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자본이다 - 생명자본주의 그 생각의 시작
이어령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요즘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산다기보다 살기등등하게 산다. 모든 것이 경쟁이다.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 남을 떨어뜨려야 내가 붙는다. 남을 이겨야 내가 살아남는다. 직장생활, 학교 입시, 아이들이 하는 게임, 텔레비전에서 하는 오디션 프로, 남녀의 상대를 정하는 ‘짝’이란 프로에서도 그렇다. 국가간에도, 가난한 나라, 부자 나라도, 한중일러 등 주변국들도 어떻게 하면 누를까를 생각한다. 공생공존하는 방법은 찾으려 하지 않는다. 왜그럴까? 현대인들은 사는게 아니라 전쟁을 한다. 나 외의 모든 이들과 전쟁을 한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직장에서 동료들과 사회에서 경쟁사들과 심지어 가족들과도 전쟁을 한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기와도 전쟁을 한다. 자기 자신을 가만두지 않는다. 못살게 굴고, 자책, 자학, 학대한다. 결국 스스로를 죽이는 자살에까지 이른다. 왜 그럴까? 80의 고령에 한국의 지성 이어령박사가 자신의 학문의 마지막 결정체인 ‘생명’이란 주제를 들고 나왔다. 인류의 주제인 ‘사랑’을 펼쳐보인다. 한 개인으로부터, 국가와 인류들이 들어야할, 아니 듣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반드시 실행하여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저자 이어령박사는 신혼시절 어려웠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이야기는 허름한 방 둘이 사는 것이 적적하여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자 금붕어를 사 놓는다. 겨울 강추위에 연탄불을 꺼뜨리고 어항이 언다. 급한 마음에 물을 데워 어항에 붓고 다행이 금붕어가 숨을 쉰다. 잘 키우다가 결국 죽고 어렵살이 찾은 동네 한 귀퉁이 땅을 찾아 금붕어를 묻어준다. 온통 시멘트로 땅을 가려 붕어 묻어줄 틈바구니 없음을 한탄한다. 왜 이름이 금붕어인가? 금붕어는 왜 잡아먹지 않는가? 왜 한국에는 금붕어 기르는 문화가 정착하지 않았는가? 왜 일본은 금어(金魚)라고 하지 않고 굳이 금붕어라고 했는가? 이 모든 것들이 다 이유가 있다. 이런 것들을 찾아보면서 생명의 소중함, 한군문화 속에 배어 있는 생명 자본주의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큰 이야기의 종말이라는 이론을 펼쳤다. 통계숫자가 사람을 울리는 법은 없다. 전쟁으로 몇 명이 죽었다는 생명이 없다. 리오타르는 계몽주의, 마르크시즘, 자본주의 같은 이론들을 큰 이야기라고 부르고 있다. 이 큰 이야기들이 모든 테러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대안은 ‘작은 이야기’라고 부르는 담론 양식들과 그것이 생산하는 서사적 지식이다. 신화나 설화와 같은 ‘작은 이야기’를 중시하고 큰 이야기를 믿지 않는 것이다. 하나의 억압적 이야기가 지배하지 않는 다수의 자유로운 이야기들의 공동체를 꿈꾼다. 작은 이야기들이 이질적인 채로 공존하는 장으로 해체된다. 생명의 체험은 3의 수만 넘어가도 우리는 더 이상 기억하기 힘들다.

 

생명자본주의란 ‘돈을 위한 돈에 의한 돈의 자본주의’, ‘물질을 위한 물질에 의한 물질의 자본주의’를 ‘생명을 위한 생명에 의한 생명의 자본주의’, ‘사랑을 위한 사랑에 의한 사랑의 자본주의’로 탈구축 하자는 것이다. 불경기를 뜻하는 영어의 리세션은 원래 그렇게 나쁜 의미가 아니었다. 리세션(recession)은 리세스(recess)라는 라틴어로 ‘멈춤’과 ‘쉼’의 의미를 갖고 있다. 잠시 성장과 전진을 멈추고 휴식한다는 의미이며 이것이 바로 밤과 겨울의 ‘멈춤’을 수용한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특성이기도 하다. 경제활동이 과잉되고 더 이상 그 시장이 지탱할 수 없는 번영의 극에 이르면 여름과 가을철이 지나 겨울이 오는 것처럼 산업 경제에도 동면의 철이 찾아온다. 그렇다 긴 안목으로 보면 생물들의 동면처럼 불황의 엄동설한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의 하나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겨울이 없었다면 저 쉼표없는 무한 경쟁과 노동의 정글에서 살아야 한다. 일본의 하마다요 교수는 “자본(capital)이란 말은 서양에서는 양과 같은 가축의 머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가축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양은 그리스도교에서는 구세주를 의미하는 중요한 메타포입니다. 자본의 자(資)도 조개를 뜻하는 바다의 생명 조개 패(貝)애서 비롯된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원래부터 자본은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이웃나라 한국에서는 이어령교수가 생명(사랑)을 바탕으로 한 생명자본주의의 새로운 입장에서 통합적인 인격경제를 제창하고 있습니다.”고 했다.

