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주는 어떤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는 이것이 여성혐오냐 아니냐의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다. 범인이 ‘우리나라 여자들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 측에서는 여성혐오 범죄는 아니라고 발표했다. 여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무시했느냐고 그를 향해 기자들이 외쳤지만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수연의 어머니는 꼼꼼한 딸이 사망보험금 수혜자를 자신으로 해놓은 것을 알고 더욱 통곡했다.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았고, 그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은 드문 인간의 죽음이었다.  - P206

물론 숙이는 이런 상황에 모든 세계와모든 시대의 여자들이 하는 전형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남자는 나한테 관심도 없어‘. 그럴 리가. 숙이는 바우의 세계의 발단이자 전개이며 결말이었다. 그는 숙이를 볼 때마다 매번 새로 반했다.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숙이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여인중에 가장 어여쁜 자야,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그녀가 없을 때나 다른 여자들이 그에게 슬며시 추파를 던지면 생각했다.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숙이가 그에게 등불처럼 웃으면서 걸어올 때면 마음속으로 경건히 여겼다. - P228

하지만 그는 십 대치고는 보기 드물게 자기 주제를잘 아는 소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캠프파이어처럼 활활 불태우는 사랑보다 숯불처럼 조용히 타고 있는 사랑을 택했으며 폭풍처럼 몰아치기보다 연못처럼 조용히고여 있는 편을 택했고 정복하고 납치하고 제압하기보다 입을 꾹 다물고 견디는 편을 택했다.  - P229

"저도 태어나지 않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자연유산을시켜주세요."요?
"저 역시 자연유산을 택하겠습니다. 구천을 떠돌면서영원히 여러 가지를 구경하는 게 훨씬 낫겠어요."
"저도 자연유산을 신청합니다. 아, 그런데 혹시 제어머니에게 결혼 같은 것을 하지 말라고 전할 방법은 없을까요?"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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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화는 그 살 속에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답고 올바른 진짜 자신이 유배되어 있다
고 느꼈지만, 그 감옥에서 좀처럼 탈출할 수 없었다. 커다란 마트료시카에서 끝내 작고 예쁜 진짜 인형에 숨을불어넣고 소원을 외듯 본래 자신을 꺼내야 하는데 생식도 밥 세 숟가락에 묽은 된장국만 먹는 식사도, 선식도포도즙이나 ‘마녀수프 다이어트‘라고 불리는 양배추 수프도 그녀를 거기에서 꺼내주지 않았다. 살로 된 감옥에서 탈출하려는 시도가 좌절될수록 그녀는 혀가 아려오는 비빔냉면이나 족발, 과자,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새로 만나게 된 맥주의 품에 안온하게 안겼다. - P113

백 오십구 센티미터에 칠십육 킬로그램의 몸은 이태리 타월로 살갗이 떨어져 나갈 만큼 깨끗이 닦어도 단정한 용모로 인정받지 못했다. - P114

그는 손을 내밀어 한 손에 쥐기에는 어림도 없는 그 부드럽고 풍성한 젖가슴을 움켜쥐었고, 이윽고 그녀의 몸에 들어섰다. 긴 시간 동안 뭔가를 짜 맞추는 일로 밥을 먹고 살아온 김병권은 젖가슴을 움켜쥔 손바닥에서, 그녀의 몸 안에 들어선 그의 몸에서 그가 아주 잘 아는 기분, 나사와 부품이 완벽하게 들어맞았을 때의 감각을 충만하게 느꼈다. - P124

"서방? 서방 좋지. 근데 생각해봐, 우리가 애를 낳아, 걔는 뭘 먹여서 키우는데, 유치원은 보낼 수 있을것 같아? 딸이면 어떡해? 나 닮은 딸이면 어쩌냐고. 어릴 때부터 코끼리 소리 들으면서 사는 뚱땡이는 나로 족해. 나 그 꼴 볼 수 없어. 내가 한 일 중에 그나마 잘한 일이 바로 수술해버린거야! 가난뱅이는 우리로 족하지 않아?"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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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떠올려보니 그가 유부남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진은 대학 기간 내내 자신의 학비를 대느라 비는 시간을 온통 아르바이트로 보낸 덕분에 남자 친구는커녕 가까운 친구도 몇 되지 않았다. 그중 가장 친한 N은 늘 영진에게 남자 면역이 없다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 P72

당연히 그는 영진의 첫 남자였다. 처음 와보는 고급스러운 호텔 방에서 바짝 긴장한 영진의 몸은 남자의손길이 분주히 오갈 때마다 나른하게 풀렸다. 첫 경험을 치른 후, 영진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지금까지 간직해온 동정을 주었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흘렸다. - P76

돌이켜보면 그의 너그러운 태도는 영진의 모든 가난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 P79

영진은 수줍게 웃었다.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신 다음 영진은 용기를 마저 짜냈다.
"나랑 결혼하고 싶단 생각은 안 하세요?"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영진은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 손으로 쇄골을 꼭 눌렀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영진이 생각했던 경우의 수 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나 유부인 거, 정말 몰랐어? 대충 눈치 챈 거 아니었어? 자기가 워낙 쿨하길래, 나는 아는 줄만 알았는데……. 나 페이스북에 기혼이라고 되어 있잖아. 그거못 봤어?" - P85

