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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평전 -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의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지난 세기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누구일까? 이젠 오래전의 일이지만 밀레니엄을 앞두고 중앙일보가 20세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칼 맑스를 선정했었다. 종교개혁을 한 루터도 아니고, 노예해방을 했다는 링컨이 아니라 공산주의란 유령을 인류앞에 끌고나온 맑스를 한 세기의 상징적 인물로 꼽은것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이것은 지난 100여년의 세계 어느곳이건 맑시즘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것을 함축한다. 한 개인의 사상적 성과가 어떻게 다음 시대에 더 뜨겁에 타오를수 있는지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을 들어보자. "위대한 학자들 대부분의 학문적 가치는 보통 그들이 죽고 난 다음에야 제대로 인정된다. 시간이 그 가치의 효력을 완전히 발휘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다. '자본'의 가치는 지금도 유효하다. 자본주의란 싸이클이 지속되는한 그의 분석틀은 여전히 우리가 살고있는 곳을 명징하게 알려주는 이정표이기 때문이다 .
젊을때는 모두가 이상주의자요, 맑스주의자라고 하지만 난 이제껏 그의 변변한 연대기 조차 읽지 못했다. 그에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간신히 공산당 선언이나 만지작 거렸을 뿐이다. 인상적인 것은 교서적 성격을 가진 선언은 사회과학서 임이 틀림없으나 내겐 문학으로 기억된다. 그것은 맑스의 빼어난 문장력 탓인데 선언에서의 비유와 수사는 연신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인류사를 전복 시킬만한 역사적 성찰, 자본주의를 꿰뚫는 경제적 직관을 100여쪽 남짓한 공간에 모조리 구겨넣는데 성공한 역작을 겨우 4일만에 완성했다는 것이다.
저자인 자크 아탈리는 미테랑의 경제입안자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엔 노마디즘이 유행일때 호모노마드란 책으로 소개되기도 했었다. 유목주의란 키워드로 인류사를 다시쓰려 한 그의 시도에 한쪽에선 냉소와 조롱을 보낸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이책에서 맑스의 일대기를 쫓으면서 사실적인 기술에만 매달리지 않는다. 맑스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고, 배면에 잠복해 있던 그의 목소리가 때론 뚜렷이 드러난다. 이책은 맑시즘의 왜곡과 오해에 대한 해명이라 해도 무방할것 같다. 그만큼 원류를 회복하려는 시도가 곳곳에 나타난다. 마치 다시 맑스를 읽자고 역설했던 알뛰세르가 떠오르기도 한다. 아탈리의 평가중 재미있는 것은 가장 가까이 있었고, 영혼의 동반자 였던 앵겔스가 맑스를 있는그대로 드러내지 않았단 사실이다. 특히 그가 강조점을 두는 곳은 러시아 혁명사를 서술하면서 레닌이 맑스의 이론을 오용한 측면이다. 맑스는 공산주의로 가는 과정에 자본주의 단계를 필연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술적 진보를 바탕으로 얻은 풍요를 민주적인 방법으로 노동자 계급이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은 여기서 '자본주의'와 '민주성'을 삭제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발전에 도달하지 못한 빈궁한 체제에서 중간단계를 건너뛰고 곧바로 공산주의로의 이행이었고, 방법또한 민주적이지 못했다. 레닌이 집권한 이후에도 이부분에서 트로츠키와 알력을 빚게된다. 러시아에서 레닌의 영향력이 절대화 되기 이전 맑스의 의미심장한 경고를 보자. "만약 러시아 혁명이 서방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신호탄이 된다면, 그리고 두 혁명이 서로 보완된다면, 현재 러시아의 집단 소유는 공산주의 발전을 위한 출밤점으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강줄기가 세계적 혁명의 바다와 만날때만 '공산주의 발전을 위한 출발점으로 이용될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아탈리는 너무나도 중요한 이 부분이 한 세기 동안 은폐 되었다고 말한다. 마지막 챕터를 거의 유럽 사회주의권의 변화에 할애하며 동구권 사회주의의 실패를 맑스의 순수성과 결별 시키려는 그의 시도는 맑스에 대한 저자의 애증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텍스트를 읽으며 불편한 점은 저자의 편견이 드러나는 경우인데 간혹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때가 있다. 세계적인 석학이란 아탈리의 사고는 전혀 세계적이지 못하다. "아프가니스탄이란 마치 실제적인 어떤 나라인 것 같지만 실은 아주 다양한 부족들과 국가들을 지칭하는 순수하게 시적인 용어이다. 아프가니스탄 국가란 존재하지 않는다"란 맑스의 글을 인용하며 "몇 마디 안 되는 문장으로 그나라에 대해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사람이 오늘날까지 몇이나 될까?"라는 솔직함(?)을 보여준다. 맑스는 계급은 끌어안으면서 동양의 타자들에겐 너그럽지 못했다. 인도를 향해 '역사라곤 찾아볼수 없는 나라'란 그의 발언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세기가 지난 지금도 똘레랑스의 나라에 사는 세계의 석학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도 읽지 않고, 자신의 무지를 자랑하기까지 한다. 오리엔탈리즘의 강고함에 기가 질리게 만드는 대목이다.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들며 나타나는 불길한 징후들. 높은 실업률과 경기침체, 자본축적의 가속화와 여전히, 필연적으로 더욱 악화되는 노동의 소외에서 비롯된 인간의 소외는 맑스가 왜 현시점에서도 유령으로 배회할수 밖에 없는지를 말해준다. 맑스가 말한 경제-하부구조의 중요성은 지금에 와선 더욱 중요시 되었고, 하부구조를 통해서만 상부구조가 변한다는 명제는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타당하다. "온갖 종류의 사회적 돌팔이들이 한 무더기의 만병통치약과 온갖 종류의 누더기 조각들을 가지고 사회의 불행들을 제거하고 싶어하면서도 자본이나 이윤데 대해서는 조금도 비난하지 않았다. 단순히 정치적 변혁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만 믿으며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던 이런 노동자들이 그때는 공산주의자들로 불리었다. 우리는 호칭 선택에 있어서 단 한 순간도 주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맑스를 공산주의자라고 기억해야 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