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는 그 신사 양반에 대한 평판이 별로 좋지 않은 편이랍니다. 선생님. 온갖 소문이 다 돌고 있거든요. 게다가 런던에서 내려온 친구들과 함께 과상한 일들을 벌이곤 했죠 한밤중에 ‘마녀의 들판에 올라가서 말이에요"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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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7년 1월, 독일왕이자 장차황제가 될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북부의 험준한 산악 지역인 카노사Canossa의 성에 찾아왔다. 이곳에는 그에게 파문 선고를 내린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머물고 있었다. 엄동설한 맹추위에 말총으로 만든 참회복을 입고 눈밭에 사흘동안 맨발로 서서 용서를 빈 결과 교황은 파문을 거두어들였다. 이것이 ‘카노사의 굴욕‘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 P109

교황에게 ‘당신이나 사퇴하라‘는 식의 모욕적인 답신을 보낼 때는 의기양양했겠으나, 그 직후부터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갔다. 교황은 서신에 서명한 주교들의 권한을 정지시켰고, 하인리히를 파문하면서 모든 기독교 신자들에게 그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독일 귀족들로서는 그들을 억압하던 국왕이 파문당하는 게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국왕에 대한 저항이 종교적으로 완전히 합리화되자 일부 귀족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일종의 청문회를열어 하인리히의 모든 권한을 문제 삼아야 한다고 교황에게 요청했다. 교황은 이 사태를 결정짓기 위해 독일로 향했다. - P112

카노사 사건 당시 독일로 여행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안전을 보장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마틸다의 공적이다. 하인리히 4세의 지지 세력이 교황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마틸다는 군사를 동원하여 교황을 보호하고카노사의 성으로 안전하게 피신시켰다. 하인리히가 바깥에서 참회의 퍼포먼스를 하는 동안 마틸다는 성안에서 교황에게 사태 해결을 위한 조언을 해주었다. 이에 위기에 맞서 ‘오직 베드로의 딸 마틸다만이 저항했노라sola resistitMathildis, filia Pétri"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공적을 인정하여 교황청은 17세기에 마틸다의 시신을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로 이장했다. 여성으로는 유일하다. 천재 조각가 베르니니가 마틸다의 조각상을 세웠고,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교황청을 지켜낸 마틸다 여백작은 고대 아마존 전사에 필적한다‘는 비명을 썼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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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남의 눈을 용케 피해 범행을 저지를 수 있는지도정말 놀라운 일이지요"
그들은 문간에 있었다. 토머스 박사는 그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사실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랍니다." 토머스 박사가 말했다.
"그건 아주 쉬운 일이지요"
"뭐라고요?"
"남의 눈을 피해서 범행을 저지르는 것 말입니다."
그는 다시 그 예의 매력적이고 천진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심만 한다면 말이지요. 다만 조심하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영리한 사람이라면 사소한 실수도 범하지 않을 정도로 극히 조심스럽게 처신할 수 있는거죠 그걸로 족한 겁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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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이라든가 지방의 미신 연구, 뭐 그런 것들 말일세. 위치우드 언더 애쉬는 그런 방면에서 상당히 이름이 알려졌거든 악마의 연회가 열렸던 마지막장소 중 하나로 지난 세기까지만 해도 미신의 일종으로 마녀들이 화형을 당했다네 자네는 작가가 되는 거야 알겠나? "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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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역사는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여 투쟁하며 가톨릭을 수호하는 신성한 왕정의 성립 과정으로정리할 수 있으리라. 그렇지만 역사의 실상은 그처럼 단순하지 않다.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이 단일한 전선에서 부딪치는 ‘문명의 충돌‘보다는양측 모두 다수의 정치 단위들이 이해관계를 좇아 복잡하게 얽혀서 경쟁하는 판에 가까웠다. - P93

민족주의 역사에서는 엘시드가 이슬람 세력들과 맹렬한전투를 벌이며 영웅적 성과를 거둔 것으로 그려졌지만, 실상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카스티야의 귀족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Rodrigo Diaz de Vivar지만, 아랍어 알사이드Al-Sayyid(영주)에서 유래한 엘시드로 더 잘 알려졌다. 그의 진면목은 이슬람 국가든 기독교 국가든 비용을 잘 지불하면 누구에게나 군사 서비스를 제공하는 용병에 가까웠다.  - P94

혼란기에는 내부 결속을 다지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영웅 만들기가 진행되곤 한다. - P96

이처럼 국운이 쇠락하는 상황에서 국가의 명예를 되살려줄 영웅이 필요했던 것이다. 엘시드는 더 나아가서 20세기 전반의 에스파냐 내전 상황에서 프랑코 독재정권에 이용되었다. 1939년 내전에서 승리를 굳힌 프랑코 장군은 자신을 제2의 엘시드로 묘사했고, 1955년 그의 첫 번째 정치적 수도였던 부르고스에 거대한 엘시드 기마상을 건립했다. 영웅은 결코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어서,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새롭게 주조되곤 한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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