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정부가 세워지며 좌익으로 분류돼 교육 대상이 된 사람들이 가입된 그 조직에 대해 나는 알고 있었다. 가족 중 한 사람이정치적인 강연에 청중으로 참석한 것도 가입 사유가 되었다. 정부에서 내려온 할당 인원을 채우느라 이장과 통장이 임의로 적어 올린 사람들, 쌀과 비료를 준다는 말에 자발적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들도 다수였다. 가족 단위로도 가입되어 여자들과 아이들과 노인들이 포함되었고, 1950년 여름 전쟁이 터지자 명단대로 예비검속되어 총살됐다. 전국에 암매장된 숫자를 이십만에서 삼십만 명까지 추정한다고 했다. - P273

그후로는 엄마가 모은 자료가 없어, 삼십사 년 동안.
인선의 말을 나는 입속으로 되풀이한다. 삼십사 년.
......군부가 물러나고 민간인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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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은 날마다 수십 차례 비행기들이 이착륙하는 활주로 아래서 흔들리며, 다른 한 사람은 이 외딴집에서 솜요 아래 실톱을 깔고 보낸육십 년에 대해서. - P213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 P220

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시국 때는 흉년에다가 젖먹이까지 딸려 있으니까. 내가 안 먹어 젖이 안 나오면 새끼가 죽을 형편이니 할 수 없이 닥치는 대로 먹었지요. 하지만 살 만해진 다음부더는 이날까지 한 점도 안 먹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 - P225

아버지를 위한 영화가 아닙니다. 역사에 대한 영화도 아니고, 영상 시도 아니에요. 놀란 듯한 진행자가 웃으며 매끄럽게 물었다. 그럼 무엇에관한 영화인가요? 그 질문에 그녀가 어떻게 답했는지는 기억나지않는다. 다만 그녀가 영화를 그만둔 이유를 짐작하려 할 때마다그날이 떠올랐다. 당혹과 호기심과 냉담함이 섞인 진행자의 태도와 객석의 어리둥절한 침묵, 진실만 말해야 하는 저주를 받은 듯천천히 말을 이어가던 인선의 얼굴이. - P236

밤마다 악몽이 내 생명을 도굴해간 걸 말이야. 살아 있는 누구도 더이상 곁에 남지 않은 걸 말이야.
아닌데, 하고 인선이 내 말을 끊고 들어온다.
아무도 남지 않은 게 아니야, 너한테 지금.
그녀의 어조가 단호해서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는데, 물기 어린눈이 돌연히 번쩍이며 내 눈을 꿰뚫는다.
......내가 있잖아. - P238

어디로?
그건 뭐 그 사람 맘이지. 산을 넘어가서 새 삶을 살았거나, 거꾸로 물속으로 뛰어들었거나……그 순간 이후 우리는 다시 서로에게 경어를 쓰지 않았다.
물속으로?
응, 잠수하는 거지.
왜?
건지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거 아니야. 그래서 돌아본 거 아니야? - P242

당숙네에서 내준 옷으로 갈아입힌 동생이 앓는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손가락이 들어갔대. 그 속으로 피가 홀러들어가는 게 좋았대.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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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이 깨지고 피가 흐를 때까지 계속한다. 허밍 소리가 별안간 그쳐 나는 고개를 든다. 건천에서 의식을 차렸을 때처럼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축축한 눈송이가떨어지고 있다. 이마에 인중에, 입술에이를 부딪히며 정신이 들어, 이곳이 건천도 마당도 아닌 인선의방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 톱이 필요하다고 꿈과 생시 사이에서생각한다. 이 모든 걸 물리치도록. 이 모든 게 나를 피해가도록.
잘 놀다 가세요.
인선의 어머니가 내 귀에 속삭인다. 내 두 손에 쥐여진 그의 손이 죽은 새처럼 작고 싸늘하다. - P171

부서질 듯 문과 창문들이 덜컹거린다. 바람이 아닌지 모른다.
정말 누가 온 건지도 모른다. 집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려고 찌르고 불태우려고, 과녁 옷을 입혀 나무에 묶으려고, 톱날 같은 소매를 휘두르는 저 검은 나무에 - P172

