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강렬한 인물. 보편적이지 않은 인물이었다. 성격상 쉽게 분쟁에 휘말리는 편이었고, 그럼에도 자기 의견을 좀처럼 굽히지 않았으며, 대중의 가벼운 사랑과 소수의 집요한 미움을 동시에 받았다. 쉽사리 희미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대에 따라 다른 평가를 받았는데 세상을 뜨고 십년이 지나자 사람들이 어디선가 자꾸 조각글과 영상들을 발견해냈다. - P19
뭉툭한 유화 나이프였지만 그래도 나이프였고, 할머니의 팔뚝 바깥쪽에 흉터가 남았었다. 염을 할 때 보았다. 그 희미한 흉터를, 20세기에 생겨 21세기에 불타 사라진 흉터에 대해, 화수는 자주 오래 생각했다. - P21
질문자 : 그럼 질문을 좀 바꾸겠습니다. 성공적인 결혼의 필수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심시선 : 폭력성이나 비틀린 구석이 없는 상대와 좋은 섹스 - P24
한사람에게 모든것을 구하면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요소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지 않을까요? 그리고 규칙적인 근사한 섹스의 가치를 너무 박하게 평가하지 마세요. 스트레스 핸들링에 그만큼 도움되는 것도 잘 없습니다. 제법 괜찮은 섹스는 감은눈에 존재하지 않는 색깔이 떠오르게 하니, 그림일기를 쓰고 싶어질지 몰라요.. 질문자 육체적 관계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사람요? 심시선 사흘에 한 번씩 섹스를 하고 싶은 사람들 말고는 결혼을 안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여성 XX, 주최 다과회 녹취록 (2003)에서 - P25
우윤이 낫고 나서도 읽는 일을 멈출 수 없었윤의 병이 재발할까봐, 혹은 다른 나쁜 일들이 딸을덮칠까봐 긴장을 놓지 못했다. 언제나 뭔가를 쥐어뜯고, 따지고, 몰아붙이고, 먼저 공격하고 싶었다. 대신책을 읽는 걸 택했다. 소파에 길게 누워 닥치는 대로읽어가며,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키웠다. - P30
내 딸..… 난정은 우윤이 보고 싶어 내내 우는 대신 계속 읽었다. 읽고 읽었다. 소원을 비는 사는처럼 책 탑을 쌓았다. 딸이 남기고 간 빈 공간을 책으로 채웠다. - P30
20세기의 숨막히는 참혹함에서 살아남아, 여러 언어를 마구 섞어 생각하는 작고 완고한 머리를 보며 난정은 어떻게 테두리를 만들고 울타리를 쳐야 할지 난감했다. - P31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자살률이 높다지요? 한국예술가들의 자살률은 아마 그보다 더 높을 겁니다. 언니들, 친구들, 동생들.…… 거의 격년으로 한 사람씩을잃었습니다. 예민해서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는 건압니다. 파들파들한 신경으로만 포착해낼 수 있는 진실들도 있겠지요.
단단하게 존재하는 세상을 향해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행위는 사실 사살을 닮았을 테고요. 그래도 너무 많이 잃었습니다. - P40
할머니는 장례 같은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가 들어가는 단어는 사실 묶어서 싫어했다. 모던 걸, 우리의 모던 걸. 내 모든 것의 뿌리, 아직 태어나지 않은 괴물의 콧등에 기대 많이 울었다. - P100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읽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죽음에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행위는 읽기라고, 동의할만한 사람들과 밤새 책 이야기나 하고 싶었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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