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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최고의 선택 - 룻기 ㅣ 김양재의 큐티 노트
김양재 지음 / 두란노 / 2013년 12월
평점 :
판매중지
우리 집에서 서울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판교가 나온다. 판교I.C 옆으로 우리들 교회가 웅장하게 보인다. 소문을 들어서 안다. 큐티 여자 목사님, 김양재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라고 한다. 어떻게 갑자기 저렇게 성장하여 뜨는 도시 판교에 우뚝 설 수 있었었을까?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답을 찾았다. 김양재목사님은 스스로 말한다. ‘목욕탕 교회, 때밀이 목사’ 가출 직전, 부도 직전, 이혼 직전, 자살 직전의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백하고, 서로 대를 밀어 주면서 시원함을 느끼고, 치유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교회에는 큐티가 있다. 어느 교회인들 큐티가 없겠는가? 요즘 웬만한 교회는 다 큐티를 한다. 성도들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런데 우리들 교회의 큐티는 다르다. 적나라함, 벌거벗음, 직전까지 나누는 깊은 나눔이 있다. 그러기에 목장에 참석하는 사람마다 주님의 만져주심을 받는 것이다. 이런 나눔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이 먼저 나눔이 실천되고, 솔선수범되는 나눔이 결국 주님의 만져주심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때밀이 목사님의 룻기 강해를 들어가 보자.
저자는 룻기의 제목을 ‘내 인생의 최고의 선택’이라 적고 있다. 그렇다. 룻은 최고의 선택을 했다. 아니 내가 보기에는 최악을 선택했다. 세상이 보기에는 최악 중에 최악, 그야말로 불행의 길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최고의 선택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도 우리는 롯과 같은 선택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믿는 사람들, 아니 잘 믿는다는 사람들도 절대로 이렇게 하지 않는다. 목사님들도 이렇게 쉽게 가르치지 않는다. 남편이 외도, 도박, 무능, 알콜 중독인데 그냥 살라고 하는 목사님이 어디 있겠는가? 그냥 살라는 것은 그 성도를 무시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룻은 이런 현실 속에서 버티기를 택했고, 결국 잘한 선택임을 입증한 사례를 보여주는 인물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는가?
위클리프 성경사전에 랍비 문헌을 인용해 기술한 것에 보면 나오미의 둘째 며느리 오르바가 나중에 골리앗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한다. 나오미를 40보 정도 따라가다가 그 백성의 신에게로 돌아갔는데 공교롭게도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괴롭힌 날수가 40일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자녀교육의 하나인 ‘쉐마’를 낭송할 때 그 이야기를 꼭 읽어준다고 한다. 오르바의 길은 멸망의 길이고, 룻의 길은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오르바의 선택, 룻의 선택이 이렇게 다른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인생은 선택이다. 신앙은 선택을 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해 어떤 어려움, 고난, 손해를 선택하는지, 자신을 위해 하나님과 교회를 기꺼이 버리는지를 보면 아주 간단하게 그의 미래를 알 수 있다.
이 책은 중간 중간에 성도들의 간증이 들어가 있다. 큐티를 통한, 목장에서 나눔을 통한 문제 해결의 간증이 은혜가 많이 되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그래서 변화된 이야기만큼 실제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음을 실감하는 좋은 증거라 생각된다. 롯기 전체 주제는 ‘텅빔’이다. 즐거움과 희락의 여인 나오미가 텅 빈채로 돌아왔다. 유력하고 장대 같은 두 아들을 다 잃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텅 빈’ 시어머니를 따르겠다는 룻이 역사를 바꾸었다. 믿음의 사람은 ‘텅 빈’ 사람을 채우는 사람이다. ‘텅 빈’마음들을 채우는 사람이다. ‘텅 빈’ 마음을 채운 한 사람 룻이면 다 되었다. 바로 지금 이런 한 사람이 필요한 때다. 바로 김양재 목사님이 룻과 같은 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김양재 목사님은 환난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자들이 함께하는 교회를 이루는 것이 그분의 소망이라고 한다. 이 마음이 바로 룻과 같이 ‘텅 빈’사람들을 채워주려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바로 한 사람이면 족하다.
