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들의 밑바닥을 직시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십여년 동안 자신이 해온 모든 작업이 조용히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것은 더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알았던, 혹은 안다고 믿었던 어떤 사람의 것이었다.

물컹물컹한 환멸을 씹으며 그는 선 채로 자위를 했다. 샤워기 아래로 뛰어들어 정액을 씻어내며 그는 웃음도 울음도 아닌 신음을 냈다. 물이 너무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폐쇄병동에 입원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는 것을, 병원에서도 수시로 옷을 벗고 햇볕을 쬐려 해 퇴원이 늦춰졌다는 사실을 상기해냈다.

지나치게 담담해, 대체 얼마나 지독한 것들이 삭혀지거나 앙금으로 가라앉고 난 뒤의 표면인가, 하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하는 시선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붓이 스칠 때마다 간지러운 듯 미세히 떨리는 그녀의 육체를 느끼며 그는 전율했다. 그것은 단순한 성욕이 아니라, 무언가 근원을 건드리는, 계속해서 수십만 볼트의 전류에 감전되는 듯한 감동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따뜻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추운 병아리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 자세는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보다,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할 만큼 단단한 고독을 음영처럼 드러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고요히 받아들이고 있는 그녀가 어떤 성스러운 것, 사람이라고도, 그렇다고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의 낯선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아내의 선하고 약한 면임을,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임을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신이 자기중심적이고 무책임한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아내의 인내와 선의가 숨막힌다고, 그래서 더더욱 자신이 나쁜 쪽이 되어가는 거라고 강변하고 싶었다.

"안돼 보여. 온몸에 꽃을 그려놓은 형 모습이…… 불쌍하단 생각이 들어. 한번도 형한테서 그런 느낌 받은 적 없었는데."

P는 그의 대답을 듣기 전에 그의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수백번의 입맞춤의 기억이 그의 입술을 덮었다. 그는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그것이 추억 때문인지, 우정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 곧 그가 넘으려는 경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잘 알 수 없었다.

J의 몸과 그녀의 몸이 그랬듯이 지금 두 사람의 몸은 겹쳐진 꽃들 같을까. 꽃과 짐승과 인간의 뒤섞인 한몸 같을까.

그는 전율했다. 가장 추악하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의 끔찍한 결합이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그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물들이고 배와 허벅지까지 적시는 끈끈한 풀물의 푸른빛을 보았다.

그는 그녀의 연둣빛 몽고반점을 보았고, 거기 수액처럼 말라붙은 그의 타액과 정액의 흔적을 보았다. 갑자기 자신이 모든 것을 겪어버렸다고, 늙어버렸다고, 지금 죽는다 해도 두렵지 않을 것 같다고 느꼈다.

그녀는 베란다 난간 너머로 번쩍이는 황금빛 젖가슴을 내밀고, 주황빛 꽃잎이 분분히 박힌 가랑이를 활짝 벌렸다. 흡사 햇빛이나 바람과 교접하려는 것 같았다. 가까워진 앰뷸런스의 사이렌, 터져나오는 비명과 탄성, 아이들의 고함, 골목 앞으로 모여드는 웅성거리는 소리들을 그는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못박혀 서서,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인 듯, 활활 타오르는 꽃 같은 그녀의 육체, 밤사이 그가 찍은 어떤 장면보다 강렬한 이미지로 번쩍이는 육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그애가 상기시키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사실은, 그애를 은밀히 미워했다는 것을.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을.

나, 몸에 물을 맞아야 하는데. 언니, 나 이런 음식 필요없어. 물이 필요한데.

언니 말이 맞아…… 이제 곧,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영혜는 큭큭, 웃음을 터뜨리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금방이야. 조금만 기다려, 언니.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그 질문에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옳았을까. 그걸 대체 말이라고 하느냐고, 온힘을 다해 화라도 냈어야 했을까.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성적인 것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꽃과 잎사귀, 푸른 줄기들로 뒤덮인 그들의 몸은 마치 더이상 사람이 아닌 듯 낯설었다. 그들의 몸짓은 흡사 사람에서 벗어나오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고백하자면 이 책에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세간의 관심도 오해도 뜨겁고 날카로워, 혼자서 이 소설을 써가던 순간들의 진실과 동떨어진 것이 되어버린 듯 느낀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귀밑머리가 희어지고 어느 때보다 머리가 맑은 지금, 나에게는 이 소설을 껴안을 힘이 있다. 여전히 생생한 고통과 질문으로 가득 찬 이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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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몇마리쯤 손바닥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아내의 생활력을 나는 좋아했다. 그녀는 내가 고르고 고른,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던가.
- P43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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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을 해결하기 위해 컴퓨터로 ‘잠 잘 오는 법‘을 검색했다.
나는 내용에 더 집중하기 위해 커피를 한잔 내려 먹었다.
이제 잠 잘 오는 법은 배웠지만 커피 때문에 잠은 더 안 온다.
젠장. - P72

