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껍질이 떨어져나가 속살이 드러난 크루아상처럼 서러웠어. 그날만은 그 선배도 잘해주었지만, 문을 벌컥 여는 행동의 저 바닥에는 분명 적의가있었다고 생각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말이야. 금방 떠나버릴 외국인, 무책임한 외국인, 질 나쁜 외국인,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언제나 모른 척 웃고 있었으니까 진짜로 웃지 않는 걸 들켜버려서 더 미움받았으니까. - P42

중국인들은 어쩐지 판다에 대해서 쿨할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더라. 어두운 방에서 모니터만 빛내며 판다 동영상을 무한 반복해서 보고 있는 남자친구를 보면 가끔 짠해. 그런 날은 힘든 일이 있었던 날이거든, 너도 힘들구나, 그게 우리 관계의 바탕인 거 같아. - P47

오빠만 해도 부족함 없이 두시간 거리 대도시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고. 오빠보다 공부를 잘했던 게 아빠의 어딘가를 자꾸 건드렸던 걸 몰랐던 건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나올 줄이야.
아무래도 서울은 아닌 것 같다. 통학할 수 있는 학교로 내년에 다시 봐라, 그보다 대학을 꼭 가야 하겠냐. 나는 구운 머랭처럼 하얗게 굳어서 앉아 있었지. 울며불며 패악을 떨어볼까 했는데 그럴 힘도 나지 않았어. 아빠가 어깃장을 놓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는 걸알고 있었으니까. 아빠의 눈에 내가 온전한 한 사람이 아니란 걸터득한 지는 벌써 오래여서 결국 오빠한테 전화를 걸었고, 소환되어 온 오빠가 나 대신 싸웠어, 건성으로 싸웠는데도 아빠를 설득해냈어. 오빠의 결정적인 한마디는 ‘남들이 흉본다‘였지. 어릴 때 내내 때리고 괴롭혔던 걸 그 설득으로 갚았다고 생각해. - P51

근이는 좀처럼 집요한 타입이 아니었으니까. 억눌리지도 뒤틀리지도 않은 사람이 집요하기란 쉽지 않아, 그치?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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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고통을 겪는것, 살아남는다느 것은 고통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것.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P18

모든 건 끊임없이 변화하고,
절대로 변치 않는 것이 있다면바로 그 끊임없는 변화라는 걸말하려 했던 겁니다.
ㅡ헤라클레이토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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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동안의 팽팽한 신경전 끝, 식장에 들어가기 직전에 여자는마지막으로 거울을 돌아보았다. 역시나 멋진 타투였고 드레스와도잘 어울렸다. 내 몸은 내 거야. 결혼을 한다고 해도 내 몸은 내 거야 내 마음대로 할 거고 다들 보라고 해.
44명의 여자 중에 가장 멋진 워킹으로 입장했다. - P14

여덟번째 여자는 칼럼니스트였다. 여자는 결혼해서 사는 삶에어느정도 익숙해졌을 때 혼잣말을 했다.
"이제 환멸에대해서는, 웬만큼 쓸 수 있겠군" - P15

여자는 고전문학 전공자였는데, 고전문학 속 영웅들이 대다고아인 것에 대해 다시생각해보았다. 고아들만이 진정으로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 P15

"결혼생활 안에서 너를 변호해줄 사람은 없어. 너밖에 없어. 그게 안되면 언니한테 전화해."
사촌언니는 변호사였다. 열세번째 여자는 의아했으나 이후 이어진 결혼생활에서 언니의 말뜻을 이해했다.  - P17

"아마 다음에 소식을 들으면 부고겠지."
이혼 수속이 끝나고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길에서 죽지 마."
결혼생활은 지옥이었지만 그 말은 진심이었다. - P19

그게 신경 쓰였다. 친구의 우울을 감지한지좀 되었다. 변화가 없는 사회는 아니지만, 변화가 느린 사회라서 친구가 지쳐간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오지 않는다 해도 섭섭해하지 - P22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을 때, 스물한번째 여자의 남편은 빈정거렸다.
"그렇게 매사 우울해서 어떻게 사니? 차라리 약을 먹어라. 응?"
여자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내 우울은 지성의 부산물이야. 너는 이해 못해." - P23

두번은 넘어갈 수 없었다. 둘 다 일하는데 식사 준비를 여자가하는 건 여자의 자발적인 기여일 뿐이었다. 남자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차분하게 반박해야 했지만 여자도 쌓였던게 많았다.
"다시 말해봐 씨발새끼야."
격론 끝에 남자는 마트 앞에서 울었다. 여자는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 P25

