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인생을 위한 짧은 일어 책 - 이것은 외국어 공부로 삶을 바꿀 당신을 위한 이야기 긴 인생을 위한 짧은 책
김미소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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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홀로 발버둥치며 가만히 꿰어온 일본어라는 구슬이 어느 날, 하나의 반짝이는 공예품이 되어 있었다. 의도하지 않은 구슬 한 꿰미가 별과 같이 빛날 거라는 확신이 전혀 없을 때에도 무언가를 불태울 것처럼 계속 나아갔고, 아름답고 귀중한 것이 손에 쥐어졌다.

나는 재차 수능을 치르고 일본 문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다. 성적과 전공이 기본적으로 이웃하며 등가적으로 존재하길 바라는 작은 기대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현실 앞에 오로록 무너졌다. 나는 반수생으로서 개인적인 책임이 있었다. 그 책임을 팽개치고 현실을 마주하지 않을 순 없었다. 학과보다 중요한 것은 대학이었다. 두 번째 대학 생활, 바쁜 일상에 쫓겨 ‘나는 왜 언어를, 그것도 일본어를 학습하고 있을까?’ 하는 의식은 마음 어느 한 곳에 감춰졌다. 언어를 학습하는 한 사람으로서, 최소한 언어를 통해 나를 단련한다는 의지조차 없었다. 학점과 장학금, 둘의 등가 교환을 굳건히 해나갔을 뿐이다.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러나 달리다보니 꽤나 먼 곳까지 왔다고 생각했다. 2학년을 마무리할 즈음, 나는 일본어능력시험 1급을 치렀다. 학기별로 한 급수씩. 1학년 2학기에 3급을 치르고, 한 급수씩 올리는 식으로. 하지만 청해(듣기) 점수 미달로 1급은 재시험을 치러야 했다.

3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 겨우내 1급 시험에 합격했다. 성취감이 내 머릿속에 홀연히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허영심의 세계로 끌고 들어갔다. 일본에서 살아보자, 이 정도 실력이면 일상에 지장이 없을 거라는 자만. 한국에서 나의 나날은 별 탈 없이 흘러갔고, 일본에서 나의 나날 역시 별 탈 없이 흘러갈 거라는 확신. 그 마음을 동력 삼아 도쿄나 오사카가 아닌 히로시마로 유학을 결정했다. 한국 사람들이 거의 없는 곳이야말로 일본어를 학습하는 올바른 방향이라 믿었다. 자만과 확신이 어느새 난처한 듯 침묵으로 일관하기까지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음이다.

유려한 글말이 일상 대화를 보장하지 않는다. 일본어능력시험 1급에 합격했으니 일본에서 생활이 막힘없을 거라는 확고한 예감 같은 것은 불과 하루만에 무너져 내렸다.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주문할 때였다. 가게 안에서 먹고 갈 건지, 음식을 포장해서 가져갈 건지를 묻는 점원에게 はい!(하이) 만을 외쳐대는 무식용감한 나를 떠올리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진다.

은연중에 바라온 생활 일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나의 모습은 의외로 잦은 술자리에서 단련을 거듭했다. 질문하고, 몰래 구석에 틀어박혀 손에 들린 메모장에 끄적인 소중한 문장들은 어디서도 접하지 못한 생활 언어였다. 당신의 표정마저도 모방하고 말겠다는 강렬하고도 진지한 노력과 일본어를 구사해야 하는 환경에 자주 노출한 덕이었을까. 비록 막힘이 있고, 품이 들어도 소통이 불편함은 없었다. 외려 더욱 자연스러운 일본어를 구사하고 싶다는 생각에 힘이 실렸다고나 할까.

순수하게 일본어를 잘하고 싶다는 감정과 노력은 저자가 한 말처럼 몸에 그대로 새겨지는 듯했다. 더 이상 노력에 대한 성과를 확신하지 못해 그 노력이라는 것을 게을리하는 나는 없었다. 일단 부딪친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수반되어도 괜찮다. 긴장되는 상황 속에 나를 집어넣은 경험만큼은 분명히 남았다. 그것을 한데 모아 묶어놓으면 공부를 지속해나갈 새로운 동기가 되었다.

"새 언어는 내 몸 안에 소복이 눈처럼 쌓이는 거였다. 경험이 쌓이는 만큼 새 언어가 쌓였다. 반대로 경험이 없다면 쌓일 언어도 없었다. '지금-여기'의 세상으로 나가서 부딪치는 만큼, 당황한 만큼, 몸개그를 한 만큼, 학생들에게 웃음을 준 만큼 언어가 쌓이는 거였다."

의도하지 않은 삐걱거림이 외려 우리를 완벽함으로 이끈다. 그 보잘것없는 내 모습을 감당하게 될 때야 비로소 나의 말을 건넬 수 있게 되는 듯하다.

언어를 더하기가 아닌 곱하기로 생각하라는 말이 소중한 기념품을 받은 양 마음에 남아있다. 언어를 더 잘 쓰게 된다는 건 각각의 언어를 100점으로 끌어올리는 게 아닌 언어와 언어 사이를 가로지르는 것이라는 그 말.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이 책이 언어를 대하는 내 세계를 확장시켰다는 점이다.

@shelter_dybook 에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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