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스트라우스 -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박성래 지음 / 김영사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가정해보자. 이 세상이 다 거짓말이다. 내 머리위에 떠있는 해도 거짓이고, 아웅다웅 거리며 사는 사람들도 헛된 것을 쫓아 수고한다. 온통 거짓만이 난무하는 세상 밖 진리를 본사람은 내가 유일하다. 햇살을 제공해주는 해도, 밤길을 비춰주는 달, 사람들이 진리라 생각되는것도 다 거짓일때 진실을 아는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사람들에게 '당신과 관련된 모든것이 거짓이요!' 라고 설득하고, 진리를 찾아서란 다큐멘터리 제작에 들어가야 할까? 안된다. 그네들이 착각하는 허구의 성채를 지켜줘야 한다. 그것이 흔들리면 사회질서가 불안해지고, 도덕이 붕괴되기 때문이다. 진리를 아는 극소수의 엘리트는 종교와 신화가 판타지로써 대중들의 타락을 막아줄것이므로 그것을 적절히 이용해야한다. 이는 내생각이 아니다. 스트라우스의 주장이다. 그보다 심각한건 이친구의 농담을 애지중지하며 현실사회에 써먹을려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고, 그들이 지구상의 가장 힘센나라를 주무르는 자리에 있단 사실이다.

네오콘은 레오콘이라 불러도 무방할만큼 레오 스트라우스의 이론에 빚을지고 있다. 그간 부시의 행보는 교조적이라 할만큼 취임사의 연설문에서 부터 상대방을 규정하는 방식까지 충실히 스트라우스적이다. 적과 친구를 구분하라, 좋은 제국주의와 나쁜 제국주의가 존재하므로 미국이란 좋은 제국주의를 해외에 수출해야한다는 원시적 이분법은 스트라우스가 적극적으로 미국의 정책에 개입하는 사실을 방증한다. 부시의 뇌구조를 정신분석학 모델로 분석할때가 아니다. 네오콘과 그 사상적 기반인 스트라우스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국을 상대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저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일때다.

맑스의 말을 빌리자면 스트라우시언들은 자신들의 전략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극단적 엘리트주의에 기반해 대중을 계몽의 대상, 선전선동의 도구로 파악할때 어떤 사회적 폐단이 발생하는가? 이런 고민을 잠깐이라도 해본적이 있는 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특히 어떤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미동맹을 견고한 것으로 여기는 이들은 필히 임기응변적 동맹이란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것이다. 스트라우스를 아는것은 책의 선전문구에 나와있듯 독도를 지키는것 보다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것만큼 중요하다는데 동의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르크스 평전 -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의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지난 세기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누구일까? 이젠 오래전의 일이지만 밀레니엄을 앞두고 중앙일보가 20세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칼 맑스를 선정했었다. 종교개혁을 한 루터도 아니고, 노예해방을 했다는 링컨이 아니라 공산주의란 유령을 인류앞에 끌고나온 맑스를 한 세기의 상징적 인물로 꼽은것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이것은 지난 100여년의 세계 어느곳이건 맑시즘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것을 함축한다. 한 개인의 사상적 성과가 어떻게 다음 시대에 더 뜨겁에 타오를수 있는지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을 들어보자. "위대한 학자들 대부분의 학문적 가치는 보통 그들이 죽고 난 다음에야 제대로 인정된다. 시간이 그 가치의 효력을 완전히 발휘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다. '자본'의 가치는 지금도 유효하다. 자본주의란 싸이클이 지속되는한 그의 분석틀은 여전히 우리가 살고있는 곳을 명징하게 알려주는 이정표이기 때문이다 .

 

젊을때는 모두가 이상주의자요, 맑스주의자라고 하지만 난 이제껏 그의 변변한 연대기 조차 읽지 못했다. 그에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간신히 공산당 선언이나 만지작 거렸을 뿐이다. 인상적인 것은 교서적 성격을 가진 선언은 사회과학서 임이 틀림없으나 내겐 문학으로 기억된다. 그것은 맑스의 빼어난 문장력 탓인데 선언에서의 비유와 수사는 연신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인류사를 전복 시킬만한 역사적 성찰, 자본주의를 꿰뚫는 경제적 직관을 100여쪽 남짓한 공간에 모조리 구겨넣는데 성공한 역작을 겨우 4일만에 완성했다는 것이다.