 유부남한테 홀랑 속은 처녀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뻔하고 한심한 사연에 더 눈물이 났다. 그와 같이 보내던 밤 시간에 할 일도 없고 집에가서 혼자 있기도 싫어 영진은 사무실에 붙박이로 앉아있었다. 주말에 성실하게 해오던 스터디도 도저히 나갈기운이 없어 무책임하게 팽개쳤다. 영진답지 않다며 팀원들이 전화를 걸어왔지만 그냥 끊어버렸다. - P89

사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래도 정신없이 뛰다보면 너무 예뻐 우리 예쁜이 하고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가 줄이 바닥을 치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생각이 날 때면 번번이 발이 줄에 걸렸다.  - P96

쓸데없는 펀치는 전혀 맞지 않는 게 아웃파이터, 한번은 맞아야 했던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맞지 않고서는 권투란 스포츠는 성립하지 않으니까. 영진은 혼자원투, 하고 중얼거리며 허리를 틀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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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은 씨는 자기 말투가 좀 전 수화기를 통해 카랑카랑하게 들려온 예비 시어머니와 똑같이 울리고 있다는 걸 얼핏 느꼈지만 도무지 그만둘 수가 없었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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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다단계라고불리는 것이며, 자기처럼 별달리 아는 것 없이 어눌한사람들이 거기에 가장 잘 얻어걸리는 피해자라는 것을알게 된 것은 이미, 꼭 벌 수 있다고 장담하며 카드와급전을 끌어다 쓴 아빠와 엄마와 동생의 휴대폰 메모리를 받지마1, 받지마2. 받지마3으로 바꾸어 저장하게 된다음이었다. - P15

너무 짜게 끓여진 그 라면을 정아가 허겁지겁 먹는동안 건호는 자기 이야기를 했다. 이름이 건호라는 것.
정아보다 두 살 많다는 것, 가족들은 모두 흩어져 살며그다지 서로 의지가 되지 않는다는 것, 공고를 졸업했으며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성실히 돈을 모아 자신의 오토바이 가게를 갖고 싶다는 것. 한때 방황했던적도 있지만 제대 후에 남자라면 자신과 가족을 책임질줄 알아야 한다고 깨달았다는 것. 그리고 정아가 라면을 다 먹고 나자, 건호는 정아와 잤다.
- P18

저번은 물론이번 달만 해도 콘돔을 쓰지 않고 그냥 한 적이 두세번은 됐다. 날짜가 아니었기 때문에 건호가 파고드는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건호가 아닌 다른 사람하고 잔 날, 그날은 분명히 배란기였다. 어쩌면 이 아이는, 캐러멜프라푸치노의 아이인지도 몰랐다. 만일 정말그렇다면 아이를 낳을 때 양수 대신 캐러멜시럽이 쏟아지겠지. - P20

이틀 후 정아는 한 달에 두 차례 있는 월차를 썼고캐러멜모카프라푸치노의 태아는 적출되었다.  - P38

그들에게 정정은 씨의 희생은 이제 당연하고도 갑갑한 것이 되었고 내 아들이 잘났으니 당연히 받아야 할것이라는 묘한 권리의식으로 둔갑했다. 아이고 우리정은이 고맙기도 하지. 에서 그 계집애한테 누가 우리아들 챙겨달라고 애걸복걸을 하길 했나? 제가 잘난 우리 아들을 워낙 좋아해서 그런 것을 뭘 어쩐담. 하는 식으로 빠르게 태세가 전환되었다.  - P45

정정은 씨의 아버지는 분통이 터져 사법연수원까지 옛 사윗감을 찾아갔지만 ‘자식들 일은 자식들이 하게 놓아두시라, 체통 없이 이게 뭐하시는 거냐‘는 청년의 당당한 위세에 힘없이 집으로돌아왔다. 벌써부터 그쪽 부모는 연수원에 있는 아들을
‘김 판사‘ ‘영감님‘ 이라고 불렀다. 지금까지 정정은 씨가 투자한 돈만 해도 얼만데, 저쪽 집안에서는 우리 아들한테 그쪽 딸내미가 함빡 빠져서 누가 해달라 한 것도 아닌데 저가 해다 바친 걸 가지고 무슨 소리냐는 태도를 끝까지 견지했다. - P46

기가 탁 막힌 정정은 씨의 어머니는 하다못해 너는애라도 하나 못 만들어놓았느냐, 여우랑은 살아도 곰하고는 못 사는 법인데 재주 없는 이 미련퉁이야, 하고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정정은 씨는 몸가짐을 늘 조심하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다가 이제는 몰래 아이라도만들어놓지 않았다고 미련퉁이 소리를 듣는다.  - P47

원래도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라 스물다섯 넘으면 쓸데가 없다는 둥하는 한심한 소리를 흔히들 입에 올리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가볍게 정정은 씨를 버린 혼처보다 나은 자리를찾고 찾다가 스물아홉이 된 정정은 씨는 매일이 초조했다.  - P49

 여교사, 하면 남자들의 환상에 부합하는 면이 있었고 예비 시어머니들에게는 남편보다 일찍 퇴근하니살림할 시간도 많고 이른 퇴근 시간과 긴 방학 덕택에아이를 낳아 기를 시간도 충분하다 싶어 꽤 괜찮은 며느릿감이었다.  - P50

그가 미운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들이 정정은씨가 그토록 정성을 바쳤던 상대에게 바라던 태도와 꼭같아 유리 조각으로 마음을 저미는 듯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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