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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귀환 - 희망을 부르면, 희망은 내게 온다
차동엽 지음 / 위즈앤비즈 / 2013년 3월
평점 :
오늘 외출 중 벛나무에 꽃망울이 터진 것을 보았다. 아주 조금만... 몇 일 후면 그 화려한 자태를 뽐낼 것이다. 그 긴 겨울을 다 죽은 것처럼 잿빛에 젖어 깡마른 줄기에 매달려 있던 가지에서 꽃망울이 터진 것이다. 이 망울을 터뜨리기 위해 그 긴긴 겨울을 잘도 이겨냈다. 어려서 시골에서 자란 아이들이 사회생활도 잘 한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나무를 보면서 견뎌내고 꽃망울 터뜨리는 인내를 미물을 통해서 배우기 때문일 것입니다. 희망을 바로 자연에서도 너무나 자연스럽고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 몸부림의 결과물인 <희망의 귀환>을 들었습니다. 희망은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지, 희망이란 무엇인지를 저자를 통해 한 말씀 들어보겠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희망적 존재다. 우리 피 속에 희망이 흐르고 있다. 그런즉 인간답기만 하면 희망을 반드시 본성을 드러낼 것이다. 지극히 인간답기만 하면 된다. 겨울은 언제나 봄 속에서 끝난다. 희망만 가지만 절망과 좌절은 단칼에 베어진다. 희망을 선포하는 순간 절망을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하며 달아난다. 희망을 부르면 희망이 달려온다. 부르기만 하면 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저절로 부르게 되고 달려 올 것 같은 충동이 느껴진다. 절망을 이기는 방법은 희망 놀이를 하면 된다. 절망에 침전 당하지 말고, 아무거나 붙잡고 희망을 주절거리다 보면 절망은 사라지고 희망이 온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희망스런 것이 있으면 조그만 희망에 젖어보면 절망 아웃, 희망 인이 된다.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가 사형수로 20년 감옥 생활을 창문으로 비치는 신문지만한 햇빛을 무릎위에 올려놓고 그 햇빛을 즐길 때 절망이 사라지며 희망으로 연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희망놀이이다. 나에게 신문지만한 햇빛은 무엇인가? 나에게는 온통 햇빛이고, 찬란한 빛이 사방에서 비춰오니 왜 절망하겠는가? 오히려 손 바닥만한 절망을 붙잡고 희망을 내 볼지 않았는가?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자어로 절망(絶望)은 바라보기를 끊는 것이다. 바라보기만 계속하면 희망은 이어진다. 장미꽃 알레르기로 강연을 제대로 못한 강사가 나중에 알고 보니 조화였다나. 우리가 조화만 보고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청춘의 열정은 불같은 가능성의 덩어리다. 그것은 한계를 뚫는 돌파력이 있고, 스펙보다 힘세고, 불가능보다 강하다! 오스카 와일드는 “그대에게는 이 세상에 가장 훌륭한 아군이 있지 않은가! 청춘이라는 벗이!” 청춘은 희망이다. 희망은 청춘이다. 희망을 잃지 않은 자가 청년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된 지경에서도 “나에게는 아직도 비장의 무기가 남아있다. 그것은 희망이다!”라고 외쳤다. 알렉산더 대왕에게 패전의 원인을 보고하는 장군에게 대왕의 말 “장군은 가장 중요한 이유를 빠트린 것 같네. 장군이 그 전쟁을 승리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던 것 말일세” 이미 믿지 않는 것에서 패전은 예견되었던 것이다. 영국와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 이주민들 사이에 벌어진 보어전쟁이 한창일 때, 남아프리카의 한 병사가 기소되었다. 그의 죄명은 낙심죄! 그는 마을을 방어 중이던 병사들의 대열을 돌아다니며 온갖 부정적인 정보와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았다. 영국군이 얼마나 센지, 무기는 얼마나 강력한지, 성은 얼마나 견고한 지, 우리의 무기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등등“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를, 국가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낙심죄를 짓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흔히들 정치인들 핑계되며, 경제의 어려움을 열변을 토하며 강변하는 사람들은 다 낙심죄로 고소하노라.
“사람의 뇌는 동시에 두 가지 반대 감정을 가질 수 없다. 곧 사람의 머리에는 오직 한 의자만 놓여 있어서 여기에 절망이 먼저 앉아버리면 희망이 함께 앉을 수 없고, 반대로 희망이 먼저 앉아버리면 절망이 함께 앉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항상 희망을 먼저 앉혀야 겠다. 목표가 없으면 절망한다. 30마리의 개가 토끼를 쫓았는데 29마리는 지쳐 포기했고, 한 마리만 끝까지 달렸다. 왜? 29마리는 앞의 개의 뒤꽁무니만 따라갔고, 오직 한 마리만 목표인 토끼를 보고 달렸기 때문이다. 그래 목표다. 구체적 목표다. 나에게는 4*7의 목표가 있다. 나의 개인적인 암호와 같다. ‘실패학교’가 있다. 세기적인 인물들을 배출하여 전통과 명예를 자랑하는 최고의 명문학교! 입학도 자유, 자퇴도 자유, 학비도 꽁짜! 너무나 멋진 말이다. 실패학교가 최고의 명문이라니. 20세기 성공한 사람들 413명 중 392명이 실패라는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실패학교가 과연 명문은 명문이다. 나도 명문에 입학해야지.
2500년 전의 인물 노자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큰 틀의 희망을 가지는 목표를 세우는 길을 보여준다. “크게 충만한 것은 빈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의 작용은 다함이 없다. 크게 곧은 것은 굽은 것고 같고 뛰어난 기교는 졸렬한 것과 같고, 뛰어난 말솜씨는 어눌한 것과 같다” 그러니 큰 지혜는 바보 같을 수밖에! 맞다. 바보처럼 살아라! 손해보면 살아라. 남을 위해 살아라. 공부해서 남주라. 성공해서 베풀어라. 이것이 목표다. 이것만이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 다른 희망은 희망을 이루었을 때 더 큰 절망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나폴레옹이 적의 요새를 정복하러 나서 산 정상에 올라보니 “여기가 이니개벼”라고 했단다. 우리 인생을 다 살고 이래서는 안된다. 우리의 진정한 희망! 남을 위한, 멀리 보는, 길게 남는, 영원한 가치를 향해 달려가는 희망쟁이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