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어미 인어를 고아 만든 기름을 마시면 천 년을 무병장수할 수 있다고 한다. 몹쓸 병에 걸려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사람도 인어 기름 몇 방울만 마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 거리를 활보할 정도라고 하니 탐내지 않을 이 어디 있으랴. 욕망으로 대변되는 그 기름 앞에 마을 사람들은 순리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저간의 사정도, 나름의 오래 살아야 할 이유도 기름을 탐하는 이상 결국에는 욕망으로 수렴했다. 아아, 예부터 욕망만 좇은 이들은 하나 같이 어떻게 되었던가. 예나 지금이나 인어 기름을 탐하는 이들이 넘쳐난다는 것을 저자는 시대 배경과 장면을 바꿔가며 은근하게 드러낸다. 통일신라 효소왕 재위 시절과 20세기 초의 모습을 번갈아 드러내며 말이다. 통일신라를 지낸 공랑이 20세기 초 공 영감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마 맞으리라. 기실 홀로 살아남은 공랑이 어미 인어의 기름을 홀로 독차지하여 1000년 넘게 삶을 이어왔으리라. 마지막 기름 한 방울을 폐병에 걸린 영실에게 먹여 그 아비인 덕무에게 자그마한 욕망 하나를 심었다. 이 기름을 먹으면 다 죽어가는 딸이 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나온 그것. 한편, 공 영감은 욕망의 얼굴을 대변하고, 어쩌면 욕망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인어 기름을 먹은 공 영감의 얼굴은, 처음의 그것과 다르게, 극의 후반부에 치달을수록 더더욱 추악하게 변해간다. 욕망도 처음엔 번듯한 모양을 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악독하고 추악한 본모습을 내비치니 공 영감과 다를 게 없었다. 극의 결말, 덕무와 영실이 내린 선택은 위의 질문에 훌륭한 답안이 돼 주었다. 명확한 교훈, 흡인력, 뛰어난 가독성. ‘재밌다’라는 말이 정말이지 잘 어울리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