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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함께 사는 법 - 오늘을 살리는 과거 청산의 현대사
김지방 지음 / 이야기나무 / 2013년 10월
평점 :
나는 최근 친구로부터 불합리한 결정을 억지로 받아들이라는 요구를 받았다. 너무나 억울했다. 말도 안됐다. 확실하게 잘못되었다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확인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반복되었고, 주변인들을 동원해 자신의 요구를 주장했다. 결국 친구들의 중재가 제안되어 왔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게 세상사는 법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그 후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잘 지내려고 애썼다. 마음을 넓게 먹기로 했다. 지금은 별 탈 없이 지내고 있다. 인간사는 모두 관계다. 이런 속상함과 배신은 그래도 참고 넘어갈 수 있을 수 있지만 가족의 죽음, 잔인하고 집요한 탄압, 고문과 이유 없는 처단, 계획적이며 극단적인 압제, 근본적인 차별 등은 정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저자는 제목을 ‘적과 함께 사는 법’이라 했다. 적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정의 자체가 어려운 말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실제로 지금도 적과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생각한다. 정도차이일 뿐이다. 지금도 함께 어우러져 사는 방법을 찾아보자.
저자는 세계 각국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고 있다. 그들은 어떻게 아픈 역사의 상처를 아물게 했는가? 과연 잘 해결하였는가? 되집어 가면서 그 해법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역사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 갈들 청산, 캄보디아의 좌파 독재 청산, 아르헨티나의 우파 군사정권 청산, 프랑스의 제2차 세계대전 나치 부역자 청산, 미국의 흑인 차별 역사 청산, 한국의 여수.순천사건에 관하여, 한국의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하여 등이다. 각각의 나라와 역사는 그 특성이 다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역사와 미국의 흑인 차별은 흑인 백인간의 인종 차별의 문제다. 아르헨티나 우파 군사정권 청산과 캄보디아 좌파 독재 청산과 한국의 여순사건은 좌우파 대결의 문제다. 프랑스 나치 부역자 청산은 인간의 상황에 따른 신변보호 차원의 문제이다. 한국의 5.18광주민주화항쟁의 문제는 정치적 야욕을 가진 군인들의 무차별 살생에 대한 해법의 문제다. 각각의 특징은 다르지만 결국 용서의 문제다. 어떻게 하면 용서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용서 없이는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용서가 없이는 또 다른 가해자가 되며, 또 다른 살육의 복수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 영화의 메인 스토리인 ‘복수혈전’과 같은 헤프닝의 연속 같은 우습고, 단순한 이야기 밖에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한 입장에서는 이념이고, 당시의 상황이고, 역사의 현실이라는 말이 전혀 먹혀들이 않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아픈 역사의 해결의 실마리는 용서인데, 어떻게 하면 누가 먼저 손을 내밀며, 진심으로 용서하고, 용서하는 자로서 상처를 안 받거나, 덜 받을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과연 그 방법을 이행 할 수 있는가? 그 방법이 있기는 한 것인가?
먼저 이데올로기는 필요악인 것 같다. 좌우 이념대결이 없으면 발전이 없고, 있으면 극단적으로 치달아 너무나 큰 죽음과 아픔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사회도 좌우대결이 좀 과하게 치닫고 있다. 건강하게 생각의 차이를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받아들였으면 하는데 극단적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문제인 것 같다. 아마 그런 반응은 거북이 보고 논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이념에 대한 트라우마의 문제인 것 같다. 캄보디아 사건이나, 여순사건을 보면서 이념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시 한 번 경각심을 갖게 된다. 절대로 이념으로 장난치지 못하게 하자. 절대로 극단론자들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자. 다수의 “그럴 수 있지”라는 넓은 수용적인 사람들이 주류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사회를 만들어야겠다.
