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주기도문
김형국 지음 / 죠이북스(죠이선교회)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교회의 모든 교회들은 예배 때마다 거의 주기도문을 했다.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예배, 주일저녁찬양예배, 혹은 회의때에도 수시로 주기도문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주기도문이 사라졌다. 아직도 든든히 하는 교회들이 있지만 점점 사라져 아예 흔적조차 찾지 못할 정도까지 되기도 했다. 사도신경은 하지만 주기도문은 잊어버렸다. 왜 그랬을까? 주기도문을 잃어버린 것과 한국교회의 쇠락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사단의 미묘한 속임수가 있었을까? 주기도문은 너무나 많이 하다보니까 형식적이 되어 주기도문에 기도를 빼면 ‘주문’이 되는데 주문이 되다시피 했다고 생각하고 그럴 바에야 아예 하지 말자고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주기도문이 주문이 되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아예 하지 않는 것은 더욱 문제인 것 같다. 기본적으로 주기도문을 찾을 뿐만 아니라 주기도문의 정신과 내용을 되찾아야 겠다. 저자가 남들이 쉽게 간과해버린 것을 예리한 영성으로 찾아낸 것 같아 고맙다. 주기도문을 왜 찾아야 하는지, 주기도문의 중요성은 무엇인지, 주기도문의 내용은 무엇이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저자의 혜안을 읽어보기로 하자.

 

마태복음 6장에는 주기도문 바로 앞에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이와 같이, 그러므로 기도하라, 너희는”입니다. 주어인 ‘너희는’이 맨 마지막에 나오는데 강조법입니다. 즉 ‘너희는’ 특별한 백성이므로 ‘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너희’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즉 애굽의 노예된 백성, 노예로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구속받고, 천시 받고, 대우받지 못하는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을 말합니다. 애굽의 노예로 있을 때에는 애굽의 풍속을 따르고, 애굽의 신을 섬기고, 그들의 규례와 명령을 따랐던 백성을 말합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세상의 법을 따르고, 세상의 신을 섬기던 모습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 구원을 받고 세상에서 벗어났으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으로 부름받을 때와 동일한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된 우리 자신이 전혀 특별하지 않은, 매우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이 그것입니다. 오히려 많은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형편없고 무가치하다고 여기며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나라 백성의 특징입니다. 별 볼 일 없는 사람, 평범한 사람, 평범이하인 사람들을 부르셔서, 온 우주와 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특별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된 우리가 어 이상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을 따라 가기로 결단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징입니다. 주기도문은 바로 이렇게 된 백성들이 하는 거룩한 기도입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읽으면 우리가 가장 기죽게 됩니다. 산상수훈대로 살기가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러나 산상수훈은 ‘이렇게 살면 그리스도인이다’라는 기준이 아닙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므로 산상수훈의 가르침대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마음 상태,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가져오는 새로운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 산상수훈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산상수훈을 가능하게 한단 말입니까? 그 답은 바로 주기도문에 있습니다.

 

마5:3-16절 하나님나라 백성의 정체성, 마5:17-48 하나님나라 백성의 새로운 삶의 방식, 마6:1-4 자선에 대한 가르침, 마6:5-8 이방인의 기도, 마6:9-13 주기도문, 마6:14-15 온전한 기도를 위한 용서, 마6:16-18 금식에 대한 가르침, 마6:19-7:12 하나님나라 백성의 근원-하나님 신뢰, 마7:13-29 하나님나라 백성의 열매와 표지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정체성에서 열매와 표지로 가는 중간에 삶의 방식, 신앙생활, 삶의 방식의 근원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 가장 중심에 기도가 있고, 그 중에서도 중심에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기도에 달려 있는데 이방인처럼 중언부언도 아니고, 바리새인처럼 외식하는 기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을 골방에 들어가서 주님과 독대하듯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기도로 살고, 그 중에서도 주기도문으로 삽니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왜 기도하는지, 어떻게 기도하는지, 무엇을 기도하는지를 보면 세상이 얼마나 우리를 간절히 기도하게 만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행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힘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그 해답이 우리 안에는 없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그 동력은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할 때 우리에게 특별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립니다. 갈등과 연약함 가운데서 우리로 이기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주기도문을 외워서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기도문이 우리를 형성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게 만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켰다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허셨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즉 제사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전을 헐었다는 것은 이미 주님의 십자가로 이루셨기 때문에 제사가 필요 없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성전을 허신 것이겠지요. 그래서 지금도 성전 자리에 성전을 지을 수 없게 되었고, 이슬람의 황금모스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진노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제사의 의미를 성취하시고 성전은 이제 기도하는 집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즉 구약의 안식일은 제사하는 날이라면 신약의 주일은 기도하는 날일 것입니다. 구약은 제사로 살았다면 신약의 성도는 기도로 사는 것입니다. 기도 중에서도 주기도문으로 사는 것일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주기도문을 부지런히 드려야 합니다. 주기도문을 단단히 지켜내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주기도문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기도문을 하고, 그 뜻을 기도를 통하여 이루면 결국 주기도문이 우리를 지킨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주기도문을 지킨 것이 아니라 주기도문이 성도를 지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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