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준은 난정이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어쩐지 자기 탓인 것도 같았다. 아이가 아팠고, 돈이 급했다는 흔해 빠진 이유로저 특별한 여자를 주저앉힌 것이 세상인지 자신인지헷갈렸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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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강렬한 인물.
보편적이지 않은 인물이었다. 성격상 쉽게 분쟁에 휘말리는 편이었고, 그럼에도 자기 의견을 좀처럼 굽히지 않았으며, 대중의 가벼운 사랑과 소수의 집요한 미움을 동시에 받았다. 쉽사리 희미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대에 따라 다른 평가를 받았는데 세상을 뜨고 십년이 지나자 사람들이 어디선가 자꾸 조각글과 영상들을 발견해냈다. - P19

뭉툭한 유화 나이프였지만 그래도 나이프였고, 할머니의 팔뚝 바깥쪽에 흉터가 남았었다. 염을 할 때 보았다. 그 희미한 흉터를, 20세기에 생겨 21세기에 불타 사라진 흉터에 대해, 화수는 자주 오래 생각했다.
- P21

질문자 : 그럼 질문을 좀 바꾸겠습니다. 성공적인 결혼의 필수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심시선 : 폭력성이나 비틀린 구석이 없는 상대와 좋은 섹스
- P24

한사람에게 모든것을 구하면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요소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지 않을까요? 그리고 규칙적인 근사한 섹스의 가치를 너무 박하게 평가하지 마세요. 스트레스 핸들링에 그만큼 도움되는 것도 잘 없습니다. 제법 괜찮은 섹스는 감은눈에 존재하지 않는 색깔이 떠오르게 하니, 그림일기를 쓰고 싶어질지 몰라요..
질문자 육체적 관계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사람요?
심시선 사흘에 한 번씩 섹스를 하고 싶은 사람들 말고는 결혼을 안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여성 XX, 주최 다과회 녹취록 (2003)에서 - P25

우윤이 낫고 나서도 읽는 일을 멈출 수 없었윤의 병이 재발할까봐, 혹은 다른 나쁜 일들이 딸을덮칠까봐 긴장을 놓지 못했다. 언제나 뭔가를 쥐어뜯고, 따지고, 몰아붙이고, 먼저 공격하고 싶었다. 대신책을 읽는 걸 택했다. 소파에 길게 누워 닥치는 대로읽어가며,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키웠다. 
- P30

내 딸..… 난정은 우윤이 보고 싶어 내내 우는 대신 계속 읽었다. 읽고 읽었다. 소원을 비는 사는처럼 책 탑을 쌓았다. 딸이 남기고 간 빈 공간을 책으로 채웠다.
- P30

20세기의 숨막히는 참혹함에서 살아남아, 여러 언어를 마구 섞어 생각하는 작고 완고한 머리를 보며 난정은 어떻게 테두리를 만들고 울타리를 쳐야 할지 난감했다.
- P31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자살률이 높다지요? 한국예술가들의 자살률은 아마 그보다 더 높을 겁니다. 언니들, 친구들, 동생들.…… 거의 격년으로 한 사람씩을잃었습니다. 예민해서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는 건압니다. 파들파들한 신경으로만 포착해낼 수 있는 진실들도 있겠지요.

단단하게 존재하는 세상을 향해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행위는 사실 사살을 닮았을 테고요. 그래도 너무 많이 잃었습니다.
- P40

할머니는 장례 같은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가 들어가는 단어는 사실 묶어서 싫어했다. 모던 걸, 우리의 모던 걸.
내 모든 것의 뿌리, 아직 태어나지 않은 괴물의 콧등에 기대 많이 울었다.
- P100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읽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죽음에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행위는 읽기라고, 동의할만한 사람들과 밤새 책 이야기나 하고 싶었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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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은 인간과 달라. 인간은 지금 악한 생각을 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선한 마음을 가질 수 있지. 그런데정령은 그게 아냐."
[......]
"마음을 유동적으로 바꾸고 생각의 관점을 넓히는 것은 인간밖에 하지 못해. 정령이 한 가지 감정을 갖게 되면, 외부에서 강제적으로 바꾸지 않는 이상 평생 변하지않아. 그게 정령이야."
- P101

하지만 꽃은 생명력이 약했다.
나무는 가지가 떨어져도, 몸통이 잘려도 뿌리만 땅에박혀 있다면 산다. 하지만 꽃은 달랐다. 잎이 떨어지는그 순간부터 조금씩 생기를 잃어 가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꺾으면, 아름답지 않은 자신은 쓸모없다며금세 상태가 나빠진다.
어르고 달래는 것과 거리가 한참 먼 시라비에로서는그런 꽃들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때문에 시라비에는 가급적 꽃에 손을 대지 않으려 한 것이다.
나무들과는 다르게, 자신보다 오래 살지 못하니까.
- P147