이 책의 열거된 몇 사건에서 그 공집합이 될만한 방안을 찾아보자. 남아공의 투투주교의 진실규명과 화해를 위한 노력이 돋보인다. “우리가 범죄자들을 괴물과 악마로 단정해 버리면 자연히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수도 없게 된다. 그들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도덕적 존재라 아니라고 선언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데스몬드 투투- 데스몬드 투투는 진실과화해위원회 개최에 앞서 위원들과 방청객들에게 ”우리 모두 오늘 하루 동안 우리의 영혼을 열어놓는 시간을 가지면 어떻겠습니까? 눈을 감고 묵상의 시간을 가집시다. 영적 지도자의 말씀을 들읍시다.오늘 하루는 말을 멈추고 침묵합시다. 근대적 민주주의에서는 정치에 종교적 색체를 가져오는 것을 금기시한다. 정치는 이성적 영역이라고 여긴다. 정치는 수많은 회의와 토론에서 쏟아지는 말의 성찬, 사회적 이익집단의 다툼과 언쟁 끝에 결론을 내리는 이성과 설득의 영역이다. 종교적인 영역이 들어오면 더는 대화와 토론, 타협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투투 주교는 위원들에게 요구했고, 위원들을 따라 주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남아공사람들 대부분이 기독교 미션 스쿨 출신으로 이해와 용서라는 주제로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여순사건에 손양원 목사님이 보여준 아들 동인, 동신을 죽인 안재선을 양자로 삼고 신앙을 심어줌으로 원수관계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손양원 목사님과 나덕민 목사님의 주장처럼 주님의 계명인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명만 지키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의 원칙으로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자로 삼을 수 있었다. 안재선은 후두암이 걸려 다 죽기 전에 동인의 동생 동희씨를 찾아와 눈물로 용서를 빌고 15일만에 죽음을 맞았다. 안재선은 목사가 되어서도 주변의 시선 때문에 제대로 활동을 못하고 목회를 접고, 유언으로 아들에게 목사가 되라는 말을 남겼다. 동생 동희씨는 오빠를 죽인 안재선을 고운 눈으로 볼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용서라는 것이 이성으로는 가능하지만 감정으로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모든 사건들이 일단 시간을 요하는 것 같다.
적과 함께 살 수 있는, 복수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새 시대를 열어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용서만이 해결의 방법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용서해야 할 당위성이 먼저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원리적인 문제를 제시한다면 압제를 받은 자, 고통을 당한 자, 핍박을 받은 자가 반드시 높아진다는 것이다. 역사는 결코 영원토록 강자만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역사만 봐도 우파가 득세했다가 다시 좌파가 주도권을 잡고, 정권도 진보, 보수가 교대로 정권을 잡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정치 9단이라면 진보든, 보수든 야당이 되었을 때 불이익을 당하는 모습을 많이 보이는 것이다. 압제를 많이 받는다는 이미지를 많이 보일 때 국민은 약자의 편이 되는 것이다. 물론 당하는 당시에는 고통이 너무 크겠지만 그래서 사실 견디지 못하기도 하지만 원리적인 면에서는 압제받은 자들이 반드시 다스리는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나친 압제로 까지 가기 전에 먼저 많이 맞아주면 압제는 쉽게 풀리고 정의에 선 자들이 전세를 역전시켜 정의편에 설 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흑인들의 압제는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들이 당한 고통이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고 하나님의 위로도 많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억압 받는 이들이 적들을 사랑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하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습니다.”는 말은 정확한 정답이다. 우리는 다만 이 능력을 갖추기가 어려울 뿐인 것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가족이 테러를 당했을 때, 우려하고 동조하여 무기를 들고 온 흑인 동조자들을 향해 그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합니다. 증오를 사랑으로 이겨내야만 합니다. 내가 이 투쟁을 계속할 수 없을 때라도 하나님이 당신들과 함께하는 한 이 운동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확신을 갖고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예수님은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밝히셨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질 것이다. 나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러 왔노라.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기에 부활과 승천과 만왕의 왕이 되실 수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핍박받는 일이 없었다면 대통령도, 나라의 민주화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고난에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할 것이다. 하다못해 집안에서도 젊어서 고생한 아내들이 나이 들어 남편들에게 큰소리를 치지 않는가? 젊어서 고생이 없이 어찌 큰 소리를 칠수 있겠는가? 지혜로운 사람은 나중을 보고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다고 했다. 고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아니 미련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더 큰 복수혈전으로 이어지기 전에 적극적 고난이 필요하다. 작은 희생, 미리 받는 억울이 더 큰 복수로 이어지지 않는 방법이다. 따라서 사는 손해 보는 마음으로 노를 적극적으로 미리 챙기고, 노는 사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사가 개인의 재산축적에 눈이 멀다가는 회사 전체를 말아먹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노가 손해를 절대로 보지 않겠다고 하면 결국 회사는 문을 닫고 직장을 잃어 생계의 근본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적당이 먼저 손해 보는 자세가 좌.우파, 진보.보수, 노사갈등, 흑.백갈등, 국가간의 이해 등을 선해결하는 적극적 자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