지고 있다는것. 소중한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강하다는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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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링을 칠 때도랑으로빠지라고굴리는 놈은없어.
스트라이크를노리고 굴려야게임이 되지.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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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였다. 매 순간이 의지였다. 따지고 보면 주문과도 같았지만이건 나에게 거는 주문이었다. 아이는 넘쳐흐르는 거대한 강물이었고, 나는 아이의 급류를 안전하게 유도할 물길을 매 순간 준비해고 있어야 했다.  - P334

나는 뭐라고 말을 건네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이미 나에게서등을 돌리고 숲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P343

오래전에 내 널찍한침대에 누워서 오디세우스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너는 어떻게 했느냐?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이 네 얘기를 듣지 않았을 때 말이다."
그는 벽난로 불빛을 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야 간단하죠. 그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걸 감안해서 계획을 세우면 됩니다."
- P352

나와 그렇게 많은 밤을 함께한 남자가 내가 들려 보낸 무기에 찔려 내 아들의 품에서 죽다니. 운명의 여신들이 나와 아테나와 우리모두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씁쓸한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예언에 반항하면 할수록 그 예언은 더욱 단단히 숨통을조인다는 것.  - P376

그의 아버지가가장 즐겨 쓰던 단어였다. 두 손을 들고 쓴웃음을 지으며,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세상이 원래 부당한 곳이잖습니까.  - P388

하지만 나는 그녀가 오디세우스를 운운하며 기는 탐스러운 눈빛을 기억했다. 발톱으로 먹잇감을 거머쥔 올빼미의 눈빛이었다. 그녀의 총아가 재미없고 가정적인 인간이 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항상 고군분투하고 목표를 향해 달리고, 항상 죄를 찌르는 새로운 지략과 불쑥 소환하는 번뜩임으로 그녀에게 재미를 선사하며, 눈부시고 탁월하게 현재진행형의 삶을 살아야 했다.
- P427

"신들은 자기가 부모인 듯 굴지." 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손뼉을 치며 좀더 달라고 외쳐대는 어린애다."
- P427

 내 과거는 재미있는장난도 모험담도 아니었다. 폭풍에 떠밀려 와 바닷가에서 썩어가는흉물스러운 난파선이었다. 오디세우스의 과거 못지않게 추악했다.
- P435

그렇게 간단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내가 할게요. 그래서 당신이 행복해진다면 내가 같이 갈게요. 심장에 금이 가는 순간이 세상에 있을까? 하지만 금이 간 심장으로는 부족했고 이제 나는 그걸 모를 정도로어리석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입을 맞추고 혼자 걸음을 옮겼다.
- P496

무섭지 않다는 뜻에서 한 말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여기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파도 속에서헤엄친다는 게, 흙을 밟고 걸으며 그 느낌을 감상한다는 게 그런 뜻이다. 살아 있다는 게 그런 뜻이다.
- P500

매들린 밀러는 ‘키르케‘가 서양 문학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마녀라는 점에 매혹되었다고 한다. 사회가 여자에게 허용해준 힘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여성에게 주어지는단어가 마녀인데, 키르케가 바로 그 경우라고 본 작가는 소설 키르케를 통해 남성영웅들이 당연하게 갖고 있는 능력을 여성에게도 부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마녀,
내가 말했다.
"무한한 능력을 소유한,
자기 자신 말고는 어느 누구에게도답을 할 필요가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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