 그나저나 엄마는 어디에 계신 걸까? 땅속에 누워 계신 걸까, 흔히들 죽은사람이 간다는 하늘에 계신 걸까? 아니면 우주의 모든곳에 계신 걸지도 모르겠다. 진부하지만 별이 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눈에 보여야 마음을달릴 수 있을 것 같다. - P75

엄마는 그해 겨울, 나를 어떻게 보셨을까? 땅에서든, 하늘에서든 혹은 우주에서든. 당신을 잃은 슬픔보다 연인이 떠난 상실감에 슬퍼하는 내 모습을 보며 서운해하셨을까, 아니면 오히려 흐뭇해했을까. 어쩌면죽은 엄마와 떠나간 그녀는 내게 별반 차이가 없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마음인지 이젠 들을 수가 없으니까. 앞으로 살아가면서 가슴속엔 또 다른 상실감의 구멍이 크고 작게 생길 것이다. 겨울이 되면 내 가슴속 구멍 사이로 찬바람이 스쳐 지나갈 테지. 그때마다엄마와, 그녀와, 과거의 내가 아련하게 떠오를 것이다. - P77

짝사랑의 물리학
그녀에게 차였다고 절망하지 마라.
그녀가 날 차는 순간, 나도 똑같이 그녀를 찬 것이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똑같은 크기의 힘이반대 방향으로 전해지니까.
결국, 물리학적으로 그녀는 나에게 차였다.
아아, 불쌍한 그녀.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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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뒤 그 남자가 담배를 끊고 전화했다고 치자. 그래도 당연히 "No"다. 남자는 친구들과 술을 한잔하며 푸념을 늘어놓을 것이다. 도무지 이해 안 되는 게 여자라고, 그럴 수밖에. 그녀도 자신을 모른다.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팀 윌슨(Tim Wilson)은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도 ‘이방인‘ 같은 낯선 존재라고 했다(Wilson,
2002).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말 모르는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멍청해서가 아니고, 우리의많은 선택과 결정은 의식을 거치지 않고 진행되기 때문이다. 의식은 용량이 아주 한정된 값비싼 자원이다.  - P28

왜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행복해지기 어려운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행복은 사람 안에서 만들어지는 복잡한 경험이고, 생각은 그의 특성 중 아주 작은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뜻대로 쉽게 바뀌지도 않지만, 변한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전체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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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공포에도 엄마는 항상 나를 걱정했다. 농담(코미디)으로 인해 나는 살아 있음을 느꼈지만, 엄마는 죽어가고 있었다. 농담은 모순적인 데서 온다는데 내 삶이 딱 그러했다. 농담처럼 나는모순적이었다. 슬픈데 웃겼고, 웃긴데 슬펐다. - P28

이렇게 엄마의 죽음을 글로 쓰는 일에도 모종의 죄책감을 느낀다. 죄책감은 언제까지 갈까. 조금씩 옅어지겠지만, 이 정도 추세라면 마흔다섯 살 정도에는 어떨까. 내가 방송작가로 일하는 모습을 엄마가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농담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걸 보셨으면 참 좋았을텐데. - P41

어릴 적의 내가 너무 일찍 울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시간 여행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어린 과거의 내가 다 큰 나 대신 미리 울어준 것이다. 시간 여행을 할수만 있다면 이유 없이 울고 있는 아이에게 말해주고싶다. 그렇게 미리 울 필요는 없다고. 그냥, 엄마가 해준 핫케이크랑 딸기셰이크나 맛있게 실컷 먹으라고.
그게 남는 거라고. - P46

숨을 쉬었다. 그곳에서 나는 코미디 속에서나 존재해야 할 어설픈 사람이었다. 그저 농담거리에 어울릴 만한 모자란 사람.
그러나 아르바이트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학력은 고졸에 성격은 극히 소심하고 할 줄 아는 건 없었다. 파주에서 난 궁지에 몰렸다. 현실이 싫었고, 농담이 좋았다. 농담이 있는 컴퓨터 앞에 점점 더 매몰됐다. 히키코모리란 말에 딱 어울리는 사람었다.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동안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사람들이 두려웠다. 웃음거리가 될 것만 같았다. - P49

난 죄책감에 짓눌려 살아가는 벌을 받고 있다. 그 때 엄마는 방안에서 뭘하고 계셨을까? 아들이 긴 방황 끝에 자신의 방에 들어오기를, 거친 숨을 내뱉으며 기다리고 있진 않았을까? 죄책감을 떠올리면 김정일이 함께 떠오른다. 난 간첩도 아닌데 이거 뭐지. - P52

인생이 가장 위험할 때는일이 힘들 때가 아니라 뭘 해야 하는지 모를 때였다.
내 영혼은 죽어 있었고, 엄마는 방에서 1초마다 죽음쪽에 가까워졌겠지.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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