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복음 -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라
리처드 스턴스 지음, 이지혜 옮김 / 아드폰테스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몇 년 전 우리 교회 권사님께서 “사는게 재미 없다”고 하셨습니다. 얼마 지나더니 “죽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를 지나 그 권사님에게 결혼 적령기가 지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딸을 낳았는데 손녀를 본 권사님이 어느날 부터인가 얼굴이 달라졌습니다. 그 때부터 “사는게 재미 없다.” “죽고 싶다.”는 말이 싹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입이 귀에 달려 늘 웃으시면서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권사님이 뭐 때문에 삶의 의미를 잃었던 것일까 생각했더니 바로 “아이” 즉 “생명”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날 교회들도, 성도들도 신앙의 의미를 잃었다고 봅니다. 왜? 바로 생명에 관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책의 저자 리처드 스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나무에 집중하지 숲을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즉 배우자, 가족, 교육, 능력, 돈, 공로 모두 나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하는 일이 인생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고 합니다. 오히려 인생의 ‘목적’이 우리가 하는 다른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은 인생의 충만함을 느끼지 못할까? 교회에도 가고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지만 여전히 뭔가가 빠진 느낌이 있다. 그것은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기”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눈앞에 있는 것들에 정신이 팔려서 큰 그림은 보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아이가 자라 학교에 가고,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일상의 여러 가지 문제들과 씨름하는데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잡아 먹는 일, 즉 나무다. 이런 일들에 집중하다 보면 숲 속에서 나무들만 보고 길을 찾다가 결국 길을 잃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숲은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파악하고 거기서 우리가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그분의 이야기에서 매우 특별한 역할을 맡기시려는 의도로 당신을 창조하셨다. 우리에게 맡겨 놓으신 이야기기 무엇인가?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나님의 이야기는 천국 복음의 전파, 땅끝까지 전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상대명령이라 합니다. 이것을 위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지옥의 문이 이기지 못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모습은 혁명 정신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충격적 현실이다.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 죄를 용서받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기는 해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힘들 때 하나님의 위로를 찾거나 어떻게 하면 선하고 열매 맺는 인생을 살 수 있는지 알려주는 행동강령이 기독교 신앙이기는 해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우리 주님이요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따르라는 요청이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가 하고 계신 위대한 사명에 동참하라는 요청이다. 기독교 신앙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분을 따르라는 요청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온전하게,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 우리 인생을 향한 이 위대한 소명을 재발견하여 혁명의 불꽃을 다시 피울 수 있다. 21세기 교회는 자원, 지식, 규모, 권한, 성령의 능력 등 모든 것을 갖추었다. 부족한 것은 의지뿐이다. 이제 그 일을 마무리할 때다. 참으로 공감하는 말이다. 현대 성도가 은혜를 받지 못함의 원인은 딱 하나, 영혼구원의 사명으로 다가가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가 무기력에 빠진 원인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갖춘 한국교회가 다시 이 근본, 기본, 예수님의 지상명령으로 가면 반드시 대부흥은 물론 전세계를 다시 깨울 수 있다고 본다.

 

성경 속의 도미노 현상을 보면 기생 라합의 헌신, 보아스와 룻의 결혼, 보아스는 라합의 어머니, 보아스가 오벳을 낳고, 오벳이 이새를 낳고, 이새가 다윗을 낳으며, 다윗의 혈통에서 구세주 예수님이 탄생한다. 한 여인의 희생의 도미노가 예수님을 탄생 시킨다. 어떻게 뉴저지가 한국을 바꾸어 놓았는가? 뉴저지의 주의 프린스턴의 로버트 와일더가 선교에 사명을 받고 학생선교자원운동을 창시하고 네 친구와 함께 선교사가 되겠다고 헌신했다. 한 친구의 도미노로 다섯 친구가 넘어졌다. 와일더는 167개 대학 교정에서 강연을 했고, 메코믹신학교에서 말씀을 전했는데 새뮤얼 모펫이 감동을 받고, 2년이 채 못되어 한국에 왔다. 모펫이 길선주를 전도했고, 길선주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주동자가 되었다. 한 사람이 중요하다. 한 사람이 복음의 능력에 넘어지면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복음의 열정에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딱 한 사람, 바로 나다. 내가 변하면 도미노로 넘어지게 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이 남을 기대한다. 함께 넘어졌으면 한다. 그러나 서로 눈치만 보고 있지 어느 누구도 넘어지지 않는다. 그 많은 인적 자원, 재정적 자원들이 그냥 서만 있다. 마치 영적 보디빌더처럼 말이다. 즉 보디빌더는 자신의 체격만 키우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포환을 던지지도, 창을 던지지도, 역기를 들지도 않는다. 우리가 능력을 키우고는 있지만 영혼을 구원하지는 않는다면 영적 보디빌더에 불과하다. 먼저 내가 들어야 한다. 내가 들기만 하면 다른 사람은 함께 들게 될 것이다. 그 한 사람이 내가 되어야 하고, 바로 내 교회가 되어야 한다. 아니 내가 되고, 내 교회가 반드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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