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대학입학을 생각하는 아이들이라면 매우 이른 시기에 자신이 나아갈 학문적 방향을 선택하게 된다. 혹 그 학문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자기만의 전망이 없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것 없다. 소위 ‘잘 나가는’ 학문에 대한 사회의 잣대가 매우 명확하기 때문에, 그저 잘 나가는 학문의 목록에서 자신의 성적에 맞는 걸 고르거나, 어른들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따르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한 학문의 길이 결코 즐거울 수는 없을 것이다. 잘 나가는 학문이라고 해서 제 취향에 맞지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그 선택을 되돌리기란 매우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니 어쩌다 선택한 그 길을 그냥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80대의 노학자인 피터 L.버거도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이민자인 피터 L.버거는 루터파 목사가 되고 싶었지만 어쩌다 보니 사회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사회학자가 되어있었단다. 서평작인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는 이 노학자가 사회학을 공부하고, 그걸 업으로 살면서 겪게 된 다양한 에피소드를 담은 책이다.


그러나 순수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이 노학자의 삶을 따라가기엔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 있다. 아마도 피터 L.버거가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자,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우리가 흔히 훌륭한 사회학자라고 하면 떠올리는 어떤 진보적인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사회학자로서 ‘멘토’를 자청하려면 정부와 자본주의에 대해 다소 과격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학자로서 피터 L.버거는 그런 사회학의 정치적 지향에 반대한다. 그는 사회학에서 있어서 가치 중립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런 성향 때문인지, 그 자신과 그의 책은 종종 양쪽 진영 모두에게 공격을 당했고, ‘등터지는 새우’의 신세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피터 L.버거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사회학자가 사회를 보는 방법, 연구하는 방법, 그리고 그 속에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가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에 벌어진 몇몇 에피소드는 사회운동의 어두운 일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내용의 심각성에 비해(이를테면, 미국의 대표로 유엔인권위원회에 참석해 쿠바 대표와 미국의 제국주의에 관해 설전을 벌이는 것) 문체는 가볍고 유머러스하다. 그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정치적 지향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중요한 것은 합리적이고 윤리적으로 판단하여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한 사람의 지적 여정을 따라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학문이 힌 사람의 삶을 제대로 대변해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단 한국 교육현실의 문제만은 아니다. 피터 L.버거는 사회학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은 겨우 세 번째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첫 번째는 깊은 내면의 자아이고, 두 번째는 종교적인 삶이라고 말한다. 사회학자로서의 삶은 그저 첫 번째와 두 번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제3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하면서, 한편으로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은……. 꼭 독자가 학자로서의 삶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피터 L.버거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은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그의 태도에서 배울 점이 많다. 대리체험에서 그칠 게 아니라, 그를 따라 합리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사아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이 던지는 교훈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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