 

저자인 자크 아탈리는 미테랑의 경제입안자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엔 노마디즘이 유행일때 호모노마드란 책으로 소개되기도 했었다. 유목주의란 키워드로 인류사를 다시쓰려 한 그의 시도에 한쪽에선 냉소와 조롱을 보낸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이책에서 맑스의 일대기를 쫓으면서 사실적인 기술에만 매달리지 않는다. 맑스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고, 배면에 잠복해 있던 그의 목소리가 때론 뚜렷이 드러난다. 이책은 맑시즘의 왜곡과 오해에 대한 해명이라 해도 무방할것 같다. 그만큼 원류를 회복하려는 시도가 곳곳에 나타난다. 마치 다시 맑스를 읽자고 역설했던 알뛰세르가 떠오르기도 한다. 아탈리의 평가중 재미있는 것은 가장 가까이 있었고, 영혼의 동반자 였던 앵겔스가 맑스를 있는그대로 드러내지 않았단 사실이다. 특히 그가 강조점을 두는 곳은 러시아 혁명사를 서술하면서 레닌이 맑스의 이론을 오용한 측면이다. 맑스는 공산주의로 가는 과정에 자본주의 단계를 필연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술적 진보를 바탕으로 얻은 풍요를 민주적인 방법으로 노동자 계급이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은 여기서 '자본주의'와 '민주성'을 삭제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발전에 도달하지 못한 빈궁한 체제에서 중간단계를 건너뛰고 곧바로 공산주의로의 이행이었고, 방법또한 민주적이지 못했다. 레닌이 집권한 이후에도 이부분에서 트로츠키와 알력을 빚게된다. 러시아에서 레닌의 영향력이 절대화 되기 이전 맑스의 의미심장한 경고를 보자. "만약 러시아 혁명이 서방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신호탄이 된다면, 그리고 두 혁명이 서로 보완된다면, 현재 러시아의 집단 소유는 공산주의 발전을 위한 출밤점으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강줄기가 세계적 혁명의 바다와 만날때만 '공산주의 발전을 위한 출발점으로 이용될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아탈리는 너무나도 중요한 이 부분이 한 세기 동안 은폐 되었다고 말한다. 마지막 챕터를 거의 유럽 사회주의권의 변화에 할애하며 동구권 사회주의의 실패를 맑스의 순수성과 결별 시키려는 그의 시도는 맑스에 대한 저자의 애증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텍스트를 읽으며 불편한 점은 저자의 편견이 드러나는 경우인데 간혹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때가 있다. 세계적인 석학이란 아탈리의 사고는 전혀 세계적이지 못하다. "아프가니스탄이란 마치 실제적인 어떤 나라인 것 같지만 실은 아주 다양한 부족들과 국가들을 지칭하는 순수하게 시적인 용어이다. 아프가니스탄 국가란 존재하지 않는다"란 맑스의 글을 인용하며 "몇 마디 안 되는 문장으로 그나라에 대해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사람이 오늘날까지 몇이나 될까?"라는 솔직함(?)을 보여준다. 맑스는 계급은 끌어안으면서 동양의 타자들에겐 너그럽지 못했다. 인도를 향해 '역사라곤 찾아볼수 없는 나라'란 그의 발언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세기가 지난 지금도 똘레랑스의 나라에 사는 세계의 석학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도 읽지 않고, 자신의 무지를 자랑하기까지 한다. 오리엔탈리즘의 강고함에 기가 질리게 만드는 대목이다.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들며 나타나는 불길한 징후들. 높은 실업률과 경기침체, 자본축적의 가속화와 여전히, 필연적으로 더욱 악화되는 노동의 소외에서 비롯된 인간의 소외는 맑스가 왜 현시점에서도 유령으로 배회할수 밖에 없는지를 말해준다. 맑스가 말한 경제-하부구조의 중요성은 지금에 와선 더욱 중요시 되었고, 하부구조를 통해서만 상부구조가 변한다는 명제는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타당하다. "온갖 종류의 사회적 돌팔이들이 한 무더기의 만병통치약과 온갖 종류의 누더기 조각들을 가지고 사회의 불행들을 제거하고 싶어하면서도 자본이나 이윤데 대해서는 조금도 비난하지 않았다. 단순히 정치적 변혁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만 믿으며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던 이런 노동자들이 그때는 공산주의자들로 불리었다. 우리는 호칭 선택에 있어서 단 한 순간도 주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맑스를 공산주의자라고 기억해야 하는 까닭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탈식민주의에 대한 성찰 - 푸코, 파농, 사이드, 바바, 스피박 살림지식총서 248
박종성 지음 / 살림 / 200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탈식민주의가 유행이다. 아니 유행이었던것 같다. 난 책을 읽을때는 꽤나 뒷북치는 경향이 있어 몇년전부터 행간에 떠돌던 이론을 뒤늦게야 접하곤 한다. 특정논의가 한창일땐 쏠림현상 이라던가 '패거리주의가 학술영역에서도 나타나는가'같은 쓸데없는 개탄을 하다, 이전의 지나쳤던 논의가 건너야 될 강임을 깨닫곤 다시 뒷걸음질 쳐서 책장의 처음부터 만지작 거리기 일쑤다. 물론 탈식민주의가 철지난 것이냐는 항의엔 뭐라 대답할수 있을진 모르겠다. 그것은 저자의 말대로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실천담론이기 때문이다. 나름대로의 조야한 정리를 서평으로 끄적거리고자 한다.  

