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가 지금껏 알지 못했던 기독교 역사 - 세계사에 숨어 있는 흥미로운 기독교 이야기
유재덕 지음 / 브니엘출판사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따라서 왜곡된 부분들이 많다. 기독교 역사 역시 기록에 있어서 오해가 있는 부분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만 했지 누군가가 정리해서 남긴 것은 드물다. 그러나 저자가 나선 것에 대해 감사한다. 그렇다면 어떤 것들이 우리가 몰랐던 기록들일까 사뭇 궁금하다.
중세 시대의 역사들을 보면서 끔찍함을 금할길이 없다. 특히 기독교 안에서도 이런 일들이 벌어졌는가를 생각하면 더욱 부끄럽고 안타깝다. 여자들을 인간취급하지 않은 면이다. 성경에 어디에도 여성들에 대한 입장은 결코 그런 비하를 넘어 죄악시하는 것이 결코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역시 기독교 역시 당시의 사회 환경과 문화를 뛰어 넘기가 힘들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그런면들은 어떤 것들일까? 성경을 지나친 문자적 해석과 기독교 국가에서 발전한 문화가 아니라는 이유로 천시 내지 죄악시 하는 것들일 것이다. 예를 들면 한국의 국악이다. 물론 샤마니즘적 무속신앙의 굿을 하는 음악은 예외이겠지만 궁중음악, 민속음악, 민중들의 전통음악 등을 싸잡아 비기독교적이라 배척하는 것은 또 다른 타문화에 대한 폭력이라 생각된다.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루터는 항의문을 붙이지 않았다. 멜랑히톤의 주장으로 항의문 95개조항이 비텐베르크 성곽교회에 내걸었다고 주장되었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항의문을 붙인게 아니라 로마 캐톨릭 상위기관에 항의문을 보냈다. 그것이 회자되어 알려지게 되었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이다. 항의문을 붙였다는 증거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보낸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붙인 거나 보낸 거나 별반 다른게 없지만 정확히 해두자는 차원에서 받아들인다.
불행이 가져다준 교회의 일치운동을 볼 수 있다. 지금 한국교회를 비롯해서 세계 교회는 수많은 교단이 난립을 하는데 각기 복음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서로 반목하는 것은 많은 개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1453년 오스만 군대는 콘스탄티노플을 55일간 포위했다. 최후 공격이 있기 하루 전 1453년 5월 28일 월요일 저역, 하기아 소피아에서는 마지막 예배가 진행되었다. 코스탄티노플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종파와 상관없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비잔티움 황제는 참석한 동방교회와 로마교회 주교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파를 초월해서 함께 예배하고 성찬에 참여했다. 자정에 예배가 모두 끝났다. 그로부터 1시간 반 뒤에 메메드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화요일 늦은 아침에는 콘스탄티노플이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왜 진작 하나되지 못했을까? 하나되지 못함이 결국 나라의 결속을 약화시켰고, 오스만 터키의 먹이감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세상의 먹이감이 되고 있지는 않는지 점검해야 한다. 교회들이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지 못하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 성도와 성도끼리, 목회자와 성도간에, 목회자와 중직자 간에 대립의 형태는 공멸의 길임을 역사가 교훈하고 있다. 최근 한국 최고의 교회에서 충돌하고 있는 모습은 이런 역사를 통하여 되돌아보고 해결점을 찾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경교가 당나라에서 수만명을 거느릴 정도로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급속히 쇠락한 이유가 무엇일까? 경교가 외래 종교였음에도 토착화를 위해 따로 노력하지 않았다는 게 일차적인 이유로 꼽힌다. 한 때 경교의 신자들이 4만-6만명에 달하기도 했었지만, 대부분 서역 출신의 상인이나 군인이었다. 빈약한 경전의 번역과 생소한 한족문화와 종교 때문에 경교는 외국인을 위한 종교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 우리가 교리나 문화는 달라도 이웃과 교류, 협력, 섬김을 관계를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는 점이다. 무조건 배척 중심으로 일관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고립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