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7년 1월, 독일왕이자 장차황제가 될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북부의 험준한 산악 지역인 카노사Canossa의 성에 찾아왔다. 이곳에는 그에게 파문 선고를 내린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머물고 있었다. 엄동설한 맹추위에 말총으로 만든 참회복을 입고 눈밭에 사흘동안 맨발로 서서 용서를 빈 결과 교황은 파문을 거두어들였다. 이것이 ‘카노사의 굴욕‘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 P109
교황에게 ‘당신이나 사퇴하라‘는 식의 모욕적인 답신을 보낼 때는 의기양양했겠으나, 그 직후부터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갔다. 교황은 서신에 서명한 주교들의 권한을 정지시켰고, 하인리히를 파문하면서 모든 기독교 신자들에게 그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독일 귀족들로서는 그들을 억압하던 국왕이 파문당하는 게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국왕에 대한 저항이 종교적으로 완전히 합리화되자 일부 귀족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일종의 청문회를열어 하인리히의 모든 권한을 문제 삼아야 한다고 교황에게 요청했다. 교황은 이 사태를 결정짓기 위해 독일로 향했다. - P112
카노사 사건 당시 독일로 여행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안전을 보장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마틸다의 공적이다. 하인리히 4세의 지지 세력이 교황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마틸다는 군사를 동원하여 교황을 보호하고카노사의 성으로 안전하게 피신시켰다. 하인리히가 바깥에서 참회의 퍼포먼스를 하는 동안 마틸다는 성안에서 교황에게 사태 해결을 위한 조언을 해주었다. 이에 위기에 맞서 ‘오직 베드로의 딸 마틸다만이 저항했노라sola resistitMathildis, filia Pétri"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공적을 인정하여 교황청은 17세기에 마틸다의 시신을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로 이장했다. 여성으로는 유일하다. 천재 조각가 베르니니가 마틸다의 조각상을 세웠고,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교황청을 지켜낸 마틸다 여백작은 고대 아마존 전사에 필적한다‘는 비명을 썼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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