죽으러 왔구나, 열에 들떠 나는 생각한다.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
베어지고 구멍 뚫리려고, 목을 졸리고 불에 타려고 왔다.
불꽃을 뿜으며 무너져 앉을 이 집으로.
조각난 거인의 몸처럼 겹겹이 포개져 누운 나무들 곁으로 - P172

새가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감싸고 여민 손수건을 비집고, 친친 감아 매듭지은 실을 풀고, 귀를 맞춰 닫은 알루미늄 통을 열고, 수건으로 감싼 뒤 십자로 묶었던 실을 끊는 것은 얼어붙은 봉분과 그 위로 쌓인 눈을 뚫고 날아올라, 잠긴 문 안으로 들어와 철망 속이 횃대에 앉는 것은.
삐이이, 아마가 다시 울었다. 여전히 고개를 외튼 채 젖은 약콩같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 P180

가로등도 이웃도 없는 집에서 말이야. 눈이 내리면 고립되고 전기와 물이 끊기는 집 말이야. 밤새 팔을 휘두르며 전진해오는 나무가 있는 곳, 내 하나만 건너면 몰살되고 불탄 마을이 있는 곳 말이야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앞서 내가 했던 말을 조용히반박하듯 인선이 말했다. - P195

그녀는 익숙한 동작으로 다시 목장갑을 끼고 난로의 달궈진 문을 열었다. 부지깽이로 나무토막들을 뒤집자 불티가 튀었다. 불꽃의 열기가 내 얼굴까지 끼쳐왔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야.
인선의 목소리가 그 열기 사이로 번졌다.
정말 헤어진 건 아니야. 아직은.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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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깨에 앉은 아마의 흰 목덜미를 무심코 쓸어보았을 때, 새는 더 깊게 목을 수그리곤 기다리듯 가만히 있었다.
더 만져달라는 거야.
인선의 말대로 나는 그 따뜻한 목덜미를 다시 쓸어내렸다. 마치인사하듯 새가 더 깊이 목을 수그리자 인선은 웃었다.
더, 계속 쓰다듬어달라는 거야. - P141

먹을 칠하는 일은 깊은 잠을 입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오히려 악몽을 견디는 사람들처럼 느껴지는 걸까? 칠하지 않은 생나무들은 표정도 진동도 없는 정적에 잠겨 있는데, 이 검은 나무들만이 전율을 누르고 있는 것 같다. - P145

속솜허라
동굴에서 아버지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에요.
양치잎 같은 그림자가 벽 위를 미끄러지며 소리 없이 솟아올랐다.
숨을 죽이라는 뜻이에요.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 소리도내지 말라는 거예요.
손깍지 낀 그녀의 두 손이 풀렸다가 다시 단단히 매듭지어졌다. - P159

어둠이요.
어둠이 거의 기억의 전부예요.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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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이유는 새로운 경험보다는 반복되는 경험이 많아지기 때문이라는 이론이 있다. 꼬마 때는아이스크림을 먹어도 친구랑 모래놀이를 해도 새록새록 새로운 경험이라 하루가 풍요롭지만, 어른은 대부분 반복되는 일상을 살기 때문에 뇌가 일일이 다기억하지 않으니 하루하루가 단조로울 수밖에 없다는것이다. 내 일상도 그렇게 점점 재미가 없어지고 있었다. 곧 마흔 살, 청춘과는 이미 멀어진 나이이고 어차피 죽으면 썩어서 사라질 몸인데 난 참 쓸데없이 주저하는 일이 많구나, 회한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발레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나이 마흔을넘어서도 심리적 에너지 수준이 떨어지지 않으려면어린 시절 꼭 하고 싶었던 일에 도전해보는 게 좋다는조언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내게는 그게 발레였다. - P11

‘에샤페 (échappé)‘ 동작을 하는데, 유독 안다리 살이 눈에 거슬렸다. 땅에 떨어질 때마다, 무겁게 흔들리는 주방용 짧은 커튼처럼 지방이 출렁거렸다. 진짜 안 되겠다 싶었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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