 

우리는 “말이 안 먹히네”, “아이디어가 안 먹히네”라는 말을 쓴다. 소통은 대개 먹히는 것이다.k 먹혀야 소통이 이뤄지고 생명의 교환이 이뤄진다. 육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먹는 쪽이 유리하지만 정신이나 영혼으로 보면 먹히는 쪽이 위이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에게 먹히셨다. 만약 처형으로 안 먹혔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에게 먹힘으로 기독교는 부활했다. 사신사호(死身死虎) 몸을 던저 호랑이를 살리는 것이나 우리가 금붕어를 키우는 것이나 똑같다. 먹히는 것이다. 기독교가 먹힘으로써 로마를 먹었다. 기독교는 먹혀야 한다. 먹히는 길이 사는 길이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즉사, 사즉생이라고 하셨다. 금문화가 그렇게 발달한 신라는 금만능 사살에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금을 무턱대고 좋아하지 않았다. 금의 양가가치를 안 것이리라. 그리고 금은 인간을 파괴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가난했지만 귀중한 생명가치에 보다 더 무게를 둔 문화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어느 아버지가 자녀에게 책에 길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책 곳곳에 돈을 넣어 두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이 돈을 찾으려다가 책과 친해져서 책을 읽고 성공했다고 한다. 나도 자녀에게 책읽기를 강조하는데 이 방법을 써볼까 싶다. 구한말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윌리암 뉴트 블레이어 목사는 그의 저서 <정금같은 신앙>에서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려 했던 것은 금을 숭상하는 일본이 금이 풍부한 한국의 금이 탐나서 그랬다는 것이다. 한국의 금광을 미국, 영국의 큰 회사들이 개발했다. 그러나 한국의 가장 좋은 금은 산에나 모래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다. 60여년 이상 기독교 선교사들은 이 금을 찾았고, 놀랄 만한 양과 질의 금, 곧 겸손한 마음과 기꺼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 금을 발견하였다고 했다. 또한 계속되는 전쟁 속의 시련과 고통 속에서 제련되어 한층 더 강해진 마음의 금, 신앙의 금을 가진 나라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런 놀라운 아름다운 금을 외국인에는 보였는데 왜 우리는 정작 보지 못했는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이라도 다시 한 번 찾고 발전시켜야 할 것 같다.

 

자본이란 말에 생명이 들어 있다. 결국 생명이 자본이다. 오직 생명만이 진정한 자본이 될 수 있다. 생명은 사랑을 먹고 산다. 사랑 없이는 생명을 이어갈 수 없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사랑은 먹히는 것이다. 늑대에게 토끼가 먹히는 것은 토끼가 살기 위함이다. 우리는 먹히는 것을 싫어해서는 안 된다. 나를 위해서 양보하고, 희생하여야 한다. 이제 먹혀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자연에게서 배울 점이다. 인간은 절대로 자연을 보호할 수 없다. 최소한 유지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자연이 인간을 보호하는 것이다. 자연의 유지, 존속 방법을 배워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얼마전 김지방의 <적과 함께 사는 법>을 읽었다. 인류의 전쟁사, 흑백 갈등사, 부자와 가난한 자의 막힌 담, 이데롤로기의 이념전쟁 등등 수많은 갈등의 해결점은 누군가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다. 즉 먼저 먹히는 것이다. 먹히는 것은 통하는 것이요, 사는 길이다. 죽으면 살고, 살면 죽는다. ‘生卽死 死卽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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