 

탈식민주의는 피해자의 담론이다.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폭력에 짓밟힌 기억(Trauma)을 가진 식민지가 자신에 각인된 상흔을 치유하고, 극복하는 노력인 것이다. 물리적인 통치를 벗어나 해방과 국가의 성립을 실현했더라도 체제 깊숙이 남아있는 가해의 얼룩은 쉬이 없어지지 않는다. 한국사회의 단층들. 예컨대 이라크 파병을 통한 미국의 패권적질서에 대한 자발적 복종, 식민사관(한승조같은 이들)에서 주장하는 일본식 근대화의 찬양은 식민의 트라우마에 결박당한 우리네 현실을 알려주는 징후이다. 그렇기에 근대국가를 독립시켰단 상징적 균형에 안주하는것은 모순의 골을 방치하는 것이다. 이런 틈을 메우는데 탈식민주의란 항치료제가 필요한 것이다.

 

주체는 타자란 거울을 통해 만들어지고, 규정된다. 서양(주체)은 동양(타자) 있어야 생성될수 있다. 남자/여자, 장애인/비장애인, 이성애자/동성애자등 무수한 구분들은 주체가 타자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증거이다. 지배권력은 지금도 타자화 전략을 통해 비서구지역을 재현하고 있다. 여기서 '재현'이란 특정 대상에 대한 의미를 생산하는 방식인데 이것은 이미지,기호,언어를 통한 정형화, 스테레오 타입으로 나타난다. 제국이 식민지를 어떻게 재현했는지를 살펴보면 대개 그것은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서구소설이나 영상물에서 다뤄진 비서구인은 미개하고, 문명이란걸 모르고, 계몽이 필요한 무지한 존재로 그려졌다. 이런 이미지화는 서양의 침략주의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탈식민주의는 이지점에 개입해야한다. 주체와 타자란 이분법의 경계에 끼어들어 그어져있는 차이란 선을 지우는 것이다.

 

이책은 탈식민주의에 대한 큰그림을 A4용지에 그린것이다. 최소한의 지점들만 넘겨본 요약판이라 하면 무방할 것이다. 후반의 전망에선 자율적 개인들의 현실참여와 바라보기를 넘어 실천하기를 주문한다. 개괄서의 분량도 안되는 지면때문에 진전된 논의를 하기엔 한계가 있었겠으나, 뒷부분에서 저항 민족주의를 감싸안은 저자의 태도는 민족주의에 이를가는 학계적 분위기 속에서 분명 튀지만, 동의하기엔 어렵다. 어쨌거나 요샌 권력 해부학의 탄생이라 할만큼 권력에 대한 비판이 유행인거 같다. 모르겠다. 혹 니체의 유령이 배회하는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난 대중소설, 현대소설이 좋다. 사조나 흐름에 경도되지 않고 그저 '프리'하게 읽히기 때문이다. 과문한 까닭에 고전작가들 보다 박민규나 김애란이 세상을 바로보게하고, 그네들의 유머가 진폭이 큰 살떨림을 유발하기에. 그리고 일본작가는 오쿠다 히데오가 그렇다.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는 이라부에서 이라부까지만 이해가된다. 에피소드마다 등장해 각 캐릭터들의 정신적 퇴적물을 씻어주는 이라부란 의사는 인간의 발원적 원형을 보여준다. 괴짜 아마추어 같은 그의 내면은 일상의 오폐물이 쌓이지 않은 유아적 동심의 그것이다. 그로테스크하고, 신비주의를 풍기는 그( 일반인에게 너무도 일반적이지 않는 정신과병원의 진료실의 위치도 하필 지하다. 근래엔 X-레이 촬영실도 지상에 있건만.)는 너무도 건강한 정신적 자아를 지키고 있다. 그럴수 밖에. 한마디로 '하고싶은건 지금 한다'가 생활의 모토다. 지금의 욕망을 절대 나중이나 이후로 미루지 않는다. 상대로 하여금 인상을 찌푸리게하고, 경우없단 소릴 듣겠지만 말이다. 스트레스나 강박이 자리잡을 공간을 내어주지 않는다. 이래서 배설이 중요하다.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각 꼭지에 나오는 이들의 직업을 보자. 야쿠자와 곡예사부터 야구선수, 여류작가, 심지어 정신과 전문의까지 같은 의사인 이라부에게 헬프를 때린다. 지극히 우리와 같은 범부들이다. 삶의 뒷면을 직시하지 못하고, 마주하기를 회피하는 이들에게 준 이라부의 치료법은 감정을 배설하는 방법이다. 환자를 대하는 그의 언어는 '반말'이다. 정제되지 않고, 통념의 예의나 관습, 습속의 여과기에 걸러지지 않은 내츄럴함 그자체. 반말. 허나, 그것을 간단히 건방지다고 욕할순 없다. 외양엔 웃음과 예의란 방어기제로 무장하고, 속으론 치열한 이해득실로 타인을 파악하기에 익숙한 우리의 부유하는 언어보단 낫기 때문이다.    

