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웠냐?" 진우의 어조에서 의한 기대감이 읽혔다. 부부싸움 무용담이라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는 다가오는 종업원을 향해 빈 소주병을 흔들어 보였다. "잘해라. 잘못하면 자다 간다." 진우는 말해놓고 혼자 킬킬거렸다. 묘하게 신경을 긁는 말이었다. 녀석은 작년에도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땐 술집이 아닌 결혼식장이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기에 오지랖 정도로만 들었다. 기분이 엿 같은 지금은 악질적인 농담으로 들렸다. 그는 입술만 움직여 상응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미친 새끼 뭐래? - P68
어느 유명 헬스 유튜버가 주장한 ‘미인론‘이 기억나는 순간이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미인이 있다고 했다. 인류가 보편적으로 지지하는 범용 미인, 꽂힌 자에게만 추앙받는 전용 미인. 그 기준을 적용하면 그녀는 후자에 부합했다. - P78
그녀는 깔깔 웃기 시작했다.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어버렸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처음 들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안겼다. 이번엔 허벅지 털을 넘어 그 밖의 것까지 세워 일으켰다. - P87
65년을 살아온 인간은 상수지 변수가 아니니까. - P97
어머니는 애초부터 지유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자체를못마땅해했다. 어머니로 말하면, 양쪽이 재혼일 경우 한쪽의 아이에게 헌신하려면 다른 한쪽은 아이가 없어야 하며, 당신 아들은 ‘다른 한쪽‘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믿는 양반이었다. 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지유 때문에 노아가 희생당하고 있는 셈이었다. - P111
"행복한 순간을 하나씩 더해가면, 그 인생은 결국 행복한 거 아닌가." "아니,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그녀는 베란다 유리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 먼 지평선을넘어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실제로 보이는 건 유리문에 반사된실내풍경뿐일 텐데,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거" - P113
민영은 입술 끝을 비쭉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카톡으로 ‘ㅎ‘라는 답을 받을 때만큼이나 기분이 오묘했다. 언짢기는 하나 언짢은티를 내면 이쪽이 옹졸해지는 유의 반응이었다. - P131
생기없는 눈빛과 그늘이 짙은 눈두덩과 얄팍하게 꺼진 볼, 꺼칠하게 자란 수염과 막 걸친 듯한 옷. 지하도에 앉아 있으면 500원쯤 던져주고갈 사람이 서넛은 되겠다 싶은 몰골이었다. 한때는 학교에서 가장빛나는 별이었는데. - P140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잠깐 잠수했을 것이다. 어쩌면 사람 혹은 세상에 염증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마냥 쉬고 싶었거나, 때가 되면 수면으로 떠오르겠지. - P142
유나의 러시아 유학도 이모의 지원으로 이뤄졌다. 공부도 끝내지 않고 돌연하게 돌아와버린 유학이었지만, 남자친구의 죽음 때문이라고 했다. 헝가리 유학생이었고, 차 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졌다가 일주일 후에 숨을 거뒀다고 했다. 동거 반년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 P144
가까스로 네,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인도양 어느 섬에서대답을 해도 그보다는 크게 들릴 것 같았다. - P149
내일은 바라는 방향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 간절히 원한다 하여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것도. 유나는 겨울이가고 봄이 또 가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 P154
이제 와 추측건대,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자신을 향한 유나의 감정이 증오라는 것을. 그것도 자신을 통째 삼켜버릴 만큼 깊고 어둠고 뜨겁다는 것을. - P159
그는 그녀를 여자가 아닌 다른 존재로 봤다. 가장 가까운 단어를 찾자면 ‘야채‘ 정도나 될까. 달콤하진 않지만 가까이에 있고, 반하지는 않았으나 안전하며, 즐거움보단 이로움을 주는 존재. 야밤에도 거리낌 없이 찾아갈 수 있고, 태연하게 재워달라 말할 수 있으며, 편안하게 자고 가도록 배려해주는 사람. - P175
제가 물었어요. 왜 이혼하려고 하는데? 오빠 대답은 간단했어요. 더 살다간 죽을 것 같아서. - P179
새언니가 그랬나 봐요.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두 번이나있었다는군요. 한 번은 자살, 두 번째는 교통사고. - P183
PS. 오래전 오빠한테 들은 말인데, 사돈어른도 차 사고로 돌아가셨다면서요? 만약 사돈어른이 새언니를 자른 게 사실이라면, 시기상사고는 그즈음에 일어났겠네요. 혹시 졸음운전이었나요? - P186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먹고 싶지 않았다. 아니, 먹을 수가 없었다. 고개 숙이고, 거절당하고, 하하 웃고, 도로 위를 끝없이 달리면서 마음에 꽃을 심는 아버지의 돈으로는 아무것도. - P189
"너, 집에 들어와 살면 안 되니?" 긴 눈물 바람 끝에 어머니가 물었다. "같이 쇼핑도 다니고, 외식도 하고, 영화도 보러 가고." 아이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매사를 눈물로 해결하며 살아온 사람다운 제의였다. 그녀는 1초도 망설이지않고 대답했다. "꿈깨쇼" - P194
두려웠다. 깊이 모를 늪으로 발을 디딘 기분이었다. 자아의 목소리는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끈질기게 자신을설득하는 목소리였다. 우연이야. 거기에서 뭘 읽으려 들지 마다른 목소리는 유나를 향해 묻고 있었다. 대체 아버지한테 무슨짓을 한 거냐.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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