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게 생각이 나면 좋을 텐데, 그저 결혼이 그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잡아먹을 수 있다는 경고로 떠오른다는 게 슬렸다. 더 솔직히는 슬프기보다 두려윘다. - P21

동생들의 어깨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문신으로 새길 기세로 재인은 잔소리를 자주 했는데, 어쩌면 그 잔소리는 밖이 아니라 안을 향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재인도 살면서 한두 번 실수를 해봤다. 친한 친구와 술김에 키스를 해보았고, 어느 한쪽과 사귀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과 동시에 데이트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초반에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었던 건, 실수 쪽으로 계속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어떤 경계심이 늘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안에 아주 더러운 기질이 있어, 평생 발정기인, 다른 사람을 해치고도 뻔뻔스러울 수 있는, 혀를 덜렁덜렁빼문 괴물이 있어. 고삐를 잡아야 해, 사슬을 채워야 해, 재인은매번 다짐했다. 나쁜 형질의 이미지를 늘 그로테스크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재인은 과학자답지 않았다.
- P22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착각한 모양이라고 여겼다. 어울리지 않게 열심히 했더니 뇌가 전자레인지에 돌린 스트링치즈 같았다.
- P26

재인은 물론 재훈에 비해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서른한 살이면 배스킨라빈스의 모든 맛을 한 번씩은 다 먹어본나이였다. 단종되고 교체되는 맛까지 합치면 생각보다 더 풍부한 맛을 말이다. 꽃잎 모양 브로치를 달고 마법 소녀가 되어달라는 요청 같은 걸 받아들이기에는 확실히 늦어 있었다.
- P29

대전은 해태를 닮은 아가씨가 살기에 쾌적한 곳이었다. 밤에는 멀리서 보이는 엑스포 아파트도 멋있고 유명한 야구선수들이 산다는 스마트 시티 불빛에도 종종 감탄하곤 했다. 사실 연구단지와 기숙사 쪽은 인적도 드물고 쓸쓸했으나 룸메이트인경아와 마음이 잘 맞아 함께 잘 돌아다녔다. 경아는 아버지 직장을 따라 전국을 옮겨다니며 자랐다는데, 대전에서는 고등학고 시절을 보내서 재인에게 구석구석 좋은 곳을 많이 안내해주었다. 재인 혼자서라면 몰랐을 곳들을 말이다.
- P40

"너 그러다가 평생 개랑 살겠다?"
엄마는 경아를 예뻐하면서도, 경아 얘기가 나올 때마다 불안해했다. 본인은 결혼에 처참하게 실패해놓고 어째서 재인은 성공할 거라 믿는지 알 수 없었다. 경아에게는 원거리 연애 중인남자친구가 있다고 이야기해주자 더더욱 불안해했다.
"개는 콩알만 한 게 실속 있네. 너는 퍼석하기가 그지없어, 실속 없는 년."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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