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금은 그런 살인들에서 거리를 둘 때였다. 죽음과 죽임은 이제 밀어 두어야 했다. 최근 가마슈는 그런 걸 너무 많이 보아 왔다. 그렇고말고 자신을 지나간 역사, 오래전 흘러간 삶 속에 묻어 두는 것이낫다. 지적 탐색일 뿐이니까.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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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신령한 존재라는 의식은 멀리 켈트족 전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켈트족 왕은 용과 괴물이 상징하는혼돈의 힘과 싸워 이기고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는 존재다. 켈트 신화에서 왕은 세상의 중심인 신성한 나무에 자리 잡고 우주의 조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며, 치유와 예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성격을 띠는 유럽의 군주를 ‘기적을 행하는 왕thaunaturgic king‘이라부른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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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세속 국가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놀라운 반전이 준비되었다. 교회의 근본적 변화가 다시 세속 국가의 발전을 가져왔다. 쉽게 말해 교회 공동체의 발전을 모범으로 삼고 따라 한 것이다. 그들도 로마법을 연구하여 국가의 기본법을 다듬더니, 각국내부에서는 국왕이 로마황제와 다름없는 지상권을 가진다는개념을 만들었다.  - P123

우르바누스 2세는 이것을 발전시켜 신앙의 적과 싸우러 가는 행위가 순례라는 놀라운 해석을 제시했다. 십자군운동은 개념적으로 전투 이전에 순례 행위다. 기사들은 자신을 순례자로 칭했다. 다만 칼을 가지고 순례에 나선 점이 달랐을 뿐이다. 성스러운 전투와 참회, 이 두 가지를 연결한 것이 십자군운동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폭력을 휘둘러 살인을 하는 행위가 죄를 닦는 선행이 되다니! - P133

소년 십자군에 대해 기록한 연대기는 50개가 넘는다. 당시 기록에서는 ‘푸에리pueri‘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 말은 10대 청소년을 가리킨다. 이와 관련해서 학계에서 비판적인 견해가 제시된 적이 있다. 1970년대에 피터 라츠Peter Raedta라는 역사가는 ‘푸에리"라는 말은 실제 나이가 적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 곧 가난한사람들, 주변인, 배척당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했다. - P139

순진무구한 어린이들이 종교적 흥분과 열정에 휘몰린 희대의 사건은 심대한 위기에 빠져든 중세 유럽 사회의 종말론적 분위기를말해준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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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그 신사 양반에 대한 평판이 별로 좋지 않은 편이랍니다. 선생님. 온갖 소문이 다 돌고 있거든요. 게다가 런던에서 내려온 친구들과 함께 과상한 일들을 벌이곤 했죠 한밤중에 ‘마녀의 들판에 올라가서 말이에요"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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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7년 1월, 독일왕이자 장차황제가 될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북부의 험준한 산악 지역인 카노사Canossa의 성에 찾아왔다. 이곳에는 그에게 파문 선고를 내린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머물고 있었다. 엄동설한 맹추위에 말총으로 만든 참회복을 입고 눈밭에 사흘동안 맨발로 서서 용서를 빈 결과 교황은 파문을 거두어들였다. 이것이 ‘카노사의 굴욕‘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 P109

교황에게 ‘당신이나 사퇴하라‘는 식의 모욕적인 답신을 보낼 때는 의기양양했겠으나, 그 직후부터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갔다. 교황은 서신에 서명한 주교들의 권한을 정지시켰고, 하인리히를 파문하면서 모든 기독교 신자들에게 그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독일 귀족들로서는 그들을 억압하던 국왕이 파문당하는 게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국왕에 대한 저항이 종교적으로 완전히 합리화되자 일부 귀족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일종의 청문회를열어 하인리히의 모든 권한을 문제 삼아야 한다고 교황에게 요청했다. 교황은 이 사태를 결정짓기 위해 독일로 향했다. - P112

카노사 사건 당시 독일로 여행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안전을 보장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마틸다의 공적이다. 하인리히 4세의 지지 세력이 교황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마틸다는 군사를 동원하여 교황을 보호하고카노사의 성으로 안전하게 피신시켰다. 하인리히가 바깥에서 참회의 퍼포먼스를 하는 동안 마틸다는 성안에서 교황에게 사태 해결을 위한 조언을 해주었다. 이에 위기에 맞서 ‘오직 베드로의 딸 마틸다만이 저항했노라sola resistitMathildis, filia Pétri"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공적을 인정하여 교황청은 17세기에 마틸다의 시신을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로 이장했다. 여성으로는 유일하다. 천재 조각가 베르니니가 마틸다의 조각상을 세웠고,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교황청을 지켜낸 마틸다 여백작은 고대 아마존 전사에 필적한다‘는 비명을 썼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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