여자의 친척이 성당에서 하는 예비부부 수업을 추천했고, 곧이어 남자의 친척이 절에서 하는 수업을 추천했다. 종교가 없는 여자는 당황스러웠다.
54
"네? 결혼을 절대 안하실 분들이 결혼에 대해 하는 말을 들으러가라고요?" - P26

서른다섯번째 커플은 신혼 내내 저녁마다 나라 걱정을 했다.
"신혼부부가 나라 걱정하느라 섹스할 시간이 없네."
"이게 출산율 저하의 이유군." - P29

"자기는 왜 그런 생각을 안해? 불행은 보이지 않는 모퉁이 너머마다 서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놀래키고, 인생은 그 반복일 뿐이라고 누가 그랬어. 그 말이 맞는 거 같아. 우리 둘은 이제 불행 공동체가 된 거라고."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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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의 단편소설 모음. 꿈과 희망도 없는 저세상결말들 모음집이다ㅠ 그나마 희망적이라면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특히 여섯번째 소설 ‘덫‘은 강렬하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당신에게만은 대체할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이고 싶었습니다.」셋이 동시에 나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나는 세스의 손이 1호의 목덜미를 잡고 데릭이 1호의 허리를 잡은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셋이 전원과 중앙처리장치를 연결해 쓰고 있다.
그래서 맛이 가 버렸던 1호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이다. - P141

나는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침대 전체를 적시는 것을 느끼며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침실 창문 밖으로 셋이 밤의 거리를 걷는 모습이 보였다.
여섯 개의 다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가로등 아래를 지나갈 때 우연인지 알 수 없지만, 가로등 불빛이 흔들려 셋의뒷모습이 어둠에 가려졌다.
그것이 내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 P143

아내는 말을 안아 올렸다. 계속 여동생의 다리에 달라붙어피를 빨아먹으려는 아들을 뿌리치며 아내는 딸을 데리고 있간에서 나가려 했다. 남자는 아내를 저지했다. 아들의 몸에서 계속 금을 얻으려면 딸의 피가 필요했다. 황금의 원천을아내가 들고 나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 P155

커다란 검은 눈이 무표정하게 빛나고 검은 머리카락이폭포수처럼 등으로 흘러내린 아름다운 소녀로 자라났다. 그것은 무감각하고 서늘한 병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딸은 보통의여자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으므로, 그 존재의방식에 맞게 달빛 아래 검은 숲과도 같이 그 무심하고 비밀스러운 폐쇄성으로 상대를 홀리고 사로잡는 매력을 발산했다.
남자의 아들은 아버지의 눈을 피해 누이동생의 방에 몰래드나들게 되었다.
그것은 여동생의 피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 P157

소년은 쇠사슬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거듭해서 돌에 부딪혔으나 다시는 벌레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소년은 그래서처음으로 흐느껴 울었다. 공포로 범벅된 정신 나간 비명이 아니라, 자신의 고독을 이해하고 슬퍼하는 인간의 눈물이었다. - P173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다. 결혼해서 가정이 있는 경우에는더욱 그렇다. 집 밖의 문제를 피해 가정으로 돌아와도 가족이집 안에서 또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 P259

- 그래도 정신 차리고 바깥바람도 좀 쐬고 그래야지. 아직 젊고애도 없이 홀몸인데 요즘 세상에 과부 수절할 일 있니? 여행도다니고, 사람도 좀 만나고….
아이가 그녀의 전화기를 뺏으려고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엄마 지금 전화하잖아."
- 응? 뭐라고?
그녀는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아냐, 엄마." - P263

"네가 나를 불구로 만들었으니 나는 너의 자손들을 불구로만들겠다. 네가 나의 피를 모래땅에 흩뿌렸으니 앞으로 이 모래땅을 지배하는 너의 핏줄은 아무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 P270

아이는 생존을 위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자기 나름대로파악한다. 어린아이의 지각에는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에 대한 세상의 호의와 인간의 신뢰 여부를 아이는 어른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한다. 왕자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친절하고 예의 바르지만 진심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했다. 왕자가 아는 한, 그것은 세상과 인간의 기본적인 특성이었다. - P271

