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식민주의에 대한 성찰 - 푸코, 파농, 사이드, 바바, 스피박 살림지식총서 248
박종성 지음 / 살림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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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주의가 유행이다. 아니 유행이었던것 같다. 난 책을 읽을때는 꽤나 뒷북치는 경향이 있어 몇년전부터 행간에 떠돌던 이론을 뒤늦게야 접하곤 한다. 특정논의가 한창일땐 쏠림현상 이라던가 '패거리주의가 학술영역에서도 나타나는가'같은 쓸데없는 개탄을 하다, 이전의 지나쳤던 논의가 건너야 될 강임을 깨닫곤 다시 뒷걸음질 쳐서 책장의 처음부터 만지작 거리기 일쑤다. 물론 탈식민주의가 철지난 것이냐는 항의엔 뭐라 대답할수 있을진 모르겠다. 그것은 저자의 말대로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실천담론이기 때문이다. 나름대로의 조야한 정리를 서평으로 끄적거리고자 한다.  

 

탈식민주의는 피해자의 담론이다.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폭력에 짓밟힌 기억(Trauma)을 가진 식민지가 자신에 각인된 상흔을 치유하고, 극복하는 노력인 것이다. 물리적인 통치를 벗어나 해방과 국가의 성립을 실현했더라도 체제 깊숙이 남아있는 가해의 얼룩은 쉬이 없어지지 않는다. 한국사회의 단층들. 예컨대 이라크 파병을 통한 미국의 패권적질서에 대한 자발적 복종, 식민사관(한승조같은 이들)에서 주장하는 일본식 근대화의 찬양은 식민의 트라우마에 결박당한 우리네 현실을 알려주는 징후이다. 그렇기에 근대국가를 독립시켰단 상징적 균형에 안주하는것은 모순의 골을 방치하는 것이다. 이런 틈을 메우는데 탈식민주의란 항치료제가 필요한 것이다.

 

주체는 타자란 거울을 통해 만들어지고, 규정된다. 서양(주체)은 동양(타자) 있어야 생성될수 있다. 남자/여자, 장애인/비장애인, 이성애자/동성애자등 무수한 구분들은 주체가 타자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증거이다. 지배권력은 지금도 타자화 전략을 통해 비서구지역을 재현하고 있다. 여기서 '재현'이란 특정 대상에 대한 의미를 생산하는 방식인데 이것은 이미지,기호,언어를 통한 정형화, 스테레오 타입으로 나타난다. 제국이 식민지를 어떻게 재현했는지를 살펴보면 대개 그것은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서구소설이나 영상물에서 다뤄진 비서구인은 미개하고, 문명이란걸 모르고, 계몽이 필요한 무지한 존재로 그려졌다. 이런 이미지화는 서양의 침략주의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탈식민주의는 이지점에 개입해야한다. 주체와 타자란 이분법의 경계에 끼어들어 그어져있는 차이란 선을 지우는 것이다.

 

이책은 탈식민주의에 대한 큰그림을 A4용지에 그린것이다. 최소한의 지점들만 넘겨본 요약판이라 하면 무방할 것이다. 후반의 전망에선 자율적 개인들의 현실참여와 바라보기를 넘어 실천하기를 주문한다. 개괄서의 분량도 안되는 지면때문에 진전된 논의를 하기엔 한계가 있었겠으나, 뒷부분에서 저항 민족주의를 감싸안은 저자의 태도는 민족주의에 이를가는 학계적 분위기 속에서 분명 튀지만, 동의하기엔 어렵다. 어쨌거나 요샌 권력 해부학의 탄생이라 할만큼 권력에 대한 비판이 유행인거 같다. 모르겠다. 혹 니체의 유령이 배회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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