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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순간들 - 불멸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자전적 에세이 ㅣ 부글 클래식 boogle Classics
버지니아 울프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내 아내는 메모광이다. 어떤 때는 아침에 산 볼펜이 저녁이면 다 떨어졌다고 한다. 하루에 볼펜 한 자루를 다 쓸 정도로 끊임없이 메모를 한다. 타이핑보다 더 날렵하게, 더 많은 글들을 써내려 간다.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할 수도, 따라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냥 글 쓰는 것이 습관 되고, 즐거운 것 같다. 나는 소설을 쓰는 분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그 많은 글들을 손으로 베껴 쓰는데 만도 얼마나 많은 시간과 손의 수고가 필요할까를 생각하면 쓴다는 자체만으로도 존경스럽다. 그런데 아마 소설가 대부분은 일단 글을 쓰는데 익숙하고, 단련이 되어 있고, 즐겨하는 분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이 힘들게 느껴진다면 도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존재의 순간들>을 읽으면서 버지니아 역시 메모광, 글쓰기 달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 우리가 그냥 느끼고, 생각하고 지날 일들을 모두 글로 옮겨 놓은 것들이다. 생각하기만도 힘든 일들을 모두 글로 모아 놓았다. 아마 힘든 마음들을 잊기 위해서 수도 없이 펜을 들고 쓰고, 또 쓰고 했던 것 같다. 이것이 메모로 남아서 후에 이 작품 <존재의 순간들>이 나온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는 무엇을 느끼며 살았는가 울프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위대한 문학가는 세 종류에 의하여 만들어진다고 본다. 첫째, 극도의 고난 속에서 나온 깊은 사색이 작품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둘째, 환경적 요인보다는 개인적으로 센치멘탈하며, 우울 기질이 있어 남들이 느끼거나 보지 못하는 것들 사색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다. 셋째, 스스로 고난의 현장에 뛰어들어 그 고통을 몸소 체험하면서 그 느낌들을 기록한 것이다. 첫째의 경우는 박경리님의 삶의 애환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어쩔 수 없이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방편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두 번째 경우는 버지니아 울프처럼 그리 어렵지 않은 환경 속에서(개인적으로는 힘든 상황이었겠지만 비교해 볼 때) 자랐음에도 지극히 예민하고 우울기질이 강하여 남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들을 기록한 부분들이 많다. 세 번째 경우는 헤밍웨이다. 그는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군에 자원 입대하고, 건강문제로 제약을 받자 다시 종군기자로 투신하여 몸소 전쟁의 큰 소용돌이에 몸을 던진 느낌들을 기록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존재의 순간들>을 읽으면서 버지니아 울프가 글을 쓸 수 밖에 없었음을 여러 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울프의 세상으로 들어가 보자.
울프가 13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울프는 이 책 곳곳에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대부분 어머니의 죽음이 그에게 오랫동안 빈자리로 남아 있음을 말하고 있다. 어머니의 존재감이 너무나 컸던 것 같다. 아니 울프에게는 그랬을 것이다. 다른 형제들이 느끼지 못하는 공허감이 그에게는 특별히 많았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와 스텔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그들의 죽음이 입힌 피해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p204 여기서 어머니와 언니의 죽음이 가져다 준 자신에게 온 아픔에 대해 생각한 것이지 그 엄마와 언니 자체를 생각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큼 버지니아 울프는 예민한 성격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공백으로 괴로워하시는 아버지를 보며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해 못내 아파한다. 책임감이 큰 성격이었던 것 같다. 어린 딸로서 천진난만하게 그냥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울프는 선천적으로 그런 성격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책임감 때문에 아버지와 하기 싫은 산책을 하고, 함께 있어 드리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이런 책임감, 남들에 대한 부담감이 글을 쓰게 만든 것 같다.
그의 글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나는 한 가지 분명한 생각을 얻었다. 자기 본위의 이기주의만큼 무서운 것은 세상에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그 사람 본인을 이기주의만큼 잔인하게 해치는 것도 없고, 그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접하게 되는 사람들에게도 이기주의만큼 잔인하게 상처를 입히는 것도 없다.”(p222) 하고 있다.
이런 글을 볼 때 얼마나 울프가 남들에 대한 배려심, 아니 지나칠 정도로 남을 의식하는 모습이 배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모습이 바로 글을 쓰게 하는 힘이었다.
또한 울프는 부와 인기를 누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자신을 최고의 작가로 찬사는 보낼 때 좋아하면서도 과연 이런 마음이 속물근성 때문이 아닌가 자신을 자책하고 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한껏 그 인기에 젖어 행복감에 휩싸여 지낼텐데 울프는 그것마저도 성격상 쉽지 않았다. 이런 센티멘탈이 글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제 나는 나 자신이 보관(寶冠)에 홀딱 넘어가는 그런 속물일뿐 아니라 불을 훤히 밝힌 응접실을 좋아 하는 속물, 즉 사교적인 잔치를 즐기는 속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 같다. 어떤 집단이든 옷을 멋있게 갖춰 입고 사교적으로 빛을 번쩍인다면 그 집단은 낯선 사람들일지라도 나에게 효과를 발휘할 것이며, 확고한 진실을 흐려놓을 화금과 다이아몬드 가루를 피워 올릴 것이다.”(p316)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버지니아 울프는 조그만 누림에도 예민한 금욕주의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성향이 예민하게 사람 속 마음을 간파하고 그 것들을 글로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성격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이 생각한 것에 대한 확신은 있었지만 그 성격 자체에 대한 만족은 아닌 것 같다. 지나치게 예민한 자신을 자책하는 듯한 모습들이 보인다. 대부분의 문학가들의 현상이라 생각한다. 이상 역시 자살을 했는데 얼마나 그 내면 속에 주체할 수 없는 아픔들이 녹아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박경리님 또한 남편을 부역의 대상으로 잃고 아들을 먼저 보내고, 사위마저 감옥에 보냈어야 하는 아픔들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고통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 모두 자신의 처한 환경이나, 성격을 좋아해서 받아들인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개인의 아픔들이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니 이것 또한 아이러니다. 일반 대중들의 아픔을 문학가들이 고스란히 당하고 그 고통들을 글로 써서 감동을 준다는 것은 위대한 작가들에게 오직 감사할뿐이다. 버지니아 울프에게 감사한다. 울프의 작품을 이해 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울프의 자전적 에세이가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