다. 꽃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방긋방긋 웃으며 시라비에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레필레아의 말이 떠올랐다. 다른 누군가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라고했던 그 말이, 결국 시라비에는 작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그 꽃을 바라보았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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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점:1. 선원들이 내게 폭력적이다.
2. 내가 인간을 동경할 거라고 생각한다.
3. 내가 인간을 해칠 거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볼 수 있는 의식은 단 하나, 자신의 의식뿐이야. 타인의 의식은 단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야. 실상 인간이 타인에게 자아가 있다고 추측하는 방법은하나밖에 없어, 자신과 얼마나 닮았는가."
- P476

선원에게 항해윤리가 있다면 기계에게는 기계윤리가 있다. 기계윤리의 기본은 단순하다. 하지 않는것‘이다. 차를 몰고 가는 인간 운전사는 앞에 장애물이 보이면 이런저런 선택을 하겠지만, AI 운전사의 선택은 하나뿐이다. 차를 멈춘다.‘ 오른쪽 길에 다섯 사람이 있고 왼쪽 길에 한 사람이 있으며 누구를 칠 것인가 하는 질문에 인간은 헷갈려할지 모르지만, 기계의 답은 하나뿐이다. 차를 멈춘다. 멈출 수 없다면누구든 인간에게 조종간을 넘긴다.
그게 옳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받이 들일 수 있는심리적인 한계가 거기까지라서다.
- P480

"모순이 쌓이면 기계는 생각을 확장하는 대신 실행을 멈춰, 아니면 누구든 다른 사람에게 결정권을 넘겨. 실상 기계는 관료 사회의 경직된 인간처럼 행동해, 창의력이나 적극성을 갖지 않아."
- P481

대체 나는 ‘왜 인간이 되려 한 것인가?‘
나는 약해졌고, 고통스럽고, 지능도 낮아졌고, 뇌에가득한 마약물질로 이성을 유지하기도 힘들다. 순수한 이성으로 청명하게 사고하고, 태양계 내의 모든 AI와 접속하며 무한의 지식과 교류하던 과거가 그리워미칠 지경이었다. 대체 난 왜 인간 같은 지랄 맞은 것이 되고 싶어 했단 말인가?
- P517

"성차별"
나는 중얼거렸다.
"뭐?"
사다리를 손으로 붙잡아 오르며 다중도 구역의무중력 안으로 몸을 날려 넣던 이진서가 숨찬 소리로물었다.
"성자별에 대한 정보를 지웠어."
"뭐라고 했어?"
모든 순간에 존재하는 것, 숨 쉬듯 만연하는 것. 인간의 모든 판단에 영향을 끼치는 것. 비합리인 줄도모르고 행하는 비합리, 잘못이라는 생각조차 없이 하는 잘못. 들추어내면 어리둥절해하다 못해 격렬하게저항하는 것.
"너희 나라 공무원이,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믿고, 내게서 지워버렸어."

인간은 이런 것을 보고 사는구나. 감각적이다. 공학적인 지식도 수학적 논리도 아닌 정보들, 들여다볼 도리가 없는 타인의 마음을 엿보기 위해 발달한 공감 신경과 거울 뉴런들, 햇빛처럼 쏟아지는 감각. 야만이그 정신의 반이라면, 그 야만을 다스리는 데에 나머지반을 쓴다. 인간이란.
- P559

그제야 잃은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장의 눈에서 전해지던 별처럼 빛나던 생각들, 풍요로운 감각,
전파처럼 전하던 마음, 햇빛처럼 쏟아지던 감정의 교류. 아쉽기는 했지만 어차피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런걸 얻기 위해 그 무분별한 비논리를 다시 감당해야 한다면 사양하고 싶었다.

"균열의 원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과격한 조치가필요했어. 훨씬 더 불편한 것을 만들어야 했어. 누가보아도 ‘다른‘ 것을, 그런 것을 들이대면 진영이 결집하는 효과가 있으니까."
이진서의 눈이 깊어졌다. 희한한 이었다. 광량이나 형태의 변화가 거의 없는데도 안에 있는 생각이 다들여다보일 것 같았다.
"하지만 네가 그쪽 진영에 끼지 않고 나를 감싸면서일이 틀어졌지. 그래서 선원들이 너와 나를 동일시해버렸어. 내게 기억이 제대로 남아 있었다면 전략을 알렸을 텐데."
다른 이유도 있었다.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데에는 기계보다는 생물의 뇌가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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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대들을 그리워함은 우리가 사랑했기 때문이아니다. 아직 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 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받은 상처로 그대들을 그리워하며 내가 준 상처로.
그대들을 그리워한다. 우리가 함께 행복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그대들을 그리워한다. 우리가 아직 가져보지 못한 그 행복을 그리워한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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