"인간의 본모습은 공주가 아는 것과 다르다. 저주가 풀리더라도 공주는 왕자와 결혼하지 못할 것이다." - P283

궁궐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테라스 아래 모여 섰던 사람들이 모두 공주를 쳐다보았다.
"잡아라!"
왕자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공주를 가리키며 고함쳤다.
"주술사와 내통한 마녀다! 잡아라!"
왕자의 명령에 병사들이 마시던 술잔을 내던지고 공주를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 P289

"나와 함께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가 되어 시간의 지평선을떠다니며 살 수 있다. 태양과 달이 부서져 사라지는 날까지, 별과 구름이 손에 잡히는 이 무한한 공간이 모두 공주의 것이다." - P293

나로서는 그를 묶는 것 자체가 불쾌하거나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상에 취향은 여러 종류가 있는 법이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면 애초에 그 상황에 계속 머물러 있지도않았을 것이다.  - P308

"할아버지는 이미 지나간 전쟁을 이미 사라져버린 수용소를 평생 두려워하면서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낸 수용소 안에서 살고 있었던 거야. 할아버지는 죽고 난 뒤에야 정말로 자유롭게 자기 도시의 거리를 걸을 수 있게 됐어." - P312

"어머니하고 지낼 때는 괴로웠지만, 내가 나빴으니까, 내가 나쁘기 때문에 어머니도 고통받았으니까 나쁘지 않게 되는 것이 목표였어. 내가 나쁜 말을 하면 어머니는 울고, 굶으면서 기도하고, 나를 침대에 묶어놓고 때리고, 밤이 되면 잠든 채로 죽은 사람들을 따라 돌아다니지 못하게 밤새 그대로묶어놓고 가 버리기도 했어. 그러니까 내가 나쁘지 않게 되는것이 삶의 중심이었어." - P319

내 부모가 자식의 삶을 파괴하고 미래를 갉아먹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무리하게 확장시키려고 애쓰는 것도 이러한 강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키워줬으니 감사하라는 말 앞에는, ‘죽이거나 죽게 내버려두지 않고‘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아마그들에게는 진심일 것이다. 내 부모와 그들의 부모 세대, 한국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세대에게 가장 큰 화두는 언제나,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은 세대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이아니라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생존이기 때문이다.
이해와 용서는 전혀 다른 문제다. - P320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운 방식을 통해서,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혼자 제각각 고군분투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독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조그만 희망이다.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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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우리는 모두 ‘남자‘가 이해하는전쟁, ‘남자‘가 느끼는 전쟁에 사로잡혀 있다. ‘남자‘들의 언어로 쓰인 전쟁. 여자들은 침묵한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할머니의 이야기를 묻지않았다. 나의 엄마 이야기도, 심지어 전쟁터에 나갔던 여자들조차 알려들지 않았다.  - P17

또 여자들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 있다 - P18

나는 그것이 아니라 ‘여자‘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듣고 싶었고, 그래서 오랜 시간을 들여 삶의 영역이 저마다 다른 많은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것도 한 번의 만남에 그치지 않고 주기적으로 여러 번 만났다. 보고 또 보고서야 인물을 화폭에 담아내는 초상화가처럼. - P19

"전쟁이 끝나자마자 시집을 갔어. 남편뒤에 숨어 살았지. 하루하루 평범하게, 아이들 뒤치다꺼리하면서. 그렇게 기꺼이 나를 숨기고 살았어. 그리고 친정엄마가 ‘조용히 입다물고 아무 내색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거든. 나는 조국 앞에 내 할 바를다했지만, 내가 전쟁터에 나갔다는 사실이 슬퍼. 내가 전쟁을 안다는 사실이..
・・・・・・ 당신은 아직 애야. 애. 그래서 나는 이런 일을 하는 당신이 딱해......" 이들이 조용히 앉아서 자신에게 귀기울이는 모습을 종종 본다. - P21

수색견까지 데리고 ・・・・・・ 만약 개들이 아이 울음소리를 듣기라도 하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어. 서른 명이나 되는 우리 목숨이 다・・・・・・ 이해가 돼?
결국 지휘관이 결단을 내렸어.…………누구도 지휘관의 결정을 아이 엄마에게 차마 전하지 못하고 망설이는데, 그녀가 스스로 알아차리더군. 아이를 감싼 포대기를 물속에 담그더니 그대로 한참을 있었어…… 아기는 더이상 울지 않았지.....… 아무소리도 내지 않았어.....… 우리는 차마 눈을 들 수가 없었어. 눈을 들어아기 엄마를 마주 대할 수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수도 없었지...…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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