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먹이를 주러 갔겠지. 그게 아니라면 수레를 왜 끌고 갔겠어.
요망한 생쥐는 비웃는 목소리로 물었다.
밤에 먹이를 주러 갔다고? 혼자서? 오리한테 먹이 주는 게 그렇게나 급한 일이야?
지유는 답을 찾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엄마는 그날 오리 먹이를 만드는 것도 혼자 해치웠다. 자신에겐 2층에서 내려오지 말라고 해놓고 그전엔 그러지 않았다. 곁에서 모든 걸 지켜보게 해줬다. ‘조수‘로 임명하고 이런저런 심부름을 시켰다. 뭔가를 물어보면 친절하게 가르쳐줬다. 그러니까 기분이 좋을 때에는. - P207

지유는 혼란에 빠졌다. 두서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아빠는 뭘 입고 갔을까. 옷도 신발도 없이 어떻게 갔을까. 가방은 왜 두고 갔을까. 혹시 휴대전화를 찾으러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까. 엄마는 이걸 왜 창고에다 두었을까.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릴까. 왜 이렇게 무서운 기분이 들까. - P213

아마도 그는 연락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터였다. 아내는 내용을보여달라 할 것이고. 이러쿵저러쿵, 의견을 빙자한 검열이 이어지겠지. 지금 이 순간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이 한 일을 아내에게 검열당하는 일. - P246

"늘 그런 식이야. 내가 원하는 걸 왜 네가 정해주는데?"
"내가 언제 그랬어?"
아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반달 모양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예민하게 굴거야? 나라고 속이 없어서그 신경질 다 받아주는 줄 알아?" - P259

"좀 전에 형사들이 찾아왔었어. 오면 연락 달래."
"나한테?"
짧은 순간, 어떤 빛이 아내의 눈을 스쳐갔다. 너무 빨리 사라져버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는 그것을 긴장으로 읽었다. - P264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조금만 참으면, 네 사람이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평범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만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이었단 말인가. - P266

이번엔 검색창을 눌러봤다. 이해할 수 없으나, 서로 맥락이 닿는 검색어 리스트가 밑으로 펼쳐졌다. 발골법, 뼈와 살 분리하기,
감자탕 끓이기, 고기 다지기・・・・・・・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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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웠냐?"
진우의 어조에서 의한 기대감이 읽혔다. 부부싸움 무용담이라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는 다가오는 종업원을 향해 빈 소주병을 흔들어 보였다.
"잘해라. 잘못하면 자다 간다."
진우는 말해놓고 혼자 킬킬거렸다. 묘하게 신경을 긁는 말이었다. 녀석은 작년에도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땐 술집이 아닌 결혼식장이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기에 오지랖 정도로만 들었다. 기분이 엿 같은 지금은 악질적인 농담으로 들렸다. 그는 입술만 움직여 상응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미친 새끼 뭐래? - P68

어느 유명 헬스 유튜버가 주장한 ‘미인론‘이 기억나는 순간이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미인이 있다고 했다. 인류가 보편적으로 지지하는 범용 미인, 꽂힌 자에게만 추앙받는 전용 미인. 그 기준을 적용하면 그녀는 후자에 부합했다. - P78

그녀는 깔깔 웃기 시작했다.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어버렸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처음 들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안겼다.
이번엔 허벅지 털을 넘어 그 밖의 것까지 세워 일으켰다.  - P87

65년을 살아온 인간은 상수지 변수가 아니니까. - P97

어머니는 애초부터 지유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자체를못마땅해했다. 어머니로 말하면, 양쪽이 재혼일 경우 한쪽의 아이에게 헌신하려면 다른 한쪽은 아이가 없어야 하며, 당신 아들은
‘다른 한쪽‘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믿는 양반이었다. 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지유 때문에 노아가 희생당하고 있는 셈이었다. - P111

"행복한 순간을 하나씩 더해가면, 그 인생은 결국 행복한 거 아닌가."
"아니,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그녀는 베란다 유리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 먼 지평선을넘어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실제로 보이는 건 유리문에 반사된실내풍경뿐일 텐데,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거" - P113

민영은 입술 끝을 비쭉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카톡으로 ‘ㅎ‘라는 답을 받을 때만큼이나 기분이 오묘했다. 언짢기는 하나 언짢은티를 내면 이쪽이 옹졸해지는 유의 반응이었다. - P131

생기없는 눈빛과 그늘이 짙은 눈두덩과 얄팍하게 꺼진 볼, 꺼칠하게 자란 수염과 막 걸친 듯한 옷. 지하도에 앉아 있으면 500원쯤 던져주고갈 사람이 서넛은 되겠다 싶은 몰골이었다. 한때는 학교에서 가장빛나는 별이었는데. - P140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잠깐 잠수했을 것이다. 어쩌면 사람 혹은 세상에 염증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마냥 쉬고 싶었거나, 때가 되면 수면으로 떠오르겠지.
- P142

유나의 러시아 유학도 이모의 지원으로 이뤄졌다. 공부도 끝내지 않고 돌연하게 돌아와버린 유학이었지만, 남자친구의 죽음 때문이라고 했다. 헝가리 유학생이었고, 차 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졌다가 일주일 후에 숨을 거뒀다고 했다. 동거 반년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 P144