우리 본향은 천국이다. 우리 모두 천국에서 만나야 할 예수님이 자손이어야 한다. 그러면 그 씨를 남겨놓고 가야 한다. 내 자식만이 씨가 아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모둔 것을 다 가졌어도 예수 씨가 없으면 안식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불신자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거룩한 중매쟁이가 되어야 한다. 룻은 보아스가 자기와 결혼해야 하는 이유를 ‘고엘’, 즉 ‘기업 무르기’라고 했다. ‘고엘’은 룻기 주제인데, 책임의 목적은 기업 무르기이다. 기업 무르기는 전도다. 나 혼자 잘 먹고 잘살려고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다. 룻이 육적으로도 시어머니를 부양해야 되기 때문에, 이타적인 목적 때문에 결혼을 하자고 한 것이다. 현대인들의 최고의 문제는 이기주의다. 가족 공동체도, 부부 공동체도, 혈연, 지연 공동체도 없다. 오직 자기가 전부다. 믿음도 자기 혼자 잘 되기로 변질되었다. 이것은 아니다. 이타적인 마음이 되어야 한다. 남을 위하는 마음이 없이는 전도할 수 없다.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 없는데 그 사람이 구원받는 것에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전도도 이타적인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룻과 나오미와 같은 마음, 보아스와 같은 마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기업을 무르겠다고 수치와 수모를 무릎 쓰고 돌아온 나오미, 룻에게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양보한 나오미, 며느리를 보아스에게 들여 보내는 용기를 가진 나오미 속에 이타심을 볼수 있다. 또한 룻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온 것, 시어머니를 공양하기 위해 이삭줍기를 감당하고, 어머니의 말에 순종하여 보아스의 발채로 들어간 룻의 모습은 남,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다. 보아스 역시 나오미와 룻의 안타까운 사연을 적극적으로 돕는 긍휼의 마음이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고엘’ 즉 기업 무르기가 성취된다. 즉 전도가 성취된다. 전도는 이런 남을 위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룻기는 전도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오미 룻이 서로를 위해 ‘텅 빔’을 무릎 쓰고 고향으로 돌아 왔더니 도와주고 채워줄 보아스가 그들에게 생겼다. 그 보아스는 예수님을 예표 한다. 즉 우리가 가족, 남편, 부모, 친구, 이웃 등을 위해 ‘텅 빔’을 채우려 찾아가면 예수님이 보아스가 도와주듯 도와주신다. 이것이 전도다. 전도는 ‘텅 빈’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것에서부터 전도가 시작된다. 그래서 믿음은 빈 마음이다. 내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역사와 질서를 우선으로 두는 것이다.
나와 너, 우리 모두 잘 못된 것을 타인에게 원인을 돌린다. 실제로 들어보면 다 맞는 말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어찌 극한의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룻과 같은 상황에서 시어머니를 따라올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일을 룻은 하고, 그 선택과 결정이 룻을 살리는 일이 된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도와줄 것을 알고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룻은 말도 안 되는 결정을 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룻처럼 나가는 길이다. 사실 룻과 같은 사람이 가는데 안 도와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룻과 같은 며느리에 나오미가 어찌 감동을 하지 않을 수 있으며, 그런 며느리라는 소문에 보아스가 도와 주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룻과 같은 효부에게 어느 종들이 도와주지 않겠는가? 안 도와주면 이상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나에게 달려 있음을 알게 된다. 룻처럼만 하면 된다. 어떻게 룻처럼 할 수 있는가? 믿음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남을 도와주면 반드시 도와준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만 있으면 룻처럼 할 수 있고, 룻처럼 할 수만 있으면 반드시 나오미도, 종들도, 보아스노 나타나게 되어 있다.
(시 41:1)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