후기자본주의시대의 현대인들은 욕망이나 쾌락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에 익숙해있다. 아니, 지금의 개인적 욕망은 사회적 욕망에 묻히고, 가려져야만 되는 그림자다. 예술적 성향이나 개인적 지향을 지양하고, 처세와 성공학을 내면화하고, 여러 옵션을 취사선택해야만 부자아빠가 될 수 있다.. 그 부자의 줄에 서기 위해 내면의 목소리를 묵살하다 보면 정신적인 변비로 고생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정신적 변비환자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라부의 거리낌없는 욕망의 배설을 보며 통쾌해 하는 것이다.

'정신질환'이란 용어 자체가 근대의 배설물이다. 어느정도 강박, 우울증을 가지고 있지않은 현대인이 있을까? 그럼에도 정상과 비정상을 구획하려는 것은 상대를 비정상의 집단에 몰아넣고, '나'는 정상이란 범주에 안주하려는 의도다. 서양/동양, 앵글로색슨 남성/여성 장애인/정상인이란 강박적 이분법으로 권력의 체계를 짠 역사는 오늘도 반복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희극적 사기로 이슬람을 '적'의 자리에 포시셔닝한 미국과 극우 시오니스트들의 오만을 보라.

어떤 종류의 '억압'이건 결국엔 고통으로 나타난다. 정신적 억압을 강제하는 폭력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제거하지 않는한 근본적인 '억압'을 제할순 없다. 그렇다 할지라도 내 생의 뒷부분이라도 귀기울이고, 바라봄이 어떨까? 이라부가 던져놓는 '반말'의 어드바이스가 절실하겠지말 말이다. 아차! 비타민 주사도 함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 콘서트 1 - 노자의 <도덕경>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위대한 사상가 10인과 함께하는 철학의 대향연 철학 콘서트 1
황광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황광우란 이름을 접한건 공산당 선언의 해설서 였던 '레즈를 위하여'에서다. 소련의 몰락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것 같았던 맑시즘의 유효성을 절절히 주창하는 그에게서 진정한 사회주의자의 꿈을 보았다. 일회적인 생을 남김없이 하나의 꿈앞에 헌사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불혹의 나이에도 신념의 올곧음을 좌초시키지 않고, 뜨거운 가슴으로  맑시스트의 삶을 사는 그에게서 아름다움을 목도한다.(마르크스의 자본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그에게서 열정을 발견할수 있으리라) 또한, 이 책에선 그의 깊은 내공을 목도했다. 철학개론에 있어 비전공자의 조율능력으론 네임벨류의 구분자체가 비웃음을 살일이다.

철학은 시대가 아닌 개인에게도 바로세워야 될 무엇이다. 상품의 허구적 이미지를 생산하고, 인간을 그 생산활동에 편입시키는 소비사회는 인간의 소외를 초래한다. 허구와 짝퉁의 이미지가 지배하는 시대에 불복종하고, 남김없는 내가 되기 위해선 자율적인 사유가 필수적이다. 서점가 베스트셀러 10권중 반이상이 성공과 처세를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철학과 인문학에 발을 적셔야 하는 이유다.

고전을 시도하나 결국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내려오기를 거듭한게 꽤 된듯하다. 그러다 기웃거리는데가 해설서나 개론서였던 경험을 이번에도 반복했다. 역시 고전이란 자신의 약한 이로 씹고, 잘게 부숴서 삼켜야 하느니. 이 책에서의 수확이란, 역시 인문학은 나이와 연륜에 비례하여 깊이다 더한다는 상식의 확인이다. 저자가 그 사실을 드러내는 반증이다. 개괄서다 보니 내용이 부실한것은 사실이다. 어찌 맑스의 자본이나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50여쪽 남짓한 귀퉁이에 다 끄적거릴수 있겠는가? 허나 시대의 사상을 보는 그의 직관이나 통찰력은 넉넉한 칭찬을 해줘도 괜찮을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