가까스로 네,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인도양 어느 섬에서대답을 해도 그보다는 크게 들릴 것 같았다.  - P149

내일은 바라는 방향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
간절히 원한다 하여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것도. 유나는 겨울이가고 봄이 또 가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 P154

이제 와 추측건대,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자신을 향한 유나의 감정이 증오라는 것을. 그것도 자신을 통째 삼켜버릴 만큼 깊고 어둠고 뜨겁다는 것을. - P159

그는 그녀를 여자가 아닌 다른 존재로 봤다. 가장 가까운 단어를 찾자면 ‘야채‘ 정도나 될까. 달콤하진 않지만 가까이에 있고, 반하지는 않았으나 안전하며, 즐거움보단 이로움을 주는 존재. 야밤에도 거리낌 없이 찾아갈 수 있고, 태연하게 재워달라 말할 수 있으며, 편안하게 자고 가도록 배려해주는 사람. - P175

제가 물었어요. 왜 이혼하려고 하는데?
오빠 대답은 간단했어요. 더 살다간 죽을 것 같아서. - P179

새언니가 그랬나 봐요.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두 번이나있었다는군요. 한 번은 자살, 두 번째는 교통사고.
- P183

PS. 오래전 오빠한테 들은 말인데, 사돈어른도 차 사고로 돌아가셨다면서요? 만약 사돈어른이 새언니를 자른 게 사실이라면, 시기상사고는 그즈음에 일어났겠네요. 혹시 졸음운전이었나요?
- P186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먹고 싶지 않았다. 아니, 먹을 수가 없었다. 고개 숙이고, 거절당하고, 하하 웃고, 도로 위를 끝없이 달리면서 마음에 꽃을 심는 아버지의 돈으로는 아무것도. - P189

"너, 집에 들어와 살면 안 되니?"
긴 눈물 바람 끝에 어머니가 물었다.
"같이 쇼핑도 다니고, 외식도 하고, 영화도 보러 가고."
아이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매사를 눈물로 해결하며 살아온 사람다운 제의였다. 그녀는 1초도 망설이지않고 대답했다.
"꿈깨쇼" - P194

 두려웠다. 깊이 모를 늪으로 발을 디딘 기분이었다. 자아의 목소리는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끈질기게 자신을설득하는 목소리였다. 우연이야. 거기에서 뭘 읽으려 들지 마다른 목소리는 유나를 향해 묻고 있었다. 대체 아버지한테 무슨짓을 한 거냐.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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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는 먹이 만드는 법을 말해주었다. 아빠는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오리가 돼지고기를 먹는다는 게 신기한 눈치였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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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대답했다. "선과 악의 조화는 초창기의 우주에서 무너졌지만, 현재 다시 회복되었소. 이 두 힘은 재통합되었고, 그 탓에 이제는 선악을 구별할 수는 없게 되었소." 그가 한 대답 대부분이 이런 식이었다.
과학과 종교에서 문맥을 무시하고 끄집어 낸 메타포들을 무작위적으로 교배해서, 실제 문제와는 무관한 절충주의적 신조와 공허한 아포리즘들을 양산해 냈던 것이다. 양자 신비주의, 통속 우주론 급진적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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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들이여회개하라!
심판의 날이다가왔노라!
다가왔노라! 33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다가왔노라!다. 그가 땅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지난 30여 년 동안 저 사내의 뇌속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야"라는 생각을 1만 번 되풀이했던 것일까?
저런 것은 신념이 아니다. 마비 상태라고 해야 옳다. - P29

칠흑 같은 우주 벌레가 세계를 집어삼키기 위해 아가리를 연 것처럼, 원형의 어둠이 천구의 태양 반대편에서 자라나는 광경을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다. TV로는 물론 100번은 더 보았다. 각각 다른10여 개의 지점에서 관찰된 영상이었지만, TV로 보았을 때는 아무리보아도 싸구려 중에서도 가장 조잡한 특수 효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 P30

<버블>을 자연 현상의 하나로 설명하는 모델을 만들어 내려고 악전고투한 용감한 이론가들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지만, 납득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은 결국 하나밖에는 없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진보한 외계 종족이 태양계를 우주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장벽이라는 설명이다.
문제는 ‘왜?‘였다.
- P34

 이것들의 변주에 해당하는 덜 드라마틱한 각양각색의 가설도 제기되었다. 〈버블>은 인류의 허약하고 원시적인 문화를 항성 간 교역의 가혹한 현실로부터 보호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는지도 모른다. 태양계는 은하계의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이다. - P35

마음의 병은 천년왕국의 신봉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버블열>이라는 것이 돌았다. 지구부피의 8조 배에 달하는 공간에 갇혔다는 생각이 야기하는 히스테리컬하며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폐소공포증적인 반응이 나타났던 것이다.  - P38

다수 사람들이 <버블>을 받아들임으로써 상황에 적응했고, 정상적인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버블>이 야기한 히스테리, 온갖무명 종교 집단의 모든 종파, 기괴한 집단 정신병의 온갖 형태가 또다시 부활할 것임을 확신이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 P54

컴퓨터 처리된 정보는 양자론적 진공이나 마찬가지로 덧없는 존재이며, 끊임없이 출현과 소멸을 거듭